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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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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고전강독 <40>

제5강 주역(周易)-20

***4)화수미제(火水未濟)-2**

상전(象傳)은 다음과 같습니다.

象曰 火在水上 未濟 君子以 愼辨物居方

불이 물 위에 있는 형상이다. 다 타지 못한다. 군자는 이 괘를 보고 사물을 신중하게 분별하고 그 거처할 곳을 정하여야 한다.

이상에서 본 것이 미제 괘(未濟卦)의 괘사(卦辭)와 단전(彖傳), 상전(象傳)입니다.
나는 이 괘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미제 괘가 왜 주역 64괘의 마지막 괘인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처음 주역을 읽었을 때에는 미제 괘가 꼭 나를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요. 마지막 단계에 작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끝이라고 방심하다가 아니면 얼른 마무리하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었지요.

그래서 그 후로는 어떤 일의 마지막 단계가 되면 속도를 늦추고 평소보다 긴장도를 높여서 조심하는 습관을 가지려고 하였지요. 그러나 미완성 괘가 주역의 마지막 괘라는 사실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최후의 괘가 완성 괘(完成卦)가 아니라 미완성 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변화와 모든 운동의 완성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자연과 역사와 삶의 궁극적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러한 완성태(完成態)가 과연 존재하는가를 반성하는 괘로 읽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태백산 줄기를 타고 내린 물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되어 만나서 다시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漢江)은 무엇을 완성하기 위하여 서해로 흘러드는지...그리고 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무엇을 완성하려고 바람서리 견디며 서 있는지...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둘째 미제 괘는 모든 효가 실위(失位)하고 있지만 응(應)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응(應)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상태 즉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가능성은 어느 개인의 결심이나 그 개인의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는 것이지요.

셋째 실패로 끝나는 미완성과 실패가 없는 완성 중에서 어느 것이 사물과 변화의 보편적 상황인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反省)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완성이 사물과 변화의 보편적 상황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過程)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입니다. 완성이나 달성(達成)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완성(完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목표(目標)’의 개념은 없습니다. 목표가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입니다. 목표와 수단이라는 관념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목표가 선량(善良)하면 수단이 불량(不良)하여도 상관없다는 논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하물며 ‘하면 된다’라든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과 강제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만연한 ‘속도(速度)’의 개념을 반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속도와 효율성 이것은 자연의 논리가 아닙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도로(道路)의 속성을 반성하고 ‘길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는 고속(高速)일수록 좋습니다. 오로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도로의 개념입니다. 짧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제로(0)가 되면 자기목적성에 최적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순입니다. ‘길’은 도로와 다릅니다. 길은 길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길은 코스모스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동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일 터이기도 하고, 자기발견의 계기이기도 하고, 자기를 남기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역의 사상을 이러한 마음으로 재조명하는 것이 주역을 새롭게 읽는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내가 붓글씨로 즐겨 쓰는 구절을 소개하지요.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목표에 이르는 과정(過程)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른 때를 일컬어 진선진미(盡善盡美)라 합니다.”

진선진미란 구절은 논어에 나옵니다만 이곳에 쓰여진 의미와는 다릅니다. 나는 목표와 과정은 서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선(盡善)하지 않으면 진미(盡美)할 수 없고 진미하지 않고 진선할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수단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목적은 높은 단계의 수단이며 수단은 낮은 단계의 목적입니다.

화수미제 괘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내었습니다. 주역 강의가 아니더라고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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