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인간배아실험에 관한 이은희씨와 우철웅씨의 논쟁과 관련, 이필렬 교수(방송통신대)가 보내온 글이다. 생태근본주의 입장에 선 이 교수는 정자와 난자가 그 순간부터(즉 수정란) 생명이며 따라서 배아실험은 생명살해행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교수는 우리가 생명유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다른 동ㆍ식물을 먹어 없앤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생명살해행위인 인간배아실험이 허용되려면 그것이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편집자
***인간 생명의 시작은 언제인가?**
수십년 전, 아니 시험관 아기가 탄생하기 직전까지도 사람들은 '인간 생명이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하는 물음은 던지지 않았다. 여성이 임신했으면 한 인간으로서의 아기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성의 생리가 끊어지거나 입덧이 시작되면 날짜를 거꾸로 셈해서 언제 정자와 난자가 만나 뱃속의 아기가 만들어졌는가를 알아냈고, 아기는 그 시점부터 인간 존재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때도 물론 뱃속의 아기를 지우는 일은 종종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의 윤리적 타당성을 심각하게 따지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 일은 아기를 지운다고 표현되었고 조그마한 아기를 없애는 일로 여겨졌다. 단지 너무 작고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심각한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을 뿐, 여성의 뱃속에서 아기가 없어지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자와 난자의 만남을 여성의 몸 밖에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몸 밖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생겨난 이 ‘새로운’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것을 과연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인간 생명은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그리고 그 생명이 언제부터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정자와 난자가 만나 서로 합쳐져서 수정이 이루어진 시점부터인가, 수정된 후 14일이 지난 다음부터인가? 아니면 배아는 물론 태아까지도 인간으로 인정할 수 없고, 수정란이 자라서 아기가 되어 세상에 나와야만 그때부터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인가?
수정란이나 배아를 하나의 인간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 그것을 가지고 실험하고 조작하고 폐기하는 것도 아무런 윤리적 문제가 없는 것인가? 정말 복잡한 논쟁을 낳을 만한 문제들인데, 이러한 문제가 모두 과학기술의 발달로 정자와 난자가 몸 밖에서 만날 수 있게 됨으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다.
수정란이나 배아를 하나의 생명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역설적이게도 소위 생명을 만들고 생명을 구한다는 행위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불임 부부에게 건강한 아기를 갖게 하기 위해 배아 실험을 하고 난치병 환자를 살리는 연구를 위해 배아로부터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행위, 말하자면 배아를 조작하고 파괴하는 행위가 그러한 물음들을 낳게 한 것이다.
배아가 인간 생명인가, 배아에게 인간 존엄성을 인정해야 하는가는 이제 치열한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은 물론 인간의 탄생과 관련하여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 전개됨으로 인한 것인데, 그 전에는 몸 안에서만 존재하던 초기의 인간 생명체를 인간 몸 밖 시험관 속에서 만들어 기계 장치로 조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수정후 14일이 지나야만, 또는 태아의 원형이 생겨나는 8주가 되어야만 생명이 시작된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시험관 수정 등의 인위적인 임신보조 시술이 나오기 전에는 생명의 시작을 아기의 탄생으로 잡든 입덧이 시작된 시점으로 잡든 문제될 것이 조금도 없었다. 수정란이든 수정후 14일이 된 배아든 모두 여성의 배속에 들어 있었고, 따라서 그 여성의 몸 속에서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완전한 생명체 속의 생명으로서 조작이나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것들을 조작하려면 먼저 그것들이 들어있는 여성의 몸을 조작해야 했는데, 이는 한 인간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세계의 어느 문화권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험관 속에서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켜서 배아를 만들고 배아를 냉동시켜 보존하는 기술이 등장함에 따라, 여성의 몸을 떠나서 존재하는 다수의 배아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이들 배아는 조작 메스에 저항할 아무런 힘도 보호막도 가지고 있지 않고, 그 전 같으면 여성이라는 생명체 속의 존재로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던 생명의 지위도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 전에는 한 생명체의 일부로서 자연스럽게 생명으로 인정받던 존재가 실험실의 조작 테이블 위에 내던져지고, 이것을 조작하고 싶어하는 연구자들과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대립하게 됨에 따라 생명의 시작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과학 연구자들은 실험이라는 자연 조작 행위를 통해서 자연 속에 숨어있는 법칙을 발견하거나 자연을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일을 한다. 이들에게 자연은 모두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예외가 되지는 않는다.
