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원로 언론인 정경희씨에 대해 그의 칼럼이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언론ㆍ시민단체들이 한나라당의 '언론 길들이기'라며 비판하고 있는 가운데 차제에 97년 대선 당시 여당(현 한나라당)의 국세청 자금 동원 문제 등의 시시비비를 법정에서 가려보자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 한나라당이 정경희씨가 칼럼을 통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17일 5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사진은 한나라당이 제기한 소장 원본.>
정경희씨의 변호를 맡을 예정인 언론인권센터의 상임이사 안상운 변호사는 19일 "한나라당이 정경희씨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걱정할 게 없다. (언론인이 쓴 칼럼을 상대로)소송하는 것은 물론 자재하는 게 좋다. 하지만 소송 자체가 공적 포럼(토론광장)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차제에 정씨가 쓴 칼럼내용에 대한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세풍 등 칼럼 문제제기 공론화될수록 한나라당에 불리"**
안 변호사는 "소송을 내는 것 자체에 대한 비판과 결과에 대한 비판은 구분돼야 한다. 정씨가 칼럼에서 지적한 이회창 후보의 귀족 문제나 국세청을 동원한 자금동원 의혹 등은 공론화되면 될수록 한나라당이나 이회창 후보에 유리할 것이 없다. 한나라당이 제기한 소송을 계기로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려보자"고 덧붙였다.
안 변호사는 소송준비상황에 대해 "한나라당이 정경희씨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현재 언론인권센터에서 담당하거나 센터 변호인단이 별도로 처리하려고 준비중"이라며 "이회창 후보가 아닌 한나라당이 원고자격이 있는 지도 의문"이라고 밝혔다.
한편 전국 44개 시민ㆍ언론ㆍ종교 연합단체인 언개연은 18일 '한나라당은 언론 길들이기를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을 내고 "근래 한나라당의 행보는 대단히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며 "방송의 공영성을 강화하는 대신에 MBC와 KBS2TV를 사유화하자는 것이나, MBC 스페셜에 대해 과도하게 문제를 삼더니 급기야 신문의 칼럼에 대해 거액의 소송을 내기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과 전국언론노동조합, 한국기자협회 등도 성명을 통해 한나라당의 언론 길들이기 중단을 촉구했다. 상당수 언론학 교수들과 현직 기자들 또한 정씨의 칼럼은 원내 제1당의 대통령 후보인 공인을 상대로 한 논평인데 이를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언론인 죽이기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앞서 한나라당은 지난 17일 서청원 대표 최고위원 명의로 정경희씨의 칼럼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정씨의 칼럼에 위법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이 주장한 칼럼의 위법성은 ▲귀족이란 말은 이회창 후보를 폄하하기 위한 민주당측의 선전전략에 불과한데 사실을 왜곡, 표현했다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은 국세청을 사유화해 선거자금을 모금한 사실이 없는데 이를 왜곡했다 등이다.
한나라당은 이날 소장에서 원고와 피고의 지위에 대해 "원고는 2002.12.19.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국회 원내 제1당으로서 동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원고는 집단여당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국정을 이끌어 갈 지위에 서게 됨으로써 위 이회창 후보의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의 당선이 원고 정당의 목적에도 일치되는 동시에 원고의 당원만도 전국에 수백만명에 이르는 거대정당이고, 피고 정경희는 전직 언론인 출신으로서 2002.6.3.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쓴 자"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정경희씨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 앞서 한겨레신문 지면을 통해 정씨의 칼럼에 대한 반론을 게재하기도 했다. 즉 한나라당은 지난 6일 한겨레신문에 남경필 대변인 명의로 '정경희 죽비소리 "이회창 후보 왜곡 비난"'이란 반론을 게재하고 "정경희 죽비소리(칼럼)는 칼럼으로서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남 대변인은 이 글에서 정씨의 칼럼은 "첫째 사실관계가 명백히 왜곡됐다. 둘째 사회공익에 부합하는 객관성과 공정성을 갖지 못했다. 셋째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에 대한 일방적이고 의도적인 비난으로 채워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정경희씨는 한나라당 반론에 대한 재반론을 10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하고 "남경필 한나라당 대변인의 반론은 사실관계를 자신의 입장에만 꿰맞춘 것이었다"며 "먼저 밝혀둘 것은 이 칼럼이 민주주의 운명의 기초적 요건인 언론의 공정성을 촉구한 글이었다"고 다시 비판했다.
