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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더불어숲학교 18-19일 첫 수업 가져

번화한 거리에서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간판이다. 너나할 것 없이 자기만을 뽐내고 있는 간판에서 주변과의 조화를 고민한 흔적은 없다. 이에 비하면 산 속, 숲 속의 나무들은 수종도 다르고, 높이며 색깔이 제각각인 것은 간판과 다를 것이 없지만, 가을만 되면 형형색색 모여서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뽐내기 마련이다. 간판이 아닌 나무로 이루어진 사회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모였다. 더불어숲학교(교장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지난 18~19일 주말 이틀간 강원도 내린천의 미산계곡 개인산방(開仁山房)에서 조촐히 문을 열고 첫 발을 내딛였다.

<사진1> 프레시안

***"도로가 놓이면 자연은 망가지기 마련"**

더불어숲학교가 있는 내린천 미산계곡으로 들어서자 단풍이 한창이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시멘트로 마구 놓은 다리, 주변과 동떨어진 현대식 집들, 심지어 철골 구조의 전화 기지국까지 마구잡이로 들어서는 시설물들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는 길을 동행한 이승혁 씨는 "이런 게 자꾸 들어오고 개발되면 여기가 얼마나 망가질까"라며 무분별한 개발을 안타까워했다. 이 길을 여러 번 왔다는 그는 "이 좋은 길, 걷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달구지도 타고 킥보드도 타고 가지요"라며 "여기를 느끼는 방법은 천천히 차를 타고 가면서 창문 다 열고 상반신을 창 밖으로 쭉 빼고 자연을 감상하는 것"라면서 몸소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걸어서 온 사람, 친구끼리 온 사람, 석 달된 아이를 업고 온 사람들까지 하나 둘씩 모여 30여명이 되었다. 20대에서 60대까지, 그 중에는 교수도 있고, 방송인도 있고, 목수도 수녀도 주부도 있다. 숲 속 조그만 마을에 모였다고 갑자기 이들이 숲이 될 수는 없는 법.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유일한 20대 참가자인 한 학생은 "더불어숲 모임에 참가하고는 싶었지만, 모임 속에서 또 사회 속에서 튕겨나가질까 봐 두려웠다"라고 조심스러워 했다.

첫 강의를 맡은 유재원 교수(한국외대)도 "여기 오신 분들이 처음에 느낀 생각은 '좋다'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이 흐르고 단풍은 좋은데, 낯선 것에 대한 걱정부터 하셨을 것"이라면서 "'좋기' 위해서는 오래 있어야 해요"라고 짚어줬다.

<사진 2>

***"계곡만큼 아름다운 산실을 만들어 나가자"**

사실 '더불어숲'은 신영복 교수(성공회대)의 저작이기도 하고, 그를 사랑하는 모임의 명칭이기도 하다. 신 교수와 그의 생각, 그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대자연 속의 살아있는 문화공동체를 꿈꾸며 만든 공간이 바로 더불어숲학교이다. 학교는 무엇을 가르치는 의미가 담겨 있지만, 여기선 스승도 제자도 모두 배우고 서로를 가르친다.

신영복 교수는 개교 인사말에서 "이 앞의 계곡만큼이나 아름다운 문화적 산실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최근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절망하는데, 작지만 위로가 되고 약속이 되는 작은 모임을 만들어가자"며 더불어숲학교의 취지를 설명했다.

한편 개인산방(開仁山房)을 일구며 이날 더불어숲학교 공간을 만들어준 미산 신남효 선생은 "이왕 학교를 시작했으면 인류가 짊어지고 온 문명사적 문제를 하나라도 풀어야 할 것"이라며 격려했다.

첫 강의는 유재원 교수의 '왜 다시 신화인가 - 21세기에 부는 신화바람'이었다. 숲 속 작은 모임에서 신화를 공부하는 것은 별자리를 공부하는 것보다 일견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 교수는 "신화는 합리성의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배척되었고 결국 합리성에 매몰된 사회가 오늘날의 갈등과 폐단을 불러왔다"며 그 대안으로 신화를 제시했다.

<사진 3>

***"이런 모임이 확대 재생산되기를"**

저마다의 나이테가 다른 사람들이 모인 이상 모임의 성격과 나갈 방향에 대해 이견도 표출됐다. 집짓는 일을 하고 있다는 김준호씨는 "소위 지식인들이 (현장에) 오면 말은 열심히 하지만, 현장 반응은 차갑다"며 "하고 싶은 말은 노동자들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라며 토론이 공염불이 아닌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이에 미산 선생은 "몸으로만 아는 것도 다 아는 것이 아니고, 몸을 통하지 않고 아는 것도 진짜 아는 것은 아니다"며 이 둘의 조화를 강조했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박성규씨는 "지금 회비로는 수익도 맞지 않을 텐데, 한번 모임으로 끝나게 되는게 아닌지 걱정된다"며 "이런 모임에 목말라 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확대 재생산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털어놨다.

