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3김 시대'라고 이름 붙인 김영삼(YS), 김대중(DJ), 김종필(JP) 시대는 복합적 성격을 가진 명사정치의 시대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불행하게도 출신지역 문제였다. 영남, 호남, 충청. 거기에 정통 야당세력의 보수파와 개혁파, 5·16 세력의 후계자라는 정치색이 덧붙여진다.
YS는 영남이라는 타고난 다수파세력이고, DJ는 호남이라는 어쩔 수 없는 소수파 세력이다. 영남이 보수적인 데 비해 호남은 얼마간 개혁적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영남은 대지주가 적었고 자영농이 다수를 이루었기에 자영농 나름으로의 독립심과 보수성이 있다. 호남은 대지주가 많았고 그것은 소작인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한 빈부의 격차에서 반항심도 생기고 개혁적인 정치 분위기가 되었다는 얘기다.
DJ는 YS에 비해 소수파가 바탕이기에 YS가 원내총무를 여러 번 했음에도 불구하고 DJ는 이상할 정도로 한 번도 못했다. 1970년에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은 것이 그의 정치행로의 분수령이다. 당수이자 실력자인 유진산이 YS로 낙점했음에도 그는 밤늦도록 대의원들 숙소인 여관을 순방하는 부지런함, 그리고 그의 능변으로 대세를 뒤집은 것이다. 그때 YS는 어처구니없게도 수락연설문을 손질하고 그 연설연습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소수파의 숙명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줄기찬 노력을 해왔다. 특히 평화민주당(평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된 후 DJ는 신민주연합당(신민당), 민주당,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등 당명을 계속 바꾸어가면서 그때마다 재야세력 등 새 정치세력을 흡수, 합당하는 다수파 공작을 끊임없이 해왔다. 마지막의 다수파공작이 이질적인 JP와의 공조로 이룩된 DJP연합이며 그 결과로 집권할 수 있었다.
호남이라는 굳건한 핵심 지지 세력이 있기에 다수파 공작도 가능했다. 지방색 문제 발생에 대해서는 당시의 공화당 세력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 판단이다. 그러나 DJ는 피동적으로나마 그 지방색으로 인하여 기지를 공고화한 덕을 본 것은 틀림없다.
▲ 1971년 대선 당시 장춘단공원에서 유세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
DJ는 우리나라 정객 중 대중동원의 정치방식에 가장 뛰어났다. YS 등 다른 정치인들은 오히려 정치인 중심의 응접실 정치에 치중했다 할 것이다. 거기에는 그의 뛰어난 웅변, 선동성을 담뿍 담은 말솜씨가 있다. 지략도 있고 의지도 강했다. 가톨릭 세력의 힘을 입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이나 재벌 등에 대해 혹시나 비위를 건드릴까 조심, 또 조심했다.
DJ가 두각을 나타내자 우파세력은 끊임없이 사상공세를 해왔다. 그가 좌익 또는 용공분자라는 마녀사냥식 선전이다. 그는 젊었을 때 건준(建準)에도 참여하고 백남운(白南雲)의 신민당에도 가입했단다. 그러나 공산당에 입당한 적은 없다. 해방 직후의 정치상황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절충하는 중간파 사상이 압도적이었다. 그때의 정치성향 통계도 남아있다. 임시정부의 노선도 사회주의적 요소를 많이 흡수한 것이었다. 여운형·김규식 등의 중간파 노선이 많은 지지를 모았다. 오죽하면 미군정도 한때 그들 중간파를 주축으로 나라를 세우려하기까지 했었겠는가. 그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DJ가 건준 등에 참여한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또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오히려 그러한 정치이력은 서민대중을 위한 정치철학을 평생 견지해온 그의 정치사상을 분명히 해준다. 호남의 개혁적 정치정서와도 들어맞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초기에 노동문제연구소에서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그의 이름이 대중(大中)이기에 대중(大衆)과 음이 같아서일까(농담만은 아니고 그는 '대중경제'란 말을 좋아했다). 계속 밑에 깔려 있는 대중, 민중(영어로 underdog)의 챔피언 노릇을 해왔다.
그는 장면 총리의 제2공화국 시대에 집권 민주당의 대변인이었는데 원내가 아닌 원외가 집권당의 대변인인 것은 파격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그는 똑똑했던 것이다. DJ의 두뇌가 컴퓨터 같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 신문기자 때인 1961년 그가 대변인일 때 촌지를 사양한 일이 있다. 아마 100명이 넘는 출입기자를 상대했을 것인데 30여 년이 지난 후인 1990년대 초에 그는 그 일을 정확히 기억하고 말하는 게 아닌가. 놀랐다.