특히 실험실 탁자 위에서 용이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쉽게 실험 대상이 된다. 생물학 연구가 커다란 생태계나 동물행동에 관한 것보다는 유전자나 유전체에 집중하는 것은 분자생물학의 발달로 생물체가 화학 반응의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실험실에서 쉽게 다룰 수 있는 작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학 연구자들은 대체로 자신이 하는 실험에 대해서 윤리적인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 실험이 살아 있는 인간을 조작하는 것이 아닌 한 이들은 대부분 모든 것들이 실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실험이 경제적인 효용이나 명성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면 실험 대상에 대한 고려를 보통 때보다 덜 하거나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많은 의학자와 생물학자들이 별다른 윤리적 고민 없이 배아 실험이나 배아 줄기세포 연구에 뛰어드는 데는 이런 경제적 효용관의 연관이란 이유도 한몫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이 윤리적인 고민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다. 그들 자신은 아무리 여성 몸밖의 배아가 그저 세포 덩어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윤리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처지인 것이다.
배아 실험을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실험이 윤리적으로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님을 보이기 위해 여러 가지 과학적 사실을 제시하거나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서 그들은 자신들이 실험실에서 조작하는 배아에 대해 ‘초기배아’(pre-embryo)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초기배아는 영어의 뜻을 살리면 ‘배아 전단계’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따라서 이 말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다루는 것은 생명을 지닌 배아와 달리 생명이 없는 배아 전단계의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인쇄된 마침표의 절반밖에 안된다는가, 몇 개의 세포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존재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배아라는 존재가 아주 미미한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기도 한다. 인간이 지닌 기능의 싹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몇 개의 세포 덩어리라는 표현까지도 심심찮게 사용한다.
수정란이 된 지 14일이 지나야만 소위 원시선(primitive streak)이라는 것이 작게 나타나고 이와 함께 인간 신체의 여러 기능이 분화하기 때문에, 이때는 되어야 배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은 대부분의 배아 연구자들이 즐겨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말이 배아 연구자들이 윤리를 의식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그들이 아무런 윤리적 속박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배아 실험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들이 14일이 지난 배아는 인간으로 온전히 인정하는 것일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수정란과 배아의 인간 생명성에 대한 입장은 그것들을 처음부터 온전한 인간으로 인정하자는 근본적인 입장, 인간 생명성을 일부 지니고 있는 잠재적 생명체로 인정하자는 중간적인 입장, 인간 생명성은 수정후 14일부터만 인정할 수 있다는 대다수 배아 연구자들의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중 첫 번째 입장은 주로 생태적 근본주의자와 로마 가톨릭에서 취하는 것이다. 이들의 근본적인 입장은 뿌리깊은 생명존중 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 또는 철학적인 논리로 특별히 무장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물론 ‘연속성’이라는 논리를 가지고 배아의 인간 생명성을 뒷받침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런 부류는 소수에 불과하다.
반면에 뒤의 두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철학적, 논리적, 과학적 논거를 가지고 자기 입장의 타당성을 논증하려 한다.
‘연속성’ 논리는 유전자의 ‘연속성’(genetical continuity)과 수의 ‘연속성’(numerical continuity) 두가지를 가지고 수정란의 인간 생명성을 주장한다. 유전자 ‘연속성’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핵심 구성물은 유전자인데, 수정란 속의 유전자와 이 수정란이 자라서 세상에 태어난 아기의 유전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둘은 연속적인 것이고 따라서 수정란도 아기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수의 ‘연속성’이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란이 하나 생기면 이 수정란이 그대로 자라서 아기가 되기 때문에 수정란과 아기는 연속적인 하나이고 따라서 수정란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유전자 또는 수의 ‘연속성’ 논리가 꽤 설득력을 지닌 것 같고 근본적인 입장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의 ‘연속성’ 논리는 유전자가 생물체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환원론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또한 한 사람의 유전자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분적으로 변화한다는 반박에 대해 답을 하기가 어렵다. 유전자 이식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유전자가 동물에게 이식되거나 유전자 치료 시술이 행해질 경우에도 동물이든 인간이든 유전자가 바뀌는데, 이때에도 유전자 ‘연속성’은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수의 ‘연속성’ 논리는 하나의 수정란이 일주일 쯤 지난 다음에 둘로 분할되어서 쌍둥이로 태어나는 경우에는 하나가 둘로 되고, 두 개의 수정란이 동시에 생겼다가 하나로 융합하여 키메라가 태어나는 경우에는 둘이 하나가 되기 때문에 이들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키메라 상태로 태어난 사람은 우리가 좀처럼 인식하지 못하지만 상당수의 사람이 자궁 속에서 두 개의 수정란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키메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간적인 입장은 배아를 인간 생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성(potentiallity)을 지닌 것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서 시험관 속의 배아는 온전한 인간은 아니지만, 적당한 보호를 받고 여성의 몸 속으로 들어가면 아기로 자라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 몸밖의 수정란도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이 잠재성 논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잠재성 주장도 과학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공격받을 수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예를들어 시험관 속에서 수정된 후 2-3일이 지나 세포가 8개로 늘어난 배아는 자궁에 넣어졌을 때 아기로 자라날 가능성이 꽤 있지만, 열흘이 지나서 세포가 수백개가 된 배아는 자궁에 착상될 가능성조차 없기 때문에 실제로 아기로 자라날 잠재능력은 전혀 없다.
