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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미국을 따르지는 않겠다"

독일, 대미의존 떨쳐버리고 외교적 홀로서기 시도

9.11테러 이후 미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행태가 심화되면서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 질서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최근까지 미국의 협조자 역할로 만족했던 아시아의 일본과 유럽의 독일이 '외교적 홀로서기'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일본과 독일은 2차대전때 미국과 맞붙어 패배한 이후 미국의 도움으로 공산권의 안보 위협을 막아내는 한편 경제재건에 성공했다. 그런 만큼 이 두 나라는 최근까지 외교문제에 관한 한 미국의 노선을 충실히 따라 왔다. 사실상 미국의 하수인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상황은 바뀌고 있다. 일본은 지난달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 계획을 발표 사흘 전에야 미국에 알렸다. 과거 같으면 미국과의 사전 협의 없이 이같은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언론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번 방북으로 일본이 동북아 지역 외교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지난 91년 걸프전 당시 한 일본 언론인이 '일본은 국제정치계의 자동판매기(vending machine)'라고 개탄했던 것과는 크게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전쟁에 관해서는 아무런 발언권도 행사하지 못한 채 미국의 요구에 따라 무려 1백30억 달러를 내놓았던 것을 비꼬은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변모는 한층 눈부시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다른 어떤 유럽국가들보다 공공연히 미국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대미 관계와 관련, 프랑스와 독일의 역할이 바뀌었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이제까지 대미 비판에 관한 한 최선봉에 서 왔던 프랑스가 이라크 공격에 대해서는 침묵에 가까운 방관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반면 오히려 독일이 비판의 목소리를 한껏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은 유럽 제1의 경제대국인 데다 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을 이끌고 있는 양대 축이라는 점에서 이같은 독일의 외교적 홀로서기가 국제정치 지형에 몰고올 변화는 결코 간단히 보아넘길 수 없다. 과연 독일의 외교적 홀로서기는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

<사진>

9.11 1주년을 맞아 지난 해까지 단합된 목소리를 내던 세계 여론이 붕괴되고 있다. 비동맹국인 러시아 중국 아랍 등 애초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찬성했던 나라들이 이라크 선제공격에 반대하는 것은 물론, 아프간 전쟁 때까지만 해도 적극적인 지원과 동참을 아끼지 않았던 독일과 프랑스 등 전통적인 미국의 동맹국들이 선 무기사찰과 유엔결의 등 외교적 노력의 선행을 강조하며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서방세계의 분열이 하루하루 가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빈 라덴이 꿈꾸었던 것이 미국 일방주의의 후퇴와 미국을 중심으로 단결된 서방세계의 분열이었다면 그는 이미 상당 부분 원하던 것을 쟁취한 형국이 됐다.

"유럽은 경제적으로는 거인, 정치적으로는 난장이, 군사적으로는 벌레에 불과하다"는 한 벨기에 장관의 자조섞인 말처럼 온순했던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일방주의에 반대하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인데 그 중에서도 독일을 이끄는 슈뢰더 총리의 반대가 심상치 않다. '경제적 거인, 정치적 난장이, 군사적 벌레'라는 말은 사실 유럽대륙보다도 2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정립된 독일의 위상을 가장 적합하게 표현한 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슈뢰더 총리 "동맹은 OK, 무조건은 이제 그만"**

오는 22일 총선을 앞두고 "미국에 노(No, Nein)!"를 외치는 정치적 모험을 단행하고 있는 슈뢰더 총리는 최근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지지의사를 재확인했으나 과거처럼 무조건적인 지지는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독일 쥐드도이체차이퉁(SZ)이 7일 '슈뢰더가 부시에게-동맹은 OK, 무조건은 이제 그만'이란 기사를 통해 발췌 보도한 슈뢰더 총리의 '9.11 1주년 기념편지'는 외견상 변함없는 독일의 미국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슈뢰더는 "미국 국민과 함께 수천명의 희생자를 진심으로 애도한다"며 "독일은 처음부터 테러와의 전쟁 동맹에 참여했으며 앞으로도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베-카르스텐 헤예 독일 정부대변인은 "슈뢰더 총리의 편지는 무조건적인 동맹관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헤예 대변인은 당면한 이라크 공격에 대해서는 "이라크는 9.11이 만들어낸 전선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독일은 이라크가 테러리즘을 지원하는 국가라는 확신과 증거가 없다며 이라크 선제공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페터 스트루크 국방장관은 조지 로버트슨 NATO 사무총장과의 회담에서 "이라크가 테러리즘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증거가 제시된다면 이는 전혀 새로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슈뢰더 총리가 부시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같은 독일의 입장은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어떤 나라도 국제적 협조를 얻어내지 못하면서 자국민의 안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유엔의 결의없이 이라크를 선제공격하면 안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슈뢰더는 직접적으로 나라 이름은 거명하지 않았으나 이라크 공격을 암시하며 '매우 위험한 확전요소가 잠재돼있다'고 지적했다.

***영국은 이라크 공격 찬성, 프랑스는 유보적**

반면 미국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미국과 유럽간 중재역할을 자임하는 블레어 영국 총리는 7일 미국 메릴랜드주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별장에서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중이라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며 이라크의 위협에 신속하게 대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영국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지지하고 있다.