그렇게 재주가 있고 능변이기에 반대파 측에서는 거짓말을 일삼는다는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아마 반대파, 그 가운데도 정보기관들의 흑색선전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말을 너무 잘하기에 혹 그것이 궤변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DJ의 대정부 비난에 이런 게 있다. 자서전에도 비슷하게 나와 있다. "고속도로가 엄청난 부실공사이기에, 고속도로가 누워있기에 망정이지 서 있었더라면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졌을 것이다." 정론인가, 궤변인가. 헛갈린다.
개인적인 일화를 보탠다면 나는 1960년대 말에 그와 긴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을 때 "서독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훌륭한데 한국의 빌리 브란트가 되십시오"라고 훈수를 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슬아슬한 접전을 펼친 후 그에게는 수난의 기간이 계속된다. 그는 수난의 상징으로, 민주투사로, 민주주의의 영웅으로 점차 격상되었다. 권력의 탄압도 계속 강화되었다. '정보정치'라고 하는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한 권력기관의 탄압은 악랄하고도 가혹한 것이었다.
그러한 탄압에 저항하자니 그의 정치행태도 같은 강도로 방어적으로 강화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선 조직이 단핵(單核) 중심의 집중적이고 권위적으로 된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흔히 그를 독선적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위임을 거의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직접 챙겼다. 밑의 사람들에게는 복종만을 요구했다. 형식상 권한대행(權限代行)이라는 것을 두었으나 그것은 허명(虛名)이었다. DJ가 외국에 나갈 때 어느 권한대행이 "권한은 가고 대행만 남았다"고 농담을 하여 언론에 기사화된 일도 있었다.
돈 관리를 매우 철저히 하여 돈 욕심이 너무 많다, 엄청난 축재를 했다는 등 많은 비난이 진부를 알 수 없이 뒤따랐다. 그러나 한번 생각을 바꿔보자. 정보정치의 무자비한 탄압, 와해공작, 감시, 이간질, 돈줄 조이기 등에서 그가 거기에 대항하여 그렇게 철저히 대비하지 않았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항간에는 숨긴 재산 운운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계속 보내고 있다. 역대 대통령의 행태를 보아서 엉뚱한 얘기라고 정면으로 부인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DJ의 대통령 재임 5년간에 관한 잘잘못의 대조표는 많이 나와 있다. 이미 평가는 거의 끝났다. 몇 마디로 말해, DJ는 남북문제에 돌파구를 열었다. 국가정체성의 훼손을 말하기도 하지만 분단국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그런 논란은 불가피하다. 흔히 말하는 퍼주기 운운도 동서독의 경우에 비추어 보아도 부자 형이 가난한 아우 돕는 일 같은 게 아닌가. 다만 정상회담을 위해 큰돈을 대가로 지불한 문제는 논란거리다.
IMF 사태를 맞아 너무 많이 양보하여 국부가 유출되었다는 등 비난이 있다. 그러나 그때 는 정말 다급했던 상황에서 빚어진 일이다. 그 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중산층이 줄어들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며 빈부격차가 심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서민대중을 위해 계속 노력하였다. 미흡하나마 '생산적 복지'라는 개념에 따라 기초생활보장 등에 진일보하였다. 요즘 논의되는 복지론에서라면 그는 당연히 유럽 모델, 보편적 복지 쪽이라 본다.
민주주의·인권의 더 한층의 신장은 두말할 것 없다. 그는 '민중, 민족, 민주'란 말을 썼는데 그 말 그대로 그는 민중의 시대를 강조했다는 특색이 있다. 대중적 정치, 정치의 밭을 심경(深耕)하려는 노력이다.
DJ는 집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사생활도 거의 희생한 것 같다. 그는 집권을 위해 모든 것을 '수단화'했다고도 하겠다. 마키아벨리를 흔히 현대정치학의 시조라고 말한다.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思考)다. 도덕적 관점을 중심으로 보면 DJ는 비난받을 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987년 민의를 어기고 평민당으로 분당하여 나와 대통령에 출마, 민주정권 창출에 실패한 일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 후의 정치 전개와 관련하여 엉뚱한 생각도 든다. YS에 이어 DJ가 집권한 것이 '역사의 지혜'같기만 하다는 것이다. 흔히 YS에 의한 하나회 척결 등 군·관계 정지작업이 DJ의 집권에 선행한 것이 잘된 일이라 말한다. 6·25를 치렀고 군이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우리나라의 경우 군에 의한 정치, 군(senior)과 민(junior) 연합에 의한 정치, 민(senior)과 군(junior) 연합에 의한 정치, 그리고 민에 의한 정치라는 과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은 여하간 그런 순서의 과정을 밟았다.
