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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통합의 실패와 정치 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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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통합의 실패와 정치 역정

[자유언론, 동아투위 그리고 나의 삶 ⑤]

올해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사건이 발생한 지 35년이 됐다. 유신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중앙정보부의 광고탄압과 이같은 부당한 공권력에 굴복해 동아일보사가 134명의 언론인들을 대량 해고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동안 113명의 투위원 가운데 14명이 작고했다.

동아투위 사건은 언론개혁 운동의 시발점으로 역사적 재조명을 받기도 했으나 정작 피해 언론인들의 명예회복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진상규명위원회'는 동아투위 사태가 정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 때문에 일어났다고 결론짓고 정부와 동아일보사가 피해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줄 것을 권고했다. 독립된 정부기구가 해직사태의 가해자를 밝혀냈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국가와 동아일보사는 이 권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국가권력의 피해자이기도 한 동아일보사는 당시의 해직사태 이유를 경영난 탓으로 돌리며 진실화해위의 권고에 이의신청을 내기도 했다. 이에 동아투위는 지난해 12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 현재 공판이 진행 중이다.

이 글은 해직언론인이자 전직 정치인인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1975년의 '동아광고탄압과 언론인 대거해임사태'와 관련한 민사소송에 동아투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재판부에 제출한 자신의 삶의 발자취이다.

6회에 걸쳐 연재될 이 글에는 이부영 전 의장이 자유언론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정치참여 과정에 겪은 숱한 사건와 뒷얘기들이 기술되어 있다. 동아투위 사건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난 35년 동안 우리가 겪어온 주요한 사건들의 의미를 되새겨볼 대목들이 많을 것이다. 이 전 의장은 자신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이기 보다는 언론인으로서 생각하면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편집자>

☞ 전편보기
- 1편 : 동아투위, 35년 싸움의 시작

- 2편 : "중정부장 인계문서에 김상만 <동아> 사장 각서가..."

- 3편 : 박종철 고문사건과 6월 항쟁

- 4편 : 양김의 분열, 민주화운동의 분열

4. 정치 참여

한겨레신문은 민주화운동 진영과 특히 진보진영의 기대를 모으면서 한국 언론의 면모를 일신하고 있었다. 기존의 모든 언론의 견제를 받기도 했지만 거의 다를 것 없는 신문·방송 중에서 민주와 진보를 당당히 내세우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87년 민주항쟁의 거의 유일한 성과로 치부될 수 있었다.

한겨레의 존재 자체가 우리 동아투위의 분신처럼 여겨졌고 우리 언론의 희망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더 이상 언론계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어진 듯 보였다. 재야민주화운동의 경우도 부문운동과 지역운동이 자리 잡아갔고,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선택된 정부를 상대로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대해서 투쟁하듯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88서울올림픽을 치른 뒤, 러시아·중국과의 수교 그리고 남북의 유엔동시가입도 성취시켰고 남북 간의 기본합의서에도 합의했다. 아직도 남북분단체제의 대결구도는 해소되지 않고 있었지만, 탈냉전·탈이념을 지향하는 세계의 흐름이 국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들이고 있었다. 세계의 이런 변화를 외면하고 자행되던 한반도안의 남북독재체제가 시대착오적이었다면, 80년대의 반독재운동 시기에 민주화운동 진영에 나타났던 20세기 초기의 마르크스-레닌 사회주의 혁명론들도 시대착오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서냉전의 해빙을 견디지 못해 남한의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있는데 그에 대응하는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20세기 초기의 급진 사회주의 혁명론이 비등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으며 사회 사상가들의 통절한 반성거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한 사회 안에서 오랜 세월 동안 독재정치와 재벌독점 경제가 지배해오면서 심화된 빈부격차와 복지의 부재는 진보정치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 진영이 1987년 민주항쟁으로 가져왔어야 할 정치적 변화는 진보정치 세력의 공개적 활동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우리 정치에는 이미 1950년대에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 실험과 4월 민주혁명 이후의 진보정당의 시도들이 있었지만, 5·16군사 쿠데타로 좌절당했거나 지하활동을 강요당했다. 1990년대 초에는 1992년의 14대 총선을 앞두고 진보정치 세력의 진출을 위한 모색이 당연히 일어났다.

가. 야권통합과 지도부 참여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합당, 즉 거대 민주자유당의 출현은 야당과 민주화운동 진영에게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거대 보수여당은 야당을 호남에 가두고 민주화운동과 진보진영까지 호남세력 내지 친호남세력으로 몰아 철저한 지역분할구도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노태우 정권은 스스로 북방정책이라고 해서 러시아·중국과 수교하고 북한과도 함께 유엔가입하면서 민주화운동 세력과 진보세력을 색깔론을 이용, 공안탄압하려 했다. 분열된 야권과 민주화운동 진영은 탄압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지난날처럼 다시 공안탄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논의가 있고 상투적이랄 수 있는 야권통합론이 제기됐다.

