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민주주의 제도는 결국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고착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대의제에 관한 이론이 선행된 것이 아니라 서구에서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던 하나의 정치적 제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정치참여에 의하여 자유, 평등, 정의라는 기본 가치를 실현하고 국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국민의 통치 형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민주주의 정신을 실현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직접 민주주의라 할 것이다. 흔히 대의제를 민주주의와 등치 시키지만, 근본적으로 말하면 대의제는 통치기구의 구성 원리, 또는 국가의 의사 결정 원리로서 민주주의의 하위 체계일 뿐이다. 그것은 권력분립, 선거제도, 정부 형태, 지방자치제도 등과 같은 민주주의의 여러 형식 원리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용어법상 직접 민주주의는 직접 결정방식, 간접 민주주의는 간접 결정방식 또는 대의제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한편 의회민주주의란 의회중심의 통치 질서에서 파악되는 것으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정부 형태와 관련된 개념이며, 이는 대의제의 한 형식에 속한다.
특히 선거로 선출된 의원은 특정 선거구민이 아니라 전체 국민을 대표하고 전체적인 공공복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대의제의 이론은 명령 위임을 부정하고 자유 위임을 주창하고 있는바, 이는 민중 세력을 배제하면서 그와 유리되어 결국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고 할 것이다. 대의제가 지니는 이러한 성격은 프랑스와 영국 대의제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결국 부르주아 세력은 민중세력을 동원하여 군주를 타도한 뒤 자신들의 정파 간의 무력적 권력 투쟁을 선거를 통한 정당 간의 권력 교대 혹은 경쟁이라는 '대의제'의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기제를 창출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의원)는 특정 선거인(유권자)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전체 국민을 위한 전체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국민에 책임을 지는 명령위임을 배제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명령위임을 배제한 바로 그 순간 선출된 대표자는 국민에 봉사하는 위치로부터 국민 위에 군림하는 위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으로 마무리되었고 민중세력은 탄압을 받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의제는 굳건한 통치원리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대의제는 이른바 '대의원리'에 근거하여 대표자만이 정책결정의 권한을 가지고 있게 됨으로써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은 명망가인 대표자에게 독점되었다. 이렇게 하여 바로 명망가 중심의 이른바 '명망가(혹은 명사, 名士) 민주주의'의 통치가 대의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명망가에 독점된 그러한 배타적 결정권은 전체 이익에 기초하여 행사되기보다는 대표자 자신들의 시각에서 그리고 자신들과 관련된 이익에 의하여 행사되기 쉽다. 나아가 이들 대표자는 반드시 뛰어난 자질에 의하여 대표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 그리고 그를 앞세운 배후 세력의 사회경제적인 힘에 의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 대의제가 지니는 이러한 성격은 과연 대의제가 전체 이익, 즉 공공복리를 실현할 수 있으며 대의제하에서 특수 기득권의 부분이익(특수이익)의 지배로부터 과연 공적(公的) 업무의 공공성 보장이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대의제 민주주의는 공공선이나 일반의사의 지배가 아니라 정당 또는 정치인의 '부분의사'가 지배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였다. 다시 말하면, 현대 자유민주주의는 특정집단의 이익과 가치가 특정 정당에 의하여 대표되는, 즉, '부분의사'가 대표되는 민주주의이다. 그리고 이러한 '최소주의적' 대의제 민주주의 개념은 민주주의 가치를 축소했으며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
부르주아의 이익보장체제로서의 정당
정당정치의 고향으로 칭해지는 영국의 정당사를 살펴봐도 17세기 이후 19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정당이 거의 사사로운 '그룹'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최초의 '그룹'인 원정당 라운즈헤즈(Roundheads)와 기사단 캐버리어즈(Cavaliers)는 각기 의회와 왕권을 배경으로 무력 대결을 벌였으며 마침내 청교도혁명에 이어졌다는 점에서 정당이라기보다 정치적 폭력단체라 할 것이다.
이후 의회에서의 대립은 소집파 대 반대파에 이어 휘그 대 토리로 이어졌고, 보수당인 토리당에서 '보수주의적'이라는 용어도 1830년에야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렇게 하여 정당들이 그나마 오늘날과 같은 현대 정당의 모습을 갖춘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토리당은 영국 국교주의와 지주계급을 대표했으며 휘그당은 귀족, 토지 소유 계층, 부유한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정당제도 역시 고스란히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보장하는 체제였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party'라는 영어 단어는 모두 '정당'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당(黨)'이라는 한자어는 예로부터 좋지 않은 의미로 사용됐다. 실제로 <논어>도 "君子, 群而不黨"이라 하였다. 즉, "군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무리를 이뤄 사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자(朱子)는 <사서집주(四書集注)>에서 '당(黨)'에 대하여 "相助匿非曰黨", 즉, "서로 잘못을 감추는 것을 黨이라 한다."라 해석하고 있다. <설문(說文)>에는 "黨, 不鮮也"라고 풀이되어 있다. '당(黨)'이란 '흐릿하여 선명하지 못하다'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듯 '당(黨)'이라는 글자는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함께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불편부당(不偏不黨)'해야 한다."는 하나의 명제에서 이미 '당(黨)'이라는 단어는 '악(惡)'의 범주를 뛰어넘지 못하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당쟁(黨爭)'과 '붕당(朋黨)' 그리고 '작당(作黨)하다'의 '작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당(黨)을 아무리 잘 만들고 그 활동을 잘해본들 모두 '작당', 혹은 '당리당략'이라는 좋지 않은 부정적 이미지의 틀을 결코 넘어설 수 없게 된다.
어느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정당'이 이렇듯 좋지 못한 의미를 담고 있는 '당(黨)'이라는 용어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하여 '당(黨)'의 본래 의미를 너무도 충실하게 '실천'하기 위하여 '모두 모여서 잘못을 감추고',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고', '싸우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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