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배제시킨 프랑스 대의제의 역사
대의제가 지니는 부르주아적 성격은 프랑스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프랑스 혁명 과정의 최초 단계에서 봉건 군주세력과의 투쟁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세력의 형성이 요구되었는데, 이때 출현한 것이 바로 제3신분이라고 불리던 민중세력연합이었다. 그런데 일단 군주 타도에 성공하자 혁명을 자신들의 헤게모니 안에서 재편성하려 했던 부르주아 세력과 철저한 신분 해방을 요구하는 이른바 제4신분이 서로 분열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헌법제정국민회의가 중도좌파인 부르주아 세력에게 완전히 장악된 후 제4신분의 혁명적 요구는 저지당하였고 그들의 행동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갔다. 1789년 10월 21일의 계엄법, 1790년의 파리 자치시 조직법, 1791년 7월 17일의 샹 드 마르스 학살, 1791년 7월 18일의 선동금지법 등의 일련의 입법과 조치들에 의하여 민중의 집화와 행동은 철저하게 저지되었고 민중의 이익은 처참하게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의제는 강력히 주장되었고, 1791년 헌법이 태어났다.
결국 대의제 형성의 역사는 부르주아 세력에게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하는 과정이었으며, 대의제가 지니는 이러한 특성은 프랑스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대의제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표상 그 자체였다. 프랑스에서 대의제가 형성된 사실에 대하여 "민중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우월적 지배를 수립하고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지적한 것은 이러한 프랑스의 대의제 성격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프랑스 대의제의 이러한 성격은 "국민의사는 대표될 수 없다"는 루소의 사상보다 쉬에스(Sieyés)의 대의사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Sieyés의 대의사상은 직접 민주주의적인 여러 제도, 그중에서도 특히 의회해산제도, 의원에 대한 명령적 위임, 국민투표제도, 국민투표 형식을 통한 헌법제정권의 행사 등을 제도적으로 배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주권자인 국민은 대표자의 선출에 있어서만 주권자일 뿐, 구체적인 국가 의사의 결정과정에서는 소외되는 극단적인 대의제도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대의전제주의'는 국민투표적 직접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결국 대의제가 지니는 일종의 '위장(僞裝) 민주주의적' 성격은 그 출생 과정에서 이미 배태되었던 것이었다.
탁월한 법학자 한스 켈젠(Hans Kelsen)도 그의 저서 <민주주의의 본질과 가치>에서 대의제도의 한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민에 의하여 선출되기는 했지만 인민과는 다른 기관인 의회가 국가 의사를 형성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민주주의 사상이 받게 된 적지 않은 침해를 은폐하려는 시도도 존재한다...사람들은 마치 의회주의 안에서도 민주주의적 자유의 이념이 아무런 손상도 받지 않고 나타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하였다...하지만 대표 의제(擬制)는 의회주의로 말미암아 자유의 이념이 받게 되는 현실적 내지 본질적 침해의 은폐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는 반대론자로 하여금 민주주의가 명백한 허위의 기초 위에 존립하고 있다는 논박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즉, 의회에 의하여 형성되는 국가 의사는 전혀 인민의 의사가 아니며 의회주의에서 의회선거 행위를 제외하고 인민의 의사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의회는 이미 인민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다."
평의회(評議會) 민주주의
한편 사회주의 통치구조에서 1871년의 파리 코뮌(Paris Commune)은 그 이념과 실현 형태의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1871년의 파리 코뮌은 최소 행정단위인 community와 그보다 큰 district, town 등에 수립되었다. 코뮌은 보통선거 제도에 의하여 선거구민으로부터 선출된 자치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노동자나 노동자에 의하여 인정받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코뮌은 단순한 의회에 머물지 않고 입법기능과 함께 집행기능도 수행하였다.
코뮌에서는 모든 관리가 민중에 의하여 직접 선출되었으므로 항상 민중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었다.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관리 역시 민중에 의하여 선출되었고, 민중에 의하여 소환되는 지위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코뮌의 관리들은 노동자들의 임금과 같은 보수를 받았다. 하위 행정단위 코뮌은 상위 행정단위 코뮌에 대리인(delegate)을 파견하였고, 이러한 대리인의 파견은 상위 행정단위 코뮌으로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파리의 전국대표회의는 이렇게 파견되어온 대리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한 대리인들은 물론 자신들의 선거구민들에 의하여 지시를 받고 소환되었다. 즉, 명령적 위임관계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조직 형태는 결국 오늘날의 노조 조직과 유사하다.
이러한 코뮌의 구조는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공적 기관을 가지는 점에서 철저한 직접민주주의와 다르지만,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자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그러한 공적 업무 담당자와 국민 사이에 명령적 위임관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대의제와 본질적으로 상이하다.
이러한 파리 코뮌 이념을 계승하는 사회주의 정치체제는 혁명기에 나타난 평의회 형태를 토대로 하여 이른바 평의회 민주주의(Rätedemokratie, 위원회제 민주주의라고도 한다)의 이념을 형성시켰다.
여기에서 평의회 민주주의란 민중들에 의한 직접적인 자기 통치(Selbstherrschaft)를 추구하며, 민중에 의하여 선출된 평의회가 입법권과 행정권을 통합적으로 행사한다. 이러한 평의회는 민중의 위임사항에 엄격하게 기속되므로 다른 관리와 마찬가지로 언제든 민중에 의하여 소환되는 명령적 위임관계를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의회 민주주의는 혁명기의 특수한 시기에만 구현되었을 뿐,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 혁명적 엘리트의 지도와 당 독재의 논리에 의하여 실종되었으며, 국민 소환 역시 마찬가지이다.
* 기고문의 특성상 주석은 생략하였음을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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