▲ 1990년 초겨울 이부영이 사찰번호 1번을 달고 보안사민간인사찰규탄과 군정청산국민대회에서 지선스님 및 노무현의원과 함께 단상에 앉아있다. ⓒ이부영

김대중의 평민당과,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은 이기택의 작은 민주당과의 통합이 그것이었다. 진보정당을 추진하던 민중정당 추진위원회 측은 중요한 계기 때마다 분열로 국민을 실망시키고 독재세력에게 반전의 기회만 제공해온 야당 세력을 믿을 수 없다는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나 진보정당 추진 세력도 내부의 노선 갈등으로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치에 참여하려는 재야민주화 세력은 우선 약체의 이기택 민주당에 합류하여 그 정당의 외형을 큰 규모로 만든 다음 평민당과 통합하는 과정을 거치기로 했다. 이기택 박찬종 이철 노무현 김광일 홍사덕 김정길 장기욱 등 대부분 영남출신의 스타 국회의원들로 이루어진 이기택의 민주당은 규모는 작었어도 국민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재야세력과 먼저 통합하여 규모를 키운 다음 평민당과 통합하면 거대여당이 그 세력을 호남당으로 몰아세우는 데는 설득력이 떨어질 것으로 보였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민주당 측에서 내가, 평민당 측에서 한광옥이 나서서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에, 김대중 법적 대표 등록안에 합의함으로써 야권통합이 성사되었다. 이로써 거대 민자당에 대항해서 1992년에 있을 14대 총선과 대통령선거를 준비할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공안탄압에도 범야권이 공동대응 할 수 있게 되었다.

▲ 1991년 연말 야권통합 성사 뒤, 이부영이 김대중 이기택 공동대표와 함께 회동하고 있다. ⓒ이부영

나는 통합민주당의 부총재로 취임하여 14대 국회의원 선거의 공천심사위원으로서 재야세력의 공천을 유리하게 이끄는 소임을 맡았다. 이 통합을 추진하면서 이기택 총재를 비롯해서 노무현 김정길 등 부산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의 선택을 가장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민자당의 독식구도에서 야권통합을 안 해도 떨어지고 해도 떨어지게 생긴 상황에서 통합을 하고 떨어지는 것이 명분이 있다고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야권통합으로 탄생한 통합민주당 덕택에 야권은 총선에서 약진을 보였지만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했다.

나. 새정치국민회의 분당 및 통합민주당의 소멸

대선패배와 DJ의 정계은퇴는 통합민주당을 큰 혼란에 빠뜨렸다. DJ 없는 민주당, DJ 없는 호남민심은 사공 잃은 나룻배와 같았다. 71년, 87년, 92년 세 차례 대선에서 낙선한 DJ로서는 결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87년 양김 분열에 따른 패배와 민주세력의 분열, 그리고 잇따른 92년 패배는 DJ로 하여금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동지이자 정적인 YS의 승리로 DJ에 대한 정치보복이 있을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DJ의 후퇴를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정계은퇴 선언과 영국체류의 방안이 나왔다. 그것은 일시적 정치망명이었다.

그러나 DJ의 정계은퇴는 민주당의 혼란, 야당의 존재감 약화와 리더십 부재로 이어졌고 YS와 민자당의 오만을 불러왔다. 역설적으로 DJ의 복귀조건을 더욱 강화하는 꼴이었다. 호남세력이 압도적인 민주당에서 DJ의 동교동계는 역설적으로 이기택 대표 체제를 유지시켰다.

DJ의 후계구도를 이기택으로 정한다는 것은 DJ지지 세력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기택 지도체제는 DJ 없는 야당의 차기지도자를 꿈꾸던 김상현 정대철 등의 부상을 억제하는 임시체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1995 7월 이부영이 이기택 김원기 노무현 강창성 김종완 이규택 양문희 등과 함께 민주당 지키기를 다짐하고 있다. ⓒ이부영

영국에서 귀국한 DJ는 민주당 분당의 수순을 밟아갔다. 95년 아시아 태평양 평화재단(아태재단)을 설립하고 지지 세력의 결집을 시작한 DJ는 지역등권론(호남지역 차별을 배격하는, 달리 말하면 호남 지지세력의 결집을 공식화하는)을 내세우면서 민주당을 분당시켰다. 95년에 분당된 민주당은 무력화되었고 반면 새정치국민회의는 DJ 세력만으로 15대 총선에서 79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등장했다. 국민회의는 빠른 속도로 민주당을 분해시켰다. 15대 총선에서 지역구 비례대표 합쳐 16석을 얻은 민주당은 이기택계와 통추세력으로 양분되었지만 김원기를 중심으로 하는 통추세력은 97년 대선이 가까워지면서 국민회의 쪽으로 기울어갔다.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안에는 정권교체론(국민회의 합류론)과 삼김정치와 지역주의 극복론(국민회의 합류거부론)으로 나뉘어 있었다. 다수파를 형성한 국민회의 합류파는 김원기 노무현을 주축으로 국민회의에 합류했다. 나와 제정구 이철 박계동 김원웅 등 소수파인 삼김정치 지역주의 극복론자들은 97년 대선에 임박해서 선택을 강요당하다가 마지막 순간 DJP연합 보다는 이회창-조순 연합이 삼김정치와 지역주의 극복의 대의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여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통합체인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이로써 삼김 보스정치와 지역주의를 넘어서 보고자했던 통합민주당과 국민통합추진회의의 정치실험은 분해되고 새로운 정치세력의 결집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 뒤 오랜 세월 회한으로 남는 일은 이 때 나 개인적으로는 정말 정계를 떠나 시민운동에 전념하거나, 내부 충전을 위해 뒤늦게나마 공부를 더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나와 함께했던 동료 후배들을 내버려둔 채 나 홀로 길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나의 입장이기도 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딱한 처지는 발등에 떨어진 불만 볼 따름이지 더 먼 미래를 내다보기는 쉽지 않았다. 나의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도리였다.

