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 없이 좋은 드라마가 많았습니다. 현직에서 열심히 드라마 세트와 싸우고 있는 우리의 모 피디는 '좋은 드라마'를 소재로 수다를 풀기 위해 '모 작가'를 끌어들이셨네요. 우리의 모 피디가 꼽은 올해의 좋은 드라마는 JTBC의 <아내의 자격>입니다. 흠, 이거, 종편의 존재에 대한 찬반을 떠나, 종편이 보여준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얼마든지 소개할 수 있겠죠. 모 작가는 SBS의 <추적자>를 꼽았습니다. 모 피디와 모 작가는 두 드라마가 우리에게 '성찰 없는 오늘의 한국'을 곱씹게 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수다를 들어보죠. 잠깐! 수다는 다음에도 이어질 예정입니다. 다음 작품은? 수다의 말미를 보면 알 것 같네요. 편집자. |
성찰하는 드라마 <아내의 자격>
모 피디: 아무리 생각해도 2012년은 드라마를 하기에 적절한 해는 아니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총선과 올림픽, 대선이 있는 해잖아요. 사람들이 굳이 드라마까지 볼 이유가 있을까, 이렇게 현실에서 긴장감 넘치는 이벤트들이 많은데?' 싶은 거죠.
모 작가: 물론 선거와 올림픽은 큰 이슈긴 하지만, 2012년은 종편 드라마가 시작하고 케이블 드라마의 공세가 거세진 해이기도 하죠. 당장 우리만 봐도 <응답하라 1997>을 즐겨보고 있잖아요?
모 피디: 하긴 그렇군요. 그러니 지금의 대화가 마련된 거겠죠. 그럼 우리 올 해 본 드라마 중 피디와 작가 입장에서 가장 설레게 봤던 작품 하나씩을 꼽아 볼까요?
모 작가: 저는 <추적자>(2012. 5.28.~7.17. 박경수 극본, 조남국 연출, SBS)를 선택할게요. 이야기의 힘이 남다른, 새로운 작품이었어요.
모 피디: 저는 <아내의 자격>(2012. 2. 19.~4.19, 정성주 극본, 안판석 연출, JTBC)이 좋았습니다. 포털에서 검색하면 이 드라마의 줄거리를 '강남의 사교육 열풍 속에서 자녀 교육에 몰두하던 평범한 주부가 우연히 만난 치과의사와 격정적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린 정통 멜로 드라마'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자격>은 이 간단한 시놉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어요. 드라마의 핵심은 멜로라기 보다는 성찰입니다. 한국에서 사람들이 욕망하는 좋은 학교, 좋은 직업, 그리고 이른바 '갑'이라는 사회적 위치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성찰하고 있어요. 그 와중에 성찰의 도구로 멜로가 존재하고요. 이 작품은 연출이 특별합니다. 컷의 나눔을 최소화하면서 차분하게 인물들의 현실을 목격하게 하고, 판단하게 해요. 한국 드라마 특유의 감정 과잉이 없지요. 무엇보다, 그렇게 목격한 인물들의 현실이 정말 웃깁니다.
모 작가: <아내의 자격>은 이야기적으로도 좀 남달랐어요. 주인공 서래(김희애 분)의 꿈은 일단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는 것에서 시작했는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계속 바뀐달까. 서래가 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이혼 당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 애를 쓸 때 우린 서래를 계속 응원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서래가 이혼을 결심하게 될 때 보는 사람도 같이 깨닫잖아요. 아, 서래의 꿈을 응원하려면, 이혼을 시켜야 겠구나. (웃음) 그리고 멋진 대사.
"당신 같은 남자에게 좋은 아내가 되겠다고 생각한 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야!"
모 피디: 보통의 드라마라면 인물들은 일정한 성격을 지니고 이야기 전체를 겪어낸 다음, 결말에 이르러서야 '그리하여 이렇게 성장하였더라' 라면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아내의 자격>에서 서래는 지속적으로 성찰하고 성장하면서 그에 따라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과 갈등의 국면이 계속 바뀌어요. 시청자는 이야기의 흐름에 대해 기대했던 바를 계속 살짝살짝 배반당하면서 더욱 깊게 몰입하게 됩니다.
결국 이 작품은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삶이라는 자신의 꿈을 성찰할 줄 알고 성장하는 주인공에 대하여 '이겨먹으려고만 드는' 성찰 없는 세상이 공격해대는 이야기 입니다.
모 작가: 그러니까 '성찰하는 주인공 대 성찰 없는 세상'에 대한 드라마라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서래의 남편 한상진(장현성 분)이야 말로 그 성찰 없는 세상의 대표 격이네요. '나는 내 아들이 갑이었으면 좋겠어'라고 아내에게 일갈하는 남자.