따라서 잠재성을 기준으로 할 때 시험관 속의 8세포기 배아는 잠재성을 인정받을 수 있지만, 그것보다 더 자란 200세포기 배아는 잠재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정자가 없이 난세포와 체세포만 가지고도 생명체를 만들 수 있는 복제가 성공했기 때문에 수정란뿐만 아니라 보통의 난세포도 인간 생명이 될 잠재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보호받아야 할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으냐는 공격에 대해서도 잠재성 논자들은 적절하게 답할 수 없다.
수정후 14일이 되기 전의 배아는 인간 생명으로 볼 수 없다는 대다수 과학자와 이에 동조하는 윤리학자들은 대체로 그 근거로 14일 후 원시선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든다. 원시선은 척추와 척수로 발달하고 이때부터 다른 세포들도 각 기관으로 발달해간다. 이들이 14일 시점을 중시하는 이유는 이때가 세포 덩어리와 초기 상태의 인간생명을 구분해주는 시점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은 ‘연속성’의 논리에서 볼 때 자의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원시선이 14일 째에 갑자기 무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고 어떤 세포가 원시선으로 변화한 것이 분명한 이상 여기서도 ‘연속성’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14일보다는 7주 정도 지나 태아가 생기는 시점이 인간 생명이 더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적절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태아 형태가 나타나는 시점을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연속성’ 논리에 비추면 자의적이다. 결국은 14일 배아나 태아를 중시하는 것은 결국 연구자들이 별다른 비난이나 규제를 받지 않고 배아 실험을 하려는 희망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그외에도 다른 여러 과학적인 사실을 제시하면서 배아나 수정란 연구가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들은 먼저 여성 몸 속의 수정란 중에서도 살아남아 아기가 되는 것이 얼마 안된다는 주장을 편다. 실제로 수정란의 75%는 아기로 자라나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므로 아기로 탄생하는 수정란은 특별한 알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여성의 몸 속에서 얼마 있으면 대부분 죽어 없어지고 마는 수정란이나 배아를 살아있는 인간과 똑같은 생명체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대다수가 살아남지 못할 운명인 배아를 가지고 실험하는 것이 무슨 큰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이들의 주장이 지닌 문제점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75%라는 확률을 배아 일반에 확대 적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배아의 자연적인 사망과 인위적인 조작에 의한 사망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배아 중에서 75%는 몸 속에서 죽는다. 하지만 나머지 25%는 살아서 아기로 태어난다. 100번의 수태 중에서 25번은 아기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100번의 수태 중에서 어떤 경우에 배아가 죽고 어떤 경우에 아기가 탄생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태로 생긴 100개의 배아를 대할 수 있는 태도는 두가지이다. 이들 배아를 모두 인간이라고 보든지 또는 모두 인간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배아인지는 모르지만 100개의 배아 중에서 아기 25명이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가?
온전한 인간도 모두 살아가면서 죽는다. 어떤 사람은 암이나 폐렴 같은 병으로 죽고 어떤 사람은 심장마비나 고혈압 같은 육체의 결함 때문에 죽는다. 늙거나 사고를 당해서 죽는 사람도 많다. 이러한 죽음은 자연사라고 하는데, 대부분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이런 죽음 말고 다른 사람의 적극적인 간섭에 의해서 죽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자연사가 아니라 살해라고 부른다. 한국의 경우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평균수명 70보다 10년을 더 살고 죽을 때까지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의 75% 정도는 자연사나 살해에 의해서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면 이들도 약 80년이란 시간 안에 75%의 확률로 죽을 것이기 때문에, 9개월 안에 대부분이 죽는 배아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존중받을 인간으로 보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리고 자연사와 살해를 구분하지 않아도 될까?
14일 이전 배아를 인간 생명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성 몸속에서 일어나는 배아의 죽음과 시험관 속에서의 조작에 의한 배아의 죽음을 구분하지 않는다. 만일 이들의 논리를 따른다면 성인의 자연사에 의한 죽음과 살해에 의한 죽음도 구분할 필요가 없는 셈이 된다.
