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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과 이기붕: 4ㆍ19 학생의거로 뒤바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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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과 이기붕: 4ㆍ19 학생의거로 뒤바뀐 운명

CEO출신 역술인 김남용이 본 '역사의 라이벌' <49>

자유당 독재 시절 가장 주목받던 인물이 이기붕입니다. 큰 아들 이강석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들여놓고 안으로는 박마리아 여사의 간섭과 밖으로는 대통령의 절대 명령에 복종하면서 개인적으로는 그리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았으며, 결국 3ㆍ15 부정선거로 일어난 4ㆍ19 학생의거는 그의 서대문 경무대를 불태우고 이기붕 일가를 자살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고 말았습니다. 아! 4ㆍ19. 탱크에, 트럭에 몸을 싣고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거리를 질주하며 맨 몸으로 항거했습니다. 필자도 그때 고등학교 1학년으로서 죽음의 도시로 변한 서울 거리를 배회한 기억이 납니다.

무너진 자유당 정권을 이어받은 장면 부통령. 그는 그때 이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독재에 시달릴 때마다 사람들의 가슴에는 신익희, 조병옥, 장면 등의 애국지사가 있었기에 모진 세월을 조그마한 희망의 등불로 삼고 견뎌왔습니다. 그러나 정치 세계는 무상했습니다. 정권을 이어받은 지 불과 채 1년도 안 되어 거리의 질서는 데모대의 무질서로 무너지고 아무리 질서를 외쳐본들 무서움이 없어진 민중 앞에는 소귀에 경읽기였습니다.

5ㆍ16 군사혁명 혹은 쿠데타, 역사는 이제 새로운 정권의 탄생에 몸을 맡겼습니다.

인간 장면, 점잖고 지성적이면서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자, 우리는 그의 역량을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습니다. 4ㆍ19 학생의거로 하루 아침에 뒤바뀐 역사의 주역들, 이 두 분을 소개합니다.

***장면 [張勉, 1899.8.28~1966.6.4]**

1899년 8월 28일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운석(雲石)이다.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YMCA영어학교를 나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5년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가톨릭교 평양교구(平壤敎區)에서 활약하다가 서울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교장에 취임, 8·15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과도정부 입법의원 등을 역임하고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敎皇廳)을 방문한 후 미국에 가서 맨해튼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駐美大使)가 되어 한미국교를 위하여 공헌하였다. 1950년 영국 포덤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6·25전쟁 때는 주미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퇴하였다.

그 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조직, 최고위원이 되고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해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하였으나 경상(輕傷)에 그쳤다. 1957년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 1960년 조병옥(趙炳玉)과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였다.

4·19혁명 후 제5대 민의원(民議員)을 거쳐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집권 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정책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어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후 정치정화법(政治淨化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한때 이주당(二主黨)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후 종교생활에 전심하다가 간염으로 죽기 직전 정치정화법에서 풀렸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포천(抱川) 가톨릭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기붕 [李起鵬, 1896~1960.4.28]**

본관 전주(全州). 호 만송(晩松). 서울 출생.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선교사 J.R.무스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하이[上海]를 경유, 미국에 가서 고학으로 아이오와주(州) 데이버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후 뉴욕에서 허정(許政) 등과 교포신문인 《삼일신문(三一新聞)》 발간에 참여하였다. 1934년 귀국, 1945년 이승만(李承晩)의 비서로 정계에 들어갔으며, 1949년 서울특별시 시장, 1951년 국방부 장관이 되어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을 처리하였다.

1951년 이승만의 지시로 이범석(李範奭)과 함께 자유당(自由黨)을 창당, 2년 후 이범석의 족청계(族靑系) 세력을 축출하고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 실권을 장악하였다. 1954년 5월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민의원 의장이 되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重任)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 일단 부결된 것을 사사오입(四捨五入)으로 번복, 가결을 강행하였다.

1956년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고,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 때 공개·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景武臺)에 피신해 있다가 당시 육군장교이던 장남 강석(康石)이 권총을 쏘아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① 장면

생년월일 : 1899년 8월 28일 사시
운명요소 : 기해년 계유월 계묘일 정사시(己亥年 癸酉月 癸卯日 丁巳時)

② 이기붕

생년월일 : 1896년 12월 20일 진시
운명요소 : 병신년 신축월 경진일 경진시(丙申年 辛丑月 庚辰日 庚辰時)

***1. 소질 검색**

① 장면(己->癸ㆍ癸->丁)

먼저 계와 기(癸<-己)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헌신충의형의 소질입니다. 복종심 있는 충절을 가슴에 담고 윗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가 주미 대사 시절 미국과 유엔에 보인 진정한 성실성은 여기에 기인한다고 보여집니다.

그 다음 계와 정(癸->丁)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교유, 교제의 소질입니다. 이 소질이 그의 민주당에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② 이기붕(丙->辛<-庚ㆍ庚)

먼저 경과 병(庚<-丙)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병과 신(丙->辛)이 합거(合去, 영향력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현상)되므로써 매우 약화되었지만 윗사람에게 괜한 미움을 받는 관계입니다.

그것은 은근히 상사를 압박하는 분위기 연출에 기인한다고 보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실 이기붕을 탐탁치 않게 여긴 것도 이 소질에 연유한다고 보겠습니다.

***소질표**

***2. 욕망 검색**

① 장면(癸일에 酉월)

명예욕이 있습니다. 지식과 남을 이용하여 자기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명예욕입니다.

② 이기붕(庚일에 丑월)

명예욕이 있습니다. 지식과 남을 이용하며 자기의 명예를 높이고자 하느 명예욕입니다.
또한 개혁 욕망, 자기 표현 욕망, 인기 욕망이 있습니다.

***3. 본능검색**

***본능표**

***4. 개성 검색**

***개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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