모 피디: 역시 작가시라 대사 위주로 기억하시는군요. (웃음) 사실 남편 한상진의 주변은 모두 한국사회에서 세속적 꿈을 이루는데 성공한 사람들이에요. 변호사, 공무원, 방송기자, 의사, 강남의 최고 사교육 시설에 자녀를 입학시키는데 성공한 사모님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세속적인 힘 또한 막강해요. 그 힘은 주인공과 그 주변을 초토화시킬만 합니다. 하지만 과연 무엇을 위한 꿈과 힘이었을까요. '내가 쟤보다 좀 낫다'는 위안?
모 작가: 지금 말씀을 피디와 작가의 관계에 대입해봐도 될까요?
모 피디: 우리 서로 이러지 맙시다. 작가님도 자기 성찰.
▲'JTBC를 살렸다'는 평가까지 들은 <아내의 자격>. ⓒJTBC |
<추적자>, 한국 정치의 적나라한 모습
모 작가: 여기서 성찰이라는 건 꿈에 대한 성찰이라고 보면 될 것 같네요. 자신의 꿈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성찰하는 서래와, 그것을 성찰할 줄 모르는 다른 사람들. 서래는 힘 없이 공격당하고 부서져도 '무엇을 위한 좋은 엄마, 좋은 아내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기 때문에 삶의 다음 국면으로 넘어갈 수 있고,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죠. 반면 이 드라마에서 다른 사람들은 서래가 성찰하는 것 자체를 재수없어 해요. 그리고 서래를 짓밟다가 성찰 없는 꿈이 지은 감옥에 스스로 갇혀요.
제가 <추적자>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이유도 사실 비슷했어요. <추적자>의 대통령 후보 강동윤(김상중 분)은 '성찰 없는 꿈'의 극단을 이룬 사람이에요. 그에겐 '무엇을 위한 대통령'인가가 없어요. 굳이 꼽자면 '다음에 대기업 총수라는 종신직을 얻기 위한 대통령'이겠죠. 그리고 '가난한 이발사의 아들이 대통령까지 되었다는 신화 창조를 위한 대통령'이거나….
모 피디: 그 말씀을 들으니 2007년 어떤 대통령 후보의 홍보 팸플릿이 생각납니다. 12월 19일에 태어났고 12월 19일에 결혼 했으니, 12월 19일 선거일에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달라.
모 작가: 그런 팸플릿이 있었어요?
모 피디: 네. 깜짝 놀랐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라고 생각했죠. 이건 마치 무슨 영웅신화를 완성해 달라는 호소같잖아요. 거기엔 '무엇을 위한 대통령'인가가 빠져있어요. '신화 완성'을 위한 대통령만 있었죠.
모 작가: 나쁜 전략같지는 않네요. 사람들이 '이야기가 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대중은 드라마틱한 영웅을 원하죠. 하지만 우리의 경우, 지난 대선에서 대중이 '드라마틱한 영웅'을 뽑기 위해 선거를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부자 만들어 줄 것 같은 사람'을 뽑고 싶어했죠.
모 피디: 그렇지만 지금도 어떤 식으로건 사람들은 더 극적인 사람을 영웅의 자리에 올려놓길 즐기지요. 박근혜건 문재인이건 안철수건, 그들 모두 '이야기가 되는' 극적 인물들이니까요. 그리고 대중은 입맛 따라 그 영웅의 뒤에 줄서기를 원하고요.
모 작가: 하지만 그 인물의 가치관이야 말로 정말로 중요한 점이잖아요. <추적자>에서 강동윤이 자신이 죽인 여고생의 아버지, 백홍석(손현주 분)에게 내뱉은 말은 그래서 무서워요. '누군가 꿈을 이루면, 누군가는 꿈을 잃는 법이지.'
세상의 파이는 정해져 있고 꿈을 이루는 일은 그 세상에 들어선 사람들의 제로섬 게임이라는 세계관. 대통령이라는 '무엇을 위한'이 빠진 단순한 목표가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죠.
▲현실 정치판을 보는듯한 절묘한 은유로 올해 최고 화제작으로 떠오른 <추적자>. ⓒSBS |
'한국 드라마'의 창살을 벗어나다
모 피디: <아내의 자격>과 마찬가지로 <추적자> 역시 이야기를 소진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하는 타입의 스토리텔링입니다. 보통의 한국 드라마는 짧은 기간 긴 이야기를 채우기 위해 사건의 수를 회차에 맞춰 늘어놓은 다음에 그에 따른 감상적 씬들로 부족한 시간을 메우는 편법을 쓰곤 하는데, 이 두 드라마는 중반 이후까지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로 이야기에 속도를 붙입니다. 굉장히 공격적인 화법이에요. 국면 전환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거지요.