반대로 자연사와 살해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관습을 따르면 배아의 경우에도 자연사와 살해는 구분할 수밖에 없다. 여성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배아의 죽음은 그것이 75%의 확률로 일어나든 95%의 확률로 일어나든 자연사이다. 반면에 시험관에서 인간의 적극적인 간섭의 결과로 발생하는 배아의 죽음은 살해로 보아야 한다.
연구자들이나 상당수의 생명윤리학자들은 배아의 죽음은 세상에 태어난 어느 개인의 죽음과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사람은 감각과 의식과 이성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배아는 고통을 느끼는 신경체계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 신경체계가 없으면 아무런 고통도 느낄 수 없고, 죽음을 의식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배아조작이나 배아실험은 성체 인간의 조작이나 살해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거나 의식을 완전히 잃은 성체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죽음을 의식못하고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살해하는 것도 건강한 인간의 살해와는 다른 것일까? 물론 ‘적극적’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육신과 두뇌를 연결해주는 뇌간의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사람도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죽음도 의식못한다. 신경계만 고려하면 배아나 별로 다를 바 없는 조건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경우 두뇌는 완전히 살아있다. 의식을 가지고 있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만일 배아 연구자나 일부 생명윤리학자가 주장하듯이 14일 이전 배아나 배아 전체가 신경체계가 없기 때문에 조작하고 실험해도 된다면, 뇌간이 정지하여 신경체계가 완전히 마비되어버린 사람도 마음대로 조작하고 살해해도 된다는 이야기가 성립한다. 이러한 태도는 뇌사자를 보는 현대사회의 입장에서 발견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14일 이전 배아가 실험과 조작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뇌사자가 장기적출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뱃 속의 아기를 지울 때 한 생명을 없앤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지워없애는 대상이 아주 작고 우리 눈에 안보이는 여성 몸 속에 들어 있다는 것 때문일 터이다. 즉 없애는 행위가 우리의 감각기관을 별로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은 말할것도 없고 살아있는 동물을 죽이는 것을 볼 때에 종종 전율한다. 우리 감각이 견디기 힘들어할 정도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행위가 보고 듣는 감각기관을 심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축을 죽이는 일이 이루어지는 도살장을 멀리 사람들이 접하기 어려운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태아는 작고 보이지 않는다. 감각에 호소할 수 있는 아무런 요소도 없는 것이다.
배아는 태아의 경우보다 사정이 더 나쁘다. 배아는 먼지 알갱이만큼이나 작고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육안으로는 알아낼 수 없다. 도대체 감각에 호소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배아 실험은 보통 사람들의 윤리적인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다. 감각이 아니라 머리속에서의 사고를 한 번 거쳐서 느끼는 사람들만이 배아 실험에 대해 윤리적인 불만을 갖는 것이다.
태아를 임신중절하는 경우에는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낀다. 그 일은 사람 모습이 꽤 뚜렷한 존재를 없애고, 여성의 몸에 손을 대는 일이다. 반면에 실험 대상인 배아는 육안으로는 잘 안보이고 현미경으로 보더라도 세포 덩어리일 뿐이고, 여성의 몸이 아니라 과학연구자들의 일상적인 실험기구인 시험관 속에 들어 있다. 그것이 아기로 자라날 수 있음에도 그 크기와 존재하는 장소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끌기 어려운 것이다.
작고 몸 안에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감각반응 양태에 비추어볼 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실험이나 조작이 그냥 허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다고 해도, 시험관 속에 있다고 해도 생명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포 덩어리일 뿐이라든가 세포막 몇 개로 둘러싸여 있는 액체일 뿐이라는, 얼핏 보기에는 과학적인 것 같은 관찰을 동원해서 배아를 생명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배아 실험을 관철하기 위한 억지일 수 있다. 차라리 임신중절이 아기를 지우는 것이지만 임신한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심리적 상태를 고려했을 때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낫다.
어느 불교 신자이자 철학자는 배아 실험을 배아가 자기 생명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보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바로 이렇게 배아 실험이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한 후에 그 일의 불가피함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인간생명을 없애기는 하지만 그 일이 인류 전체가 살아나가기 위해서 필수적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매일매일 많은 식물과 동물을 먹어 없애는데, 이는 우리가 살아가려면 불가피한 일이다. 배아라는 생명을 조작하고 없애는 일도 이와 같이 진정으로 필요한 일이라면 인정해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배아 실험이 그렇게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면, 부차적인 효용을 위해서 인간 생명을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배아를 없애는 일은 동족을 없애는 카니발리즘적인 일이 아닌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