▲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 ⓒ김대중도서관 |
DJ가 남긴 명구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서생(書生)적 문제의식과 상인(商人)적 현실감각을 가져야 한다."
마키아벨리의 많은 명구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게 있다.
"사자와 여우를 닮아야 한다. 사자는 스스로를 함정에서 보호할 수 없으며, 여우는 스스로를 늑대에서 보호할 수 없다."
DJ의 명구가 현대감각이 있어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이 늘 음미하며 볼 만하다 하겠다. "국민의 손을 잡고 반걸음만 앞서 나가십시오"란 말과 함께.
기예 등에 뛰어나면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 뜻에서라면 DJ는 정치에 있어서 입신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의 자서전을 읽다보면 새삼 감탄, 감탄하게 된다. 우리 시대가 가진 위인(偉人)이다. 그러나 한편 무언가 겉도는 듯한 느낌도 든다. 하느님을 지나치게 너무 자주 내세워서일까, 인간을 느끼기가 어렵고 저항감이 느껴지기도 하여 언뜻 위선적이란 느낌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지나친 얘기일까.
조세형 권한대행이 남긴 한 글이 떠오른다. DJ 측근들이 한번은 기습적으로 그를 기생이 있는 요정에 모셨다는 것이다. 인생의 '잔재미'를 모르고 살아온 DJ는 대단히 당황했고 계속 어색해 하더라는 것이다. 오랜 감옥생활 등 지나친 수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가. 항상 계속하여 민주투사임을 '연(然, pretend)'하다 보니 아예 그렇게 굳어져버린 것인가.
DJ의 대통령으로서의 정치치적을 내다볼 수 있는 한에 있어서의 당분간 한국 상황에서는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개혁(진보란 표현을 써도 무방하겠다)의 상한선(上限線)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노무현 대통령도 있으나 그의 통치는 개혁에는 좀 더 나갔으니 불안정성의 통치였다.
남북분단과 그에 따른 보수 우파의 강세, 미국의 존재와 좌파의 한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재벌(대기업), 우파 거대언론 등과의 공존의 불가피성, 정부나 공공조직을 능가하는 많은 민간부문의 거대화(거기에 대비해서의 정치조직의 왜소화) 등을 고려에 넣고 볼 때, 'DJ의 상한선'이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동안 이승만, 박정희…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경험했는데 정당(의회) 정치인으로서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다수파에 기반하여 보수적으로 안정적 정치를 했다.
정당정치인은 아니지만 건국의 대통령인 이승만, 경제개발의 대통령인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
시대에는 여러 가닥의 흐름이나 노선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가닥이 나름대로의 존재이유, 장점과 단점 또는 정당성과 결함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다면성(多面性)이라 할까 상대성(相對性)이라 할까. 따라서 역대 대통령을 평가함에 있어서 단안(單眼)이 아닌 복안(複眼, 일본인들이 잘 쓰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는 얘기다.
여기서 누구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과오와 함께 기여한 역할도 있다는 관정에서 얘기해본다면, DJ처럼 이승만을 비판한 할 것이 아니고 건국의 공로는 결과론적으로라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도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측면에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지만 압축성장이란 경제건설의 공로는 인정해야 할 줄 안다. 양가적(兩價的)인 판단을 한다고 바로 양시론(兩是論)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종합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볼 때 DJ는 여하간 개혁·진보 쪽의 위인임이 틀림없다. 보수·진보를 통틀어서 얘기해도 우리나라의 민주화과정의 수난자요 승리자로서의 상징이었다 할 것이다.
DJ를 생각할 때 역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가 연상되기도 하여 슬며시 민족으로서의 긍지를 느끼기도 한다.
DJ의 평가 문제는 지나간 일이 아니고 계속 살아있는 좌우파간의 논쟁점이 될 것만 같다.
* 필자 남재희는 1934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민국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정치부장)와 서울신문(편집국장, 주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제10-13대 국회의원, 노동부장관(1993-1994년)을 역임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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