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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貞勳씨 파티서 미국인에 큰 실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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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貞勳씨 파티서 미국인에 큰 실례

남재희 회고 文酒 40年-그래도 잘 마셨다 <42>

***高貞勳씨 파티서 미국인에 큰 실례**

고정훈(高貞勳)씨와 친하게 된 것은 제2공화국 때 혁신정당의 취재를 맡으며 당시 통일사회당의 선전국장으로 있던 그와 접촉하게 되면서이다. (그때 일본에서 의사로 있는 朴權熙씨는 밀양출신 국회의원으로서 조직국장, 탤런트 최명길씨의 남편인 金漢吉 전 장관의 선친 金哲씨는 국제국장이었다) 자유당정권 후기에 고씨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었는데 그가 <K생> 이라는 서명을 넣어 집필하는 국제관계 해설은 특히 학생사회에서 공부에 크게 참고가 되었었다.

그는 4.19가 나고 학생데모대가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 올 때 마침 그 옆에 위치했던 조선일보 사옥(현 코리아나 호텔자리)의 2층 발코니에 나타나 학생들을 선동하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어 조선일보를 사퇴하고 구국청년당을 만들어 정치에 뛰어들며 현란한 성명전으로 화제가 되었었다. 프랑스나 러시아혁명 때의 선동가들을 연상시키는 돌출행위였다.

고씨는 일본의 유명한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어학공부를 해 여러 나라 언어에 대단한 실력을 발휘하였다. 해방 후 소련군의 통역을 하다가 월남하여 남한의 대북공작부대의 일을 했는데 모두 그를 ‘커늘(colonel) 고’ 라고 부른 것을 보면 영관(領官)급의 대우를 받은 것 같다. 여하간 정계에 투신한 후는 결국 혁신계에 합류하고 통일사회당의 대변인으로서 눈에 띄는 활동을 보였다.

나는 그를 혁신계의 JP라고 부르고 싶다. 집권층에 진짜 JP가 있다면 혁신진영에서는 고씨가 JP에 비견할 만한 능력과 화려함을 갖춘 풍운아다. 술자리에서 러시아어로 부르는 <카츄사의 노래>는 일품이다. 여자편력도 다채로워 아마 소설가 이병주씨와 겨룬다면 난형난제였을 것이다. 술도 좋아하여 요정급만 돌아다니고 대포집은 아예 외면하였으니 그가 혁신정당에 몸담은 것이 신기한 느낌이다. 하기는 혁신정객이라고 풍류를 모르라는 법은 없다.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씨도 기생파티를 즐겼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고 그것이 흠이 아니다. 혁신정객과 보수정객이 똑같은 사람들인데 구별 짓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런 고씨가 5.16세력이 혁신계를 때려잡을 때 서대문에 들어가 4년여의 옥고를 치뤘다. 옥에서 나와서는 다시 필력을 발휘하여 <토하고 싶은 이야기들> <군>을 비롯하여 책도 내고 언론에 글도 많이 썼다. 또 가히 홍길동이라 할 만하여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와의 인연을 이용해서 무역회사도 차려 돈벌이에도 나섰다.

한 번은 청진동의 요정으로 오라기에 갔더니 제제다사의 모임이다. 소설가ㆍ언론인 선우휘(鮮于煇), 교수ㆍ언론인 양호민(梁好民)씨는 잘 알지만 에드워드 와그너, 스티브 브레드너씨는 초면이다.

와그너씨는 하바드대학의 한국학 책임자로 우리의 족보를 연구하여 조선시대의 사회계층변동을 설명한 유명한 학자이다. 한국일보 특파원으로 금문도(金門島)사태를 취재 갔다가 실종한 코리아 타임스 편집국장 최병우(崔秉宇)씨의 미망인 김남희(金南姬)여사와 재혼하여 한국사람에게 더 친밀한 느낌을 주었다. 김 여사는 일본의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하바드의 한국어 강사를 했다.

브레드너씨는 미국동부의 명문출신으로 예일대학을 나와 한국에 머물며 4.19 등 학생운동을 연구하였는데, 그 후부터 지금까지 미군정보기관의 문관요원으로 일하고 있다. 4.19직후에는 명동의 대포집에서 대학생들과 술을 마시던 그를 본 것도 같다. 그러니까 한국에서의 군정보요원 생활이 40여년쯤이나 된다는 이야기이다. 미국의 힘의 저력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의 전설적인 농구슈퍼스타 박신자(朴信子)씨와 결혼하여 한국사회에도 유명하게 되었다. 덕수궁 옆 성공회 대성당에서 있은 결혼식에 갔더니 오색의 실패 셋트를 선물로 손님에게 주는 것이 좋아보였다. 2001년인가 장군대우로 승진하여 용산관사에서 자축파티를 한다고 초대해 왔는데 어쩌다가 못 가보았다. 합동통신의 간부로 있던 박석기(朴石基)씨는 브레드너씨와 가장 친한 한국사람인데 <문주 40년>이 연재되는 것을 읽고는 “왜 고정훈씨와 술 마시며 반미노래 한 이야기는 안 쓰느냐”고 재촉이다.

사람들 설명이 길어졌다. 여하튼 그런 명사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는데 나는 그때 아마 조선일보 정치부차장이었을 것이다. 혈기방장하고 건방끼도 있을 때였다. 술이 많이 들어간 후 노래순서가 되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미국사람들도 있고 하여 그 당시 학생사회에서 부르던 미국을 한방 먹이는 속된 노래패러디를 불러댔다. “양키 X만 X이냐 코리안 X도 X이다…” 그런 노래가 있었다. 기억할 남성들이 많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세대사이에는 반미풍조가 있는게 아닌가.

그 후 세월이 흘러 와그너 교수나 브레드너씨는 이미 설명한 대로 모두 한국여성과 결혼하였다. 지금 회상하면 나의 경박함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기계에 모래를 뿌린 사람의 심정이다.

고정훈씨는 그 후 사업에 실패하여 요정의 외상값도 왕창 실례했다 한다. 사업보다는 주지육림이랄 사치였으니 어디 돈이 모아졌겠는가. 그 후 줄곳 시골농장에 잠복해 있다가 5.18후에 말하자면 관제 혁신정당으로 국회의원 노릇을 한 번하고 별세하였다. 나는 그에 대한 추모문을 한 잡지에 썼는데 아마 그 글이 그 풍운아에 대한 유일한 헌사가 되지 않았나 한다. 혁신계 안에서는 그가 혹시나 기관의 첩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계속 나돌았는데 그의 말년은 그래도 민주사회주의자로 성실했다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경향의 정치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두산 이동화(斗山 李東華), 경심 송남헌(耕心 宋南憲) 씨들을 떠받들고 최후까지 일관되게 노력하였다. 물론 성취면에서는 별거 없지만 말이다. 나는 혁신계 사람들에게 줄곧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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