정씨는 반박문을 통해 칼럼에서 쓴 귀족이란 표현은 언론이 한나라당의 '귀족티 벗기'를 받아 쓴 것임을 지적한 것이며, 국세청 모금에 대한 남 대변인의 반박은 지금까지 한나라당이 공식적으로 내세워 온 입장을 반복한 것으로 동의할 수 없고 이는 사실관계를 정확히 보도하지 않고 있는 언론의 직무유기라고 밝혔다.
다음은 논란의 시발이 된 정경희씨의 칼럼(한겨레 6월 3일)과 한나라당의 반론(한겨레 6월 6일), 그리고 정씨의 재반론(한겨레 6월 10일) 전문.
***'정경희의 죽비소리'대쪽-귀족-언론''**
'백수의 왕'이라는 사자가 크게 소리지르는 것을 불경에서는 '사자후'라고 말한다.
부처는 이르기를 "모든 짐승들이 사자후하는 소리를 들으면 물에 사는 짐승들은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뭍의 짐승들은 굴속에 숨고, 날아다니는 놈들은 떨어지고, 향기 풍기는 큰 코끼리들은 겁에 질려 똥을 싸느니라"고 했다(〈열반경〉 권27·사자후보살품 제11의 1).
부처는 또 "내가 늘 이 대중 속에서 사자후하는 것이니, 너희들도 대중 속에서 사자후할 것이니라"고 일렀다(〈열반경〉 권39·교진여품 제13의 1).
이처럼 '사자후'란 진실과 옳은 것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외치는 것을 뜻한다.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군중을 모
아놓고 외친 것까지 '사자후'라고 하지는 않는다.
대통령선거에 지방자치선거가 겹친 이 나라는 날만 새면 정치인ㆍ정치꾼들이 쏟아내는 연설을 들어야 하는 정치판이 됐다. '미사여구'와 귀청을 때리는 구호의 홍수 속에서 어느 쪽의 무엇이 진짜 사자후인가? 유권자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 판단해야 할 것이다.
5년 전인 1997년 대통령선거 때 언론은 김영삼 대통령이 낙하산에 태워 내려보낸 이회창 후보에게 날이면 날마다 훈장을 갖다 바쳤다. '대쪽'이라는 검증되지 않은 찬사다. 유권자들은 왜 그가 '대쪽'인지 알지 못하는 판에 이회창 후보는 '대쪽'이라는 이미지를 만끽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임명된 대법관이었던 그가 과연 강직한 사법관료였기 때문에 대쪽인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5년이 지난 이제 언론은 이회창 후보에게 대쪽 대신 '귀족'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애초에 '귀족'이라는 말은 이회창 후보를 '국민과 가까운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로 꾸미기 위해 "귀족티를 벗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한나라당이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상놈은 없고, 만인이 양반자손 행세를 하는 중세적 신분의식이 강한 나라가 이 나라다.
'귀족'이라는 말은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또 하나의 검증되지 않은 훈장, 곧 그가 양반의 자손이라는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 이회창 후보 자신도 말했다. "김대중 정권 4년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입만 열만 욕지거리와 악밖에 남지 않는 천민정치"라고. 천민정치를 누가 했다는 건지 이 후보의 말만으로는 알아듣기 어렵다.
