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운데 정부는 6자회담 성사 가능성에 회의를 드러내며 '천안함·연평도'를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일종의 속도 조절을 시도하는 한편, 금강산 관광 재개와 대북 식량지원을 내세워 북한을 남북대화로 유인하려 하는 움직임도 관측된다.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25일 YTN라디오 <강지원의 출발 새 아침>에 출연해 "이번 발리에서의 회담은 그동안 막혀 있던 남북관계의 물꼬가 트인 의미가 있다"면서도 "이런 회담이 있었다고 해서 급격한 진전이나, 바로 (6자회담 재개를) 기대하진 못하는 상황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김 장관은 "이런 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 자체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겨지느냐는 다른 문제"라며 "6자 회담을 열기 전에 북한이 사전에 미사일이나 핵 활동을 중지하거나 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복귀하는 등 여러 가지가 사전에 조율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부 고위관계자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6자회담 재개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북핵 문제에 관한) 비가역적인 사전 조치를 위하는 것만 가지고도 갈 길이 쉽지 않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고위관계자는 "6자 회담으로 가지 못한다고 해도 대화는 시작된 셈"이라며 "(6자회담으로 가는) 과정 자체가 비핵화 조치를 취하기 위한 협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왼쪽)과 박의춘 북한 외무상이 23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열린 인도네시아 발리 국제회의장에서 만나고 있다. ⓒ외교통상부 제공 |
남북 대화-북미 대화의 온도차?
이날 나온 발언들을 종합하면 표면적으로는 남북 비핵화 회담의 시작 단계에서 성급한 판단을 자제하자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지난달 초 북한이 남북 비공개 접촉 사실을 공개하고 대화 중단을 선언한 후 남북이 최악의 관계를 달리다 급격하게 반전된 과정을 보면 얘기가 다르다. 반대로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대화 국면이 되면서 한국이 외면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우선 '발리 회동'은 사실상 남북이 각각 기대고 있는 미국 및 중국 정부의 강력한 압력에 의해 이뤄졌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지난달 24일 한·미 외교장관 회담이후 한국 정부는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남북 비핵화 회담을 분리 대응하겠다고 밝혀 '유연성'을 강조했다. 북미 대화 앞에 '비핵화 회담'을 놓고, 그 앞에 다시 '천안함·연평도'를 놓던 이전 태도와는 달랐다.
이어 지난달 30일 중국이 '남북 비핵화 회담-북미 대화-6자회담 재개'라는 3단계 안을 뛰어넘어 양자·다자대화 병행안을 제시한 데 대해 반대의 뜻을 밝혔지만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ARF를 기점으로 남북 비핵화 회담과 북미대화를 병행하는 기조로 바뀌었음을 사실상 인정했다.
남북 비핵화 회담과 28일경 열릴 북미 대화의 온도차를 확인해 봐도 그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은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에서 회담이 생산적이고 유익한 대화였다고 평했지만 차후 추가 협상이 열릴 가능성이나 구체적인 회담 안건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북한에서는 이번 회담 소식을 보도하지 않고 있고 한국도 이번 만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는 걸 보면 사실상 모양새만 낸 것에 가깝다"며 "사실상 대화를 재개하라는 미국 측 압박을 받은 한국과 북미 대화를 바라는 북한이 서로 내키지 않았던 자리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반면에 이번에 방미할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문제나 대북 식량지원, IAEA 사찰단 복귀 문제 등을 놓고 미국 당국자들과 협상을 벌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결국 형식적인 '남북 비핵화 회담'이라는 모양새를 갖춘 후 이를 명분으로 미국이 북미 대화에 서둘러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핵 비확산 등의 대외외교 성과를 내야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북한과의 대화를 진행해야 이유가 많다.
6자회담 재개의 걸림돌로 꼽히고 있는 UEP 문제도 오히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상황이라는 배경도 북미 대화가 건설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견해에 힘을 싣고 있다. 김근식 교수는 "지난해 연평도 사건 직후만 봐도 한국과 미국은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해야 한다는 훨씬 강력한 조치를 주문했다"며 "이 문제를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전제로 언급한 건 오히려 완화된 조건이기에 이제 (6자회담장으로 UEP 문제를 가져가자고 주장했던) 북한이 양보할 차례로 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금강산 회담-밀가루 지원, 北에 내민 카드?
이러한 배경은 한국 정부가 이번 회담이 6자회담 재개에 진전이 됐다는 평가도, 한반도 비핵화의 주도권을 쥐겠다며 북한의 진정성을 강조하던 이전의 스탠스도 강조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북핵 협상의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갔다는 걸 인정할 수도 없지만 남북 비핵화 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자니 마땅한 카드도 없다.
국내 정치상으로도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보수진영의 사과 요구가 거세질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고 한국만 북한과 대화에 진전을 보지 못하면 6자회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할 위험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부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천해성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6자회담 남북 수석대표 간에 회동이 있었던 것이 이른바 3단계 접근(남북대화-북미대화-6자회담)에서의 1단계(남북대화)가 성사된 것으로 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변할 위치에 있지 않다"면서도 "남북 6자 수석대표 간에 기획한 문제에 대해 분명한 협의가 있었다. 이는 외교부에서 충분히 설명한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천 대변인은 다만 "우리 정부는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해 북한이 진정성 있는 태도를 보여야 남북관계, 한반도 평화가 정착될 수 있다는 입장"이라며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바 있고, 이 입장에는 현재까지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이날 통일부는 북한에 대한 밀가루 지원을 허용하고 금강산 관광 관련 실무회담을 제의했다. 천 대변인은 "북한의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에 통지문을 보내 금강산 관광 사업과 관련한 당면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해 29일 금강산에서 남북 당국간 실무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했다"고 밝혔다. 종전의 '재산권 관련 합의'에서 '당면 문제'로 의제를 넓힌 점이 주목된다. 이통지문은 통일부 교류협력국 명의로 발송됐다.
또 그는 같은 자리에서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와 천주교 측이 신청한 밀가루 반출과 이를 위한 방북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민화협은 사리원 지역의 탁아소, 유치원, 소아병원 등 취약계층 지원을 위해 밀가루 300톤을 북측에 26일 전달할 예정이며, 천주교 측은 28일 황해도 지역의 병원과 탁아소 등에 지원할 밀가루 100톤을 반출할 계획이다.
이는 통일부가 북한에 내민 '카드'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남북 당국 간 금강산 관련 회담이 열리는 것은 지난해 2월 이후 17개월 만이며, 북한 주민에 대한 밀가루 지원도 지난해 11월 이후 8개월 만에 이뤄지는 것이다. '3단계 접근법'의 '2단계'인 북미 대화가 열리는 시점에서, 다시 식량지원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미끼로 북한의 관심을 끌어 '1단계'인 남북 대화부터 손을 대게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김근식 교수는 "금강산 제안을 보면 (남북 관계를) 풀고 싶은 의미도 있는 것 같다"면서 "대화 재개까지 하면서 금강산을 협의하고 있는 건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남북 비핵화에 이어서 활력을 찾아보자는 시도일 것"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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