전화도 없고 TV도 없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습관을 완전히 털어내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김명자씨는 "우리는 남들과 같은 것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하는 모습도 좋지는 않더라"고 지적했고, 이승혁씨는 "사실 밤이 되어도 손전등이 필요없다. 어슴푸레한 빛으로도 충분히 걸어 다닐 수 있다"며 세상의 습성을 좀 더 털어냈으면 했다.

치열하게 또 즐겁게 하룻밤이 지나갔다. 태극도인술로 몸을 풀며 시작한 아침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하루 사이에 40명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를 알면 얼마나 알았겠냐마는 아침인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엔 평온함이 있었다. 처음의 낯설음과 긴장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후를 기약하며 사람들은 그렇게 떠나들 갔다.

신영복 교수나 강의 교수가 좋아서, 아니면 서울을 떠나고 싶어서, 단풍을 구경하려고, 무언가를 배우려고, 아니면 또다른 뜻을 가지고 이곳에 왔겠지만, 그들이 떠날 때 무엇을 가지고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더불어숲학교 현판엔 "나무가 나무에게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는 문구가 적혀 있다. 목적어가 빠져있는 이 문장에서 목적어를 찾아내는 것은 바로 이들의 몫일 것이다.

더불어숲학교 제2강은 11월 1~2일 열리며 신경림 시인이 '시를 찾아서-한국의 시와 시인 이야기'를 강의한다.

관련사이트 링크 www.toursapiens.com

<유재원 교수 강의 요지>
왜 다시 신화인가-21세기에 부는 신화바람

요즘 들어 신화를 화두로 하는 책들이 부쩍 늘었다. 큰 서점에 나가 보면 신화 책들을 한데 모은 진열대가 있다. 그곳에는 그리스 신화를 비롯한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독자를 유혹한다. 마치 제각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아우성 치는 것 같다. 철학 서적이나 문학 서적을 모아 놓은 곳으로 발길을 돌려도 역시 신화가 집요하게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죠셉 캠벨의 신화에 관한 책들은 물론이고 체코 출신 독일 철학자인 쿠르트 휘브너의 '신화의 진실'이 자라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문학 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이 한쪽 구석에 놓여 있고, 그 옆으로 질베르 뒤랑의 '신화 비평과 신화 분석' 도 눈에 띈다. 데리다나 에코, 푸코나 하버마스, 들뢰즈의 저서들도 비록 책 이름에는 '신화'라는 낱말은 없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온통 신화 이야기로 가득하다. 더욱이 엘레아데의 원시 종교와 신화에 대한 책들도 부쩍 많이 번역되어 현대 사상가들의 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꽂혀 있다.

과학의 세기인 20세기를 지나 과학의 발전이 최고 수준에 이른 21세기에 들어선 마당에 왜 신화가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것일까? 서양의 합리주의와 지성 제일주의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오랫동안 황당무계한 이야기라고 천대 받던 신화가 갑작스레 '뜨는' 까닭은 무엇인가?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조셉 캠벨의 말대로 그리스도교의 권위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서양 근대 철학의 실패 때문이다.

데카르트 이후 서양의 학문은 과학적 합리주의로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데카르트는 이성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내린 은총이므로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 사유 체계라고 주장했다. 또 신의 의지에 따라 창조된 자연은 합리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순수 이성은 자연 현상이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를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데카르트는 자연이라는 객체를 인간이라는 주체와 구분했다. 즉 자연을 탈영혼화하였다. 이제 자연의 의인화는 불가능하게 되고, 감각적이고 관조적인 형상들은 배제된다. 이성 중심의 이원론적 합리주의 철학의 시작이다.

데카르트의 후예들은 합리주의를 더욱 발전시켜 학문의 대상을 실체가 증명되는 것으로 한정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서양의 근대 과학주의는 객관적으로 실체가 증명될 수 없는 것은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실증주의적 입장을 취해 왔다. 이에 따라 신화적 체험은 진리 탐구의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신화는 감성과 무의식, 그리고 환상의 심층에서 생겨나는 것이기에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현대 과학은 순수한 로고스의 세계이다. 이 세계 안에서 모든 명제는 증명되어야 하고 또 검증이 가능해야 한다. 증명과 검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논의가 명확하고 정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로고스의 세계에서 객관성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이 편협한 과학과 학문의 세계에서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거나 다시 검증해 볼 수 없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겨졌다. 심지어 한의학과 같이 인류의 오랜 경험으로 증명된 방법에 대해서도 단지 객관적으로 반복하여 증명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사이비 과학으로 비난 받았다.