모 작가: 꿈을 이루는 일의 지난함과 이 두 드라마의 화법은 비슷한 것 같아요. 우리가 꿈을 가질 때, 목표를 가질 때 그 꿈을 향해 가는 동안의 여정을 미리 예측할 수 있을까요? 강동윤처럼 대통령이 되겠다는 동기를 아주 어렸을 때 가질 수 있죠. 가난과 멸시가 지겨워서, 제일 높은 자리까지 가고 싶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꿈을 향해 가는 동안 겪게 되는 일들이 있잖아요. 대통령이라는 게 어떤 자리인지, 무엇을 요구받는 자리인지,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까지 치러야할 대가가 과연 자신이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인지. 그는 초지일관 어린 시절 꿈을 가졌던 시점의 가치관에 갇혀있어요. 약육강식. 그는 대통령이라는 자리의 의무를 언론 앞에서의 쇼로만 배우고, 도덕성을 내버리고, 대중을 속여가며 목표에만 몰입해요.
꿈을 이루는 일이란 계속 꿈을 향한 동기가 수정되고 꿈의 디테일이 바뀌어가는 과정인데, 그는 그냥 어릴 적 꿈을 박제처럼 보존하고 있어요.
모 피디: 꿈을 보존하는 일은 역설적으로 꿈을 수정해가는 과정에서 진실로 가능해진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이 두 드라마의 화법이 어떻게 비슷하다는 말씀이지요?
모 작가: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자'는 초심을 지키는 일은 소중해요. 하지만 그 초심을 지키고자 갈등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인물이 성장하는 걸 틀어막고 도식적인 이야기 흐름에 집어 넣을 때가 있잖아요.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야 하니까 인물들이 여기까지만 반응해줘야 해, 뭐 이런.
하지만 이 두 드라마는 인물의 욕망을 최대한 풀어놓고 그 가운데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계속 풀어가요.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놓치지 않으니, 계속 심화학습하는 느낌이랄까요? 보면서 같이 어른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죠.
모 피디: 최초의 시놉과 구성에 얽매인 나머지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욕망의 흐름에 반하는 갈등을 쓰기보다는, 그 흐름을 적극적으로 타야 이야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선명해진다?
모 작가: 아… 제가 한 말이 비수가 되어 제게 돌아오는 기분이네요.
<1997> 소환하는 건 성찰하지 않는 '짐승의 시대'
모 피디: 저라고 다르겠습니까. 두 작품은 적극적인 화법 외에도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두 작품 모두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강하게 담고 있습니다. <아내의 자격>은 왜곡된 교육열과 은연 중에 통용되는 사회적·지역적 계급에 대하여, <추적자>는 경제 권력과 정치 권력이 다른 모든 가치에 맹목적으로 우선되는 상황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지요.
그러면서 가장 보편적인 감성인 남녀 간의 멜로와 부성애를 이야기의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어디에서나 잘만 만들면 만들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곳이기 때문에 만들 수 있고 바로 이곳이기 때문에 더욱 공감가고 의미가 있는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지요.
모 작가: 그런 드라마들이 다루고자 한 이야기가 '성찰의 가치'라면, 어쩌면 지금 한국 사회의 대표적 시대정신은 '성찰 없음'인지도 모르겠네요.
모 피디: 저는 항상 90년대에 대한 향수가 너무 일찍 도착한 것이 이상했습니다. 추억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니까요. <건축학개론>이든 <응답하라 1997>이든, 각종 리메이크 가요 붐이든, 90년대를 복고화하는 의도가 의심쩍었어요.
90년대가 이처럼 빨리 그리워진 이유는 현재가 너무 빨리 질리기 때문이 아닐까요? 존중할만한 새로운 가치가 느껴진다면 과거가 그렇게 큰 비중으로 그립진 않을겁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집중하는 가치는 좀 지겨운 것들이에요. 그래서 몇 등인가, 그래서 '갑'인가,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는가. 물론 이들은 태곳적부터 중요한 가치였을 것이고, 앞으로도 중요한 가치일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앞으로 흐르면서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하여 이 삶을 사는지 조금씩 새롭고 다양한 가치를 발굴해나가는 맛에 살지 않나요? 그나마 발견한 가치들을 묻어버리고 단순하고 원시적인 짐승의 가치를 따르는 방향으로 사회가 간다면, 당연히 그 이전의 세상이 그립기 마련이죠.
더군다나 그 시절이 한국 대중문화가 서양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치고 주체적으로 서기 시작한 첫 세대를 낳은 90년대라면, 자연히 지금 추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겠죠.
모 작가: 짐승의 가치라. 다시 한 번 <추적자>의 대사가 떠오르네요. 이건 어른들의 싸움이니 애들은 끼지 말라던 강동윤의 말에 풀이 죽은 취재기자 지원(고준희 분)에게 최정우 검사(류승수 분)이 격려하며 하는 말.
'그건 어른의 싸움이 아니야. 그건 짐승의 싸움일 뿐이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게, 진짜 어른의 싸움이야.'
모 피디: 이제 오늘 밤이면 <응답하라 1997>의 마지막회가 방송되는군요. 그럼 마지막회를 보고나서 이야기를 이어가볼까요?
모 작가: 저를 언제까지 쓰실 작정이세요?
모 피디: 글쎄요,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계속?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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