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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청와대 초소 몸싸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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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청와대 초소 몸싸움사건

남재희 회고-文酒 40년 <38>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에 따른 잘못에 대하여서도 너그럽다. 술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고 흔히 말하는 그런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서울신문사 편집국장으로 있던 때다. 아마 1974년쯤일 게다. 사회부의 김건(金建)기자가 사고를 쳤다. 청와대 뒷산 밑 경비초소 책임자인 장교와 취중에 몸싸움을 해서 수도경비사 헌병대 영창에 수감되었다는 것이다.

이야기인즉-. 김기자는 붙임성이 있어 평소에 집 근처 경비초소에 먹을 것, 마실 것을 자주 갖다주며 통행금지시간이 지나 귀가하는 것을 눈감아 달랬단다. 사회부 기자니까 업무상도 늦을 수가 있고, 또 술을 좋아하다 보니 통금을 넘길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책임자인 장교가 바뀐 것을 몰랐다. 초소측에서 엄하게 나오니까 술김에 너무 한다고 대들고 약간의 몸싸움에 이른 것 같다.

사장실에서 해당 간부들의 모임이 열렸다. 감사인 김종면(金宗勉)씨는 육군준장 출신인데 불경스럽게도 청와대를 경호하는 군인들과 술마시고 시비를 벌렸으니 박대통령에 대한 도리상 김기자를 해임해야 한다고 강경하였다. 김 감사에 관하여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군에서는 유명한 인물로 본명은 김종평(金宗平)이다. 막강한 육군의 정보국장겸 특무부대장을 지냈고, 그 후에 특무부대장이 된 악명 높은 김창룡(金昌龍) 장군에게 모함을 받아 육군형무소 살이도 한 기구한 운명이 되었다. 박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했을 때 그 기념사진에 10여명의 친구들이 나오는데 거기에 김감사가 나올 정도로 박대통령과도 가까웠다. 그래서인 듯 여러 가지로 박대통령의 배려를 받고 있는 듯 했다.

그런 김감사이니 청와대가 관련된 사건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 전무는 윤일균(尹鎰均)예비역 공군준장인데 윤전무는 김종필씨 밑에서 중앙정보부 차장보를 지낸 정보통으로 예의바르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김감사가 군의 선배이니 윤전무는 의견이 있어도 함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해임은 절대 안 된다고 하였다. 서울신문은 정부기관지로 사장이 수시로 바뀌니 회사에 굳건한 중심이 없어 사풍이 해이해지기 쉬우므로 나는 편집국에서 엄하게 기강을 세워왔었는데 그런 국장이 부하기자 하나도 보호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앞으로 통솔을 할 수 있겠느냐는 논리에서다. 우선 김기자의 석방에 힘쓰고 그의 진술을 들은 다음에 징계문제를 매듭짓자는 주장이다.

윤전무에 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소개해야겠다. 그는 자기의 하루하루의 모든 일을 메모한다, 사람들과 대면하며 이야기하면서도 메모다. 아마 하루에 10페이지는 할 것이다. 그리고 5색 볼펜으로 내용을 구별해 놓는다. 급한 것은 빨간 줄일게다. 그의 몇 개의 캐비닛은 메모를 한 다이어리 노트북으로 꽉 차있다. 한번은 정치모략에 걸려 정보부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단다. 그때 그 메모로 위기를 탈출했다. 소설가 이병주씨는 카프카 소설에 대조되는 이야기를 하나 쓸 수 있겠다고 재미있어했다.

사장인 김종규(金鐘圭)씨는 누구나가 수긍하는 신사이고 모범적인 신문경영인이다. 연대 상과출신으로 한국은행을 거쳐 신문사에 들어와 한국일보 사장도 지냈으며 월남 부대사, 호놀룰루 총영사, 이란 대사 등 외교경력도 쌓았다. 그러니 그 세련도와 국제수준의 양식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별명이 맥아더원수일 정도로 잘 생겼다. 그 김사장은 오랜 시간 난색을 보이며 침묵했다.

꼭 소개해야할 김사장의 일화하나. 나중에 5.18 쿠데타가 있었을 때에 서울신문 주필인 이진희(李振羲)씨는 신군부의 집권당위성을 주장한 논객으로 유명해졌는데 하루는 이 주필이 신군부의 정권장악이 당연하다는 내용의 사설을 써와 김 사장에게 보이더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당시의 삼엄한 분위기에서, 더구나 정부기관지인 처지에서, 김사장은 입장이 난처했을 것이다. 역시 심사숙고하였을 김사장은 “사설은 안되고 내려면 주필 개인의 이름을 넣은 칼럼으로 발표하시오.” 언론계 사람들은 그 조치를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래도 사려 깊은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25년이 더 넘은 그때를 회상해보면 김감사가 그렇게 외고집만은 아니고 많은 고초를 겪은 사람으로 삶의 지혜도 터득하고 있던 분 같다. 김감사는 나에게 수경사로 사과 가잔다. 당시 수경사는 필동 남산 밑에 있었다. 우선 헌병단장 김만기(金滿基)대령부터 찾아 예의를 갖추었다. 참모장은 그 후로 12.12하극상을 용감하게 진압하러 나서서 대단히 유명해진 장태완(張泰玩) 준장인데 그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육사8기인 사령관 진종채(陳鐘採)소장. 김감사가 군의 역시 유명한 대선배이기에 방문은 스무드했다.

나는 거기에 덧붙여 주월사 헌병부장을 지낸 헌병중령출신인 고교동기 허재송(許在松)형을 다리로 하여 김만기 대령을 술자리에 초청하였다. 김대령은 예의 바른 모범적 군인이었다. 나중에 소장으로 예편하여 감사원 사무총장이 되는 등 관운이 따랐다.

이제 김기자 해임 건을 처리할 단계. 김사장은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국장이 감사에게 지는 것이 좋겠다며 결국 결재를 하였다. 나는 그만한 일로 기자를 파면하고서는 도저히 국장일을 할 수 없다면서 사표를 제출하고 짐을 쌌다.

참으로 오랜 격무 끝에 신문사를 떠나니 우선은 홀가분했다. 회사에서 주던 전용차도 없기에 걷는 습관도 기를 겸 신교동 집에서 을지로4가의 국도극장까지 걸어가서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을지로3가 교차로에서 신호가 막혀 서있었더니 짚차가 서며 거기서 김기자가 내려 석방됐다고 인사하는 게 아닌가.

우연이다. 그런데 마음이 언짢은 것은 그 김기자가 “국장이 몸이 달아서 수경사로 통하는 을지로3가에서 기다리고 섰더라”고 소문을 낸 것이 내게까지 전해진 것이다.

집으로 계속 사장이 보낸 사람들이 왔다. 한번쯤은 사장을 만나는 것도 예의일 것 같아 만났더니 3개월만 여유를 주면 김기자를 복직시키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모든 일은 해결이 되었는데 나는 지금 김감사도 이해하고, 김사장의 조치도 그래도 원만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김감사는 청와대나 수경사측이 문제시하기전에 말하자면 선제방어(先制防禦)를 주장한 셈이다. 선제공격이 있다면 선제방어도 성립될 게 아닌가. 서양식이 아닌 한국식의 인사처리방식이라 하겠다.

김감사는 신심이 깊어져 노년에 목사가 되었고, 윤전무는 그 후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이 되었다가 김재규 부장의 궁정동사건 후에 잠시 부장서리를 맡기도 했다. 김사장은 현대그룹의 사장이 되고. 인생의 거친 들판을 살아오며 지혜를 터득한 백전노장들과 함께 한 직장생활이었다. 모두 정답게 회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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