따라서 과학의 시대인 현대에서 신비와 꿈으로 가득한 뮈토스의 세계, 즉 신화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런 과학의 시대에 인간들은 로고스의 횡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합리적 사고에 맞지 않는 신화는 불분명하고 마술적이며 온통 우연과 자의성에 의해 지배되는 비합리적 세계요 미신 덩어리로 지성인이라면 당연히 떨쳐 버려야 할 존재로 무시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만 인정되는 로고스의 세계에는 꿈이 없다. 나만의 세계를 꿈꿀 자유가 없다. 삭막하고 숨이 막히는 세계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꿈을 꿀 있을 권리가 있다. 꿈을 꿀 수 없는 상황에서 현대인들은 인간성의 말살을 경험해야 했다. 인간과 자연을 신성한 전체로 보지 않는 데카르트의 관점은 나와 세계, 인간과 자연을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따라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과 신, 그리고 자연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대립 관계에 놓인다. 이제 자연은 정복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자연과 인간의 괴리에서 오는 불안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탈신화화'한 세계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신화와 비슷하게 감성과 무의식, 환상이 가득한 사이비 종교나 구원론에 빠지는가 하면 나치즘이나 이슬람 원리주의와 같은 과격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빠져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이비 신화로의 도피는 비합리적인 행위로 결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과학과 기술 발전은 인류에게 유사 이래 전례가 없는 물질적 풍요와 편의를 가져다 주었지만 인간의 잔혹성과 폭력성을 순화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 시대에 인간이 보여 준 야만스러운 잔혹 행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20세기만큼 인간이 다른 인간을 많이 죽이고 차별한 시대는 없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신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인 20세기 초반에 숨막히는 합리주의와 실증주의에 억눌려 꿈을 잃은 유럽인들은 민족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라는 사이비 신화에 빠져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근대 서양의 이상인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는 세계 1차 대전이라는 비이성적 전쟁을 막지 못했다. 1차 대전이 끝난 지 채 이십 년도 지나지 않아 유럽은 다시 한번 나치즘의 광기에 휩쓸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럽의 이성주의는 이 사이비 신화 앞에 무력했다. 유사 종교와도 같은 정치 이데올로기 앞에 합리주의나 이성주의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이비 신화의 하나인 프로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공산주의가 제삼 세계 국가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유럽을 비롯한 서양의 지성인들은 이 불가사의한 광기에 두려움을 느끼며 무엇이 이런 상황을 가져오는 것인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자명했다. 인간에게 꿈꿀 자유를 빼앗은 이성주의가 가져온 불행이었다. 로고스의 대실패였다.

로고스의 실패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꿈과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 데에서 온 것이었다. 뒤랑은 고등 동물과 인간에게 꿈이 필수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고양이에게 꿈을 꾸지 못하게 한 심리학자의 실험을 소개한다. 물을 가득 채운 큰 양동이에 미끄러운 바가지 모양의 인공 섬을 설치하고 그 위에 잠든 고양이를 올려 놓는다. 고양이가 깊은 잠을 자는 동안에는 몸의 균형이 잘 잡혀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고양이가 꿈을 꾸게 되어 근육이 이완되면 고양이는 물속으로 떨어져 잠에서 깬다. 이런 고문에 잠은 잘 수 있지만 꿈을 꿀 수 없게 된 고양이는 금방 무서운 환각에 시달리다 과다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신경질과 공격성을 보이다가 끝내는 노이로제에 걸리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서 꿈을 앗아 가면 인간은 불안해지고 끝내는 공격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과학과 이성이 강조되는 현대에 인간의 난폭함이 유난한 것은 신화를 이루는 기본적인 힘인 상징적 상상을 눌렀기 때문이었다. 꿈꾸는 행복을 거부당한 인간성은 말살되었고 그 결과 세계 1,2차 대전이라는 엄청난 불행을 가져온 것이었다.

인간성을 무시한 이성주의와 합리주의가 가져온 이런 엄청난 결과 앞에 서양은 당황했다. 이와 아울러 자연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과학은 자연을 파괴했다. 공해를 만들어 내고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이상 기후와 기근이 인류를 위협한다. 이것은 서양 합리주의의 큰 실패였다. 아무리 실용적이고 이성적인 인간도 자신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갖게 되면 공상에 빠지게 마련이다.