그러나 국회를 뛰쳐나가 장외집회를 열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막가파식 욕설을 퍼부어 온 것은 이회창씨의 한나라당이었다. '천민정치'를 해온 집단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한나라당 자신이다. 이회창 후보에게 '귀족'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뜻에서건 부정적인 뜻에서건 어울리지 않는다. 귀족티와 거드름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언론은 검찰이 기소한 액수만 166억7천만원에 이르는, 국세청 모금이 아직도 미결로 남아 있는데, 어떻게 '법과 원칙'을 세우고, '깨끗한 정부'를 만들 수 있는지 물어야 했다. 해산을 불과 며칠 앞둔 며느리가 하와이로 건너가 아이를 낳았는데 "원정 출산이 아니었다"는 변명을 누가 믿겠느냐고 물어야 했다.
국세청을 '사유화'해서 선거자금을 갈퀴질한 반세기 정치사상 초유의 파렴치한 권력형 비리에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언론사 탈세를 '언론자유'의 미명 아래 비호했는데 언제 또다시 국민의 혈세가 도둑맞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느냐고 물어야 했다. 또 그보다 더 '부패한 정치'가 있는지 물어야 했다.
100평짜리 빌라 3개층을 쓰다가 갑자기 점퍼차림으로 시장바닥을 누빈다고 '서민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지 물어야 했다.
과점 신문들이 주도하는 이 나라의 언론은 이런 의문에 눈을 감고 있다. '공명선거'가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정경희(언론인)
***한나라당 반론: ''정경희 죽비소리' "이회창 후보 왜곡 비난"'**
6월3일치 〈한겨레〉 6면에 실린 '대쪽-귀족-언론' 제하의 '정경희 죽비소리'(칼럼)는 칼럼으로서의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정경희씨의 글의 사실왜곡과 편파성을 따져 보자. 첫째, 사실관계가 명백히 왜곡됐다. 둘째, 사회공익에 부합하는 객관성과 공정성을 갖지 못했다. 셋째,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에 대한 일방적이고 의도적인 비난으로 채워져 있다.
정씨는 "'귀족'이라는 말은 이회창 후보를 '국민과 가까운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로 꾸미기 위해 '귀족티를 벗어야 한다'는 맥락에서 한나라당이 만든 것이었다"고 썼으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귀족'이라는 말은 애초 한나라당이 만든 게 아니었다. 이번 대선을 귀족 대 서민 대결 구도로 이끌어온 당사자는 다름아닌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쪽이었다.
정씨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막가파식 욕설을 퍼부어 온 것은 이회창씨와 한나라당이었다"고 했다. 이 또한 명백한 사실왜곡이다. 욕설정치, 험구정치의 원조는 민주당이다. 최근에만 해도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는 지방선거 판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한나라당과 이 후보를 상대로 막가파식 욕설을 해대고 있다.
정씨는 또 "해산을 불과 며칠 앞둔 며느리가 하와이로 건너가 아이를 낳았는데 원정출산이 아니었다는 변명을 누가 믿겠느냐 …"라고 썼다. 이 역시 명백한 사실왜곡이다. 이 후보의 며느리는, 필리핀에서 아시아개발은행 근무를 마치고 하와이 대학 동서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지를 옮긴 남편과 함께 지내다 아이를 낳았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해외근무를 하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원정출산에 해당하는가?
정씨는 나아가 "국세청을 '사유화'해서 선거자금을 갈퀴질한 반세기 정치사상 초유의 파렴치한 권력형 비리에다 … 언론사 탈세를 '언론자유'의 미명 아래 비호했는데 …"라고 썼다. 분명히 밝혀두건대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국세청을 사유화한 적이 없고, 국세청을 통해 선거자금을 갈퀴질한 일도 없다. 국세청 이석희 전 차장이 모금했다는 돈의 액수에 관해선 검찰의 일방적인 주장만 있을 뿐이며, 이 전 차장과 한나라당의 상관관계도 전혀 입증된 것이 없다.