한편 유럽의 3강중 하나인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은 같은 날 슈뢰더 총리와 독일 하노버에서 비공식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의 일방적인 이라크 공격 반대와 유엔안보리를 통한 사태해결, 유엔 무기사찰단의 조건없는 이라크 입국' 등에 합의했다. 그동안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를 대변해온 프랑스임을 감안할 때 예상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으나 프랑스는 현재 독일과 영국의 상반된 입장 사이에서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영국과 프랑스의 태도가 예상할 수 있었던 결과라면 독일의 '홀로서기'는 냉전 이래 굳어져왔던 미국 중심의 서방세계 헤게모니를 뿌리채 흔들어놓고 있는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왜 독일은 세계 유일의 최강국인 미국에 대해 '나인(노)'을 외칠까.

***LA타임스 "부시 행정부는 슈뢰더의 주의를 경청하라"**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imes) 6일자 사설의 제목이 바로 '독일이 전쟁반대를 외치는 이유'다. 이 신문은 슈뢰더 총리의 전쟁반대로 백악관이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며 슈뢰더는 독일이 이라크에서의 모험 감행에 이용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문은 '슈뢰더 총리의 이라크 참전반대가 오는 22일 총선을 의식한 캠페인일 수 있으나 사실상 유럽인들 사이에 넓게 퍼져있는 전쟁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슈뢰더의 참전 반대는 미국에 대한 반대나 혐오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말이다.

슈뢰더는 미국이 이라크가 테러리즘을 지원한다는 설득력있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라크 공격은 서방세계와 아랍세계간의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또 이라크 전쟁이 확전으로 치달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원유공급문제 등 경제적 재앙도 고려대상이다.

LAT는 "슈뢰더가 미국과 동맹국들의 목표는 전쟁이 아니라 무기사찰단의 즉각적인 이라크 복귀가 우선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지적했다.

나치 시대가 독일에 남겨준 것은 전쟁의 결과에 대한 깊이 있고 영속적인 심중함이라는 게 LAT의 지적이다. 슈뢰더 총리는 군복무중 숨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냉전기간을 통해 독일이 배운 것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강대국으로서의 국제정치 무대를 피하고 경제성장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신문은 "그러나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미국은 독일이 경제적 거인이면서 정치적으로 난장이인 위상을 버릴 것을 주문해왔다"며, "슈뢰더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하는 유럽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바로 미국이 원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신문은 사설의 결론으로 "부시 행정부는 슈뢰더에게 화를 낼 것이 아니라 (NATO 동맹국들의 분열을 우려하는) 그의 주의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FT "독일의 참전반대로 유럽 정치지형이 바뀌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또한 변화하는 독일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FT는 지난 5일 '슈뢰더의 냉소적인 캠페인'이라는 기사를 통해 "유럽 외교관계에 스펙타클한 역할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전통적으로 미국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유럽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던 프랑스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 그동안 우호적인 미·유럽 우호의 상징이었던 독일이 대미 비판의 선봉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신문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 천명을 불필요한 모험이라고 혹평하고 있는 슈뢰더의 행동에 대해 미국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며 지난 8월 워싱턴이 독일에 특사를 보내 베를린과의 마찰을 조율하려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FT는 하지만 그같은 미국의 불쾌감 표시는 수사적 표현으로 감추어졌을 뿐이라며 독일 정부는 50여년간 유지해온 전통적인 미국과의 신중한 외교관계를 포기하고 대립하는 쪽으로 입장을 강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독일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례가 바로 지난 주 스트루크 독일 국방장관이 밝힌 미국의 이라크 선제 공격시 독일의 쿠웨이트 주둔 화생방 부대 철수 경고라는 것이다.

신문은 현재 독일 여론은 슈뢰더 총리의 이라크 참전 반대 전략에 찬성하고 있다며 슈뢰더는 이를 통해 현재 독일의 당면과제인 심각한 경기침체에 대한 유권자들의 관심을 돌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지난 달 독일 동부지역을 강타한 홍수사태는 슈뢰더가 위기에 대처하는 국가지도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FT는 독일 내에서 야당인 기민기사연합의 볼프강 쇼이블(Schaeuble) 같은 원로정치인들이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슈뢰더의 전략이 장기적으로 독일 국익을 해치는 결과를 나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큰 반향을 얻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차라리 기민기사연합의 총리 후보인 슈토이버의 경우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한다는 반전입장을 강화하고 있다는 게 FT의 지적이다.

문제는 독일 총선에서 슈뢰더가 승리했을 경우다. FT는 현재 베를린에는 분열된 슈뢰더와 부시의 개인관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며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슈뢰더는 전통적인 독일의 우방국인 미국에 등을 돌리든지, 아니면 이라크 참전반대라는 약속을 어겨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슈뢰더가 하게 될 선택은 독일의 외교관계를 중대한 위기에 빠트리든지 아니면 같은 수준으로 슈뢰더 정부에 대한 공공의 신뢰도를 유린하게 되는 중대한 결정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FT는 "그같은 선택은 어떤 총리도 하고 싶지 않은 결정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독일 총선과 슈뢰더의 선택, 21세기 세계 정치 방향의 바로미터"**

오는 22일 치러지는 독일의 총선과 슈뢰더의 선택은 이제 21세기 세계 정치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미국의 대표적 신문인 뉴욕타임스는 지난 5일자에서 미국언론으로는 이례적으로 슈뢰더 총리와의 인터뷰를 1개면에 게재, 이라크 공격에 대한 독일의 입장을 상세히 전했다. '독일' 하면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만 관심을 보여 왔던(독일측 조사에 따르면 어떤 해에는 1년간 홀로코스트 관련기사가 3백건을 넘었다고 한다) 미국언론이 독일 정치인의 발언에 이토록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독일의 '외교적 홀로서기'가 미국의 지도층에게 어느 정도 심각한 현안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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