여행길에 기차의 차창에 앉아 한가로이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 복잡한 수학 문제나 과학의 사색에 잠길 확률은 거의 없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당무계한 상상에 빠져들 것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꿈을 꿀 것이다. 아니면 자신이 백만장자가 되는 꿈에 마음껏 즐거울지도 모른다. 인간의 교육을 단순히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능력 배양을 위한 훈련으로 채우면 원천적인 생명의 힘, 자유로운 몽상이라는 야생적 본성은 신음한다. 상상력이 없는 곳에 인간의 행복은 없다.

이제 로고스의 실패는 분명해졌다. 이에 대한 해결도 또한 간단명료하다. 로고스가 실패한 것을 치료하는 데에는 다시 신비와 꿈으로 가득한 뮈토스의 세계, 즉 신화의 세계가 가장 효과적이다. 신화만이 합리주의로 황폐화된 인간의 심성을 어루만져 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신화로 돌아가야 하는 까닭이 분명해졌다. 신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비합리적 상상력이 만들어 낸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신화는 인류의 귀중한 정신 유산이요 모두가 함께 꾸는 꿈이다. 신화란 인간이 우주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하는 사고의 체계이다. 신화는 인간을 자연과 조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깨달음에서 서양의 지식인들은 신비에 가득 찬 신화의 세계를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이러한 추세는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신화와 이미지, 상징에 대한 연구는 이제 유럽의 첨단 연구 분야로 당당히 자리잡게 되었다. 오늘날 서양의 지성계에서 신화를 모르고는 행세하기 어렵다. 더구나 25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컴퓨터와 인터넷의 출현은 인류의 활동 무대를 거의 무한대로 넓혀 놓았다. 미지의 세계인 사이버 공간은 날이 갈수록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 옛날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항해할 때 신화가 커다란 정보요 길잡이였던 것처럼 오늘날 인터넷의 대해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사고 못지않게 신화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이런 학문의 흐름이 우리 나라에 도착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80년대 이후 조셉 캠벨의 책이 소개될 때만 해도 이런 경향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들어 그리스 신화를 비롯한 세계 각 민족의 신화가 전문가들의 손으로 번역되었다. 신화에 대한 이론서들도 이 시기에 많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엘리아데의 저서만도 여섯 권 이상이 나왔고, 읽기에 까다로운 휘브너의 '신화의 진실'도 출간되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 나라에서 신화에 대한 연구가 진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까지는 해외에서 행해지고 있는 신화 연구를 소개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신화 연구를 21세기의 학문으로 보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신화에 대한 관심이 문학이나 철학의 보조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진지한 연구 대상이라는 목적으로 바뀌어야 할 때이다.

신화학을 하나의 첨단 과학으로 진지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신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다. 특히 그리스 신화는 중요하다. 세계 곳곳에 여러 민족의 신화가 있다. 그러나 내용이나 원형의 풍부함에 있어 그리스 신화를 당할 신화는 없다. 그리스 신화에는 천지 개벽 설화에서부터 신들의 탄생과 계보, 인간의 탄생과 영웅들의 모험담, 비극으로 변형된 풍부한 상상력의 세계가 골고루 갖춰져 있다.

또 서양의 고대 철학은 신화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다. 서양의 석학들이 자신들의 신화 연구의 대상으로 그리스 신화를 택하는 까닭은 그리스 신화가 자신들의 뿌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용이 풍부하고 다양한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소개되어 있는 그리스 신화는 진지한 학문의 대상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하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그리스 신화는 불행하게도 1855년에 출판된 벌핀치판이다. 1855년이면 아직 쉴레이만에 의해 트로이야나 뮈케나이가 발굴되기 이전이다. 영국의 고고학자 에반스가 크레타의 크노소스 궁전을 발굴한 것은 1890년대이고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베도 1880년대에야 발굴되었다. 히타이트 제국이 발견된 것은 1905년이고 이집트의 투탄카멘의 묘지가 발굴된 것은 1920년대 일이다. 1855년 이후로 우리의 신화에 대한 정보와 이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지고 깊어졌다. 아직도 19세게 중반에 쓰여진 그리스 신화를 읽고 신화학을 한다고 하기에는 그 동안의 연구와 발전이 너무도 크다.

몇 해 전부터 나는 그리스 신화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신화에 대한 연구가 다음 세기의 첨단 학문 가운데 하나가 되리라는 믿음에서 이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를 주기 위해 그렇지 않아도 낯선 인명 지명 때문에 일기 힘든다는 그리스 신화에 온갖 기록을 다 뒤져 가며 엄청난 수의 고유 명사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말로 된 훌륭한 그리스 신화책을 한번 만들어 보려는 나의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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