또한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언론사 탈세를 비호한 적이 없다. 이 후보와 한나라당은 언론사도 세무조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다만, 정치적 목적을 위한 세무사찰을 반대했을 뿐이다. 아울러 정씨는 "100평짜리 빌라 3개층을 쓰다가 갑자기 점퍼차림으로 시장바닥을 누빈다고 '서민의 대통령'이 될 수 있는지 물어야 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 후보가 실제 거주용으로 사용한 것은 사돈 소유의 가회동 경남빌라 302호 1개층뿐이었다. 이 후보가 점퍼차림을 하는 것은 서민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순수한 의지의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정씨는 이를 의도적으로 왜곡, 폄훼하고 있다.
남경필 한나라당 대변인
***'남경필 대변인의 반론에 답한다-자기 입장에 사실 꿰맞춘 변명일 뿐'**
필자가 쓴 '대쪽-귀족-언론' 제하의 칼럼(3일치 6면)에 대한 남경필 한나라당 대변인의 반론(6일치 11면)은 사실관계를 자신의 입장에만 꿰맞춘 것이었다.
먼저 밝혀둘 것은 이 칼럼이 민주주의 운영의 기초적 요건인 언론의 공정성을 촉구한 글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필자가 특정 정치권에 속한 정치인인 것처럼 한나라당 대변인과 반박을 주고받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남 대변인은 '귀족'이라는 말은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지적한 점은 언론이 '귀족'이라는 말을 쓰게 된 사실상의 경위가 한나라당의 '귀족티 벗기'를 받아 쓴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막가파식 욕설'은 의회민주주의 원칙을 파기하고 원내 제1당이 장외집회에 나섰던 일련의 사태를 되돌아보면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한국의 주요 수출시장인 미국의 경기하강에 따르는 우리 경제의 하강국면을 장외집회에서 "위기"라고 정치적 매도를 했던 일이다. 물론 이것은 한 가지 예일 뿐이다.
'국세청 모금'에 관한 남 대변인의 반박은 지금까지 한나라당이 공식적으로 내세워 온 입장을 반복한 것이다. 상식과 양식이 동의할 수 없는 이런 입장은 언론의 '직무유기' 때문에 성립돼 왔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회창 후보가 국세청 모금을 "몰랐다"는 것은 적어도 상식의 선에서는 믿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당시 국세청 차장 이석희씨에게 한 기업이 돈을 건넨 뒤에 이회창 후보로부터 "고맙다"는 전화가 왔다고 했다. 방탄국회 끝에 서상목 의원이 자진사퇴한 것도 한나라당이 국세청 모금에 책임이 있음을 자인한 것이다.
"언론사 탈세를 비호한 적이 없다"는 말에 필자는 깜짝 놀랐다. "다만 정치적 목적을 위한 세무사찰을 반대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통상적인 행정을 포함해서 오늘날 정부의 모든 행위는 당연히 "정치적인 것"이다. 민주주의체제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탈세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이지, 탈세를 밝혀 낸 것이 "탄압"은 아니다.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사람이면 이해할 수 없는 논법이다.
정치는 상식과 양식을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이 후보가 "빌라 302호 1개층만 썼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법률기술적인 변명이다. 위층에 딸의 식구가 살았고, 아래층은 접대용으로 썼다면 당연히 "3개층을 썼다"고 시인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회창 후보 며느리의 '원정출산' 시비에 관한 변명도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이 후보의 아들은 하와이대학 동서문제연구소의 무보수 연구원이라고 했다. 며느리는 그동안 서울을 몇차례 오갔고, 무거운 몸으로 출산 3개월 전에 하와이로 다시 갔다고 한다. 적어도 상식적으로는 출산을 위해 하와이에서 서울로 돌아왔어야 할 때였다.
그 이상 이 시비에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다시 한번 언론이 '성역' 없이 공명정대하게 보도·논평하는 자세로 이 나라의 기본적인 질서를 지켜주기를 촉구하고 기대한다.
정경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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