다. 한나라당 입당, 지도부 역할과 대선후보경선 참여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이 DJP연합 형성을 구체화해가자 신한국당의 이회창도 민주당의 조순과의 연합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앞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홍성우를 물리치고 총재에 당선된 이기택은 당이 침몰해가자 서울 시장이었다가 DJ와 결별한 조순을 한나라당 총재로 영입했다. DJP연합에 대해서 통추의 일부 세력이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정권교체를 위해서 불가피하다는 주장 앞에 자신들의 주장을 접었다. 국민회의 합류 거부파에게는 DJP연합의 등장이 국민회의 합류를 하지 않을 명분을 제공했다. DJ-JP가 지역주의 보스에다가 부패정치인이어서 이회창-조순 연합이 오히려 지역주의나 부패의 원죄가 없다는 점에서 더 명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회창은 내가 통합민주당에 있으면서 새정치국민회의 분당 이후 그를 민주당으로 영입하려고 접촉했을 당시 꽤 개혁적이고 진취적인 의식의 일단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감사원장이었을 당시, 나는 91년의 남북총리고위급회담에서 벌어진 대통령훈령조작사건을 93년 국회에서 밝히고 그로 하여금 안기부를 최초로 감사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넘겨줬고 그는 원칙대로 감사해서 남북고위급회담대표 특보이자 안기부장 특보인 이동복을 해임 조치했다. 그것이 그와 나의 첫 인연이었다.

97년에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JP를 총리에 지명했으나 원내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야당 한나라당은 총리인준을 계속 거부했다. 한나라당은 대선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패배했으면 승자로 하여금 정부를 구성할 수 있도록 총리인준을 하루 속히 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한나라당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DJ정권은 야당의원 36명을 여당으로 이적시켰다. 야당을 설득하거나 대화하지 않고 비리 캐기, 협박 등으로 의원들을 끌어갔다. 뒤에 무죄선고를 받기는 했지만 나 자신도 사정의 대상이 되었다. DJ정권은 DJP연합의 우당인 자민련에게 3명의 의원을 꿔주어서 교섭단체를 구성토록 해주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붕괴위기에 처해 우왕좌왕했다. 겁이 나서 투쟁에 나서는 인사들이 없었다. 이회창은 나에게 당을 지켜달라면서 야당파괴저지투쟁위원회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한나라당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총리인준을 계속 거부한 것도 졸렬한 짓이었지만, 그렇다고 야당의원을 대거 여당으로 끌어가고 자당의원을 우당에게 대여해주는 집권당의 행위는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3김은 분명히 민주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야당의 강력한 반발이 이어지자 야당의원 빼가기는 멈췄고 JP총리인준은 98년 8월에야 이루어졌다.

이회창은 1999년 초 나에게 원내총무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당내에는 이미 원내총무를 맡고 있던 박희태를 비롯, 3선 이상의 다선 의원들이 즐비하게 있었지만 일부 재선의원들을 제외하고는 나서려는 의원들이 없었다. 의원들에 대한 사정 위협이 계속되니 표적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한몫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다음해 2000년에 있을 16대 총선을 앞두고 여당과 벌이게 될 선거법 협상이 야당 총무의 어깨에 지워진 가장 큰 소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의원 36명을 여당에 빼앗기고도 아직 제1당의 지위는 겨우 유지하고 있기는 했어도 다음 총선에서 그때처럼 무기력하게 대응하다가는 얼마만큼 추락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강경압박을 일상적으로 가해오는 DJ정권에 대응하는 일도, 더구나 시대의 흐름과는 담을 쌓고 강경보수의 본색을 조금도 바꾸려하지 않는 한나라당의 주류를 설득하는 일도, 16대 총선을 앞두고 닥치게 될 선거법 협상과 공천문제도 모두 나에게는 원내총무를 맡을 경우 엄두가 나지 않는 일들이었다.

▲ 1999년 2월초 박준규 국회의장이 이부영 한나라당 총무 그리고 손세일 국민회의 및 강창희 자민련총무의 회담을 주선하고 있다. ⓒ이부영

나는 연초의 국회 휴회기간에 예정됐던 미국후원회 방문 일정에 나섰다. 이회창은 미국으로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조속히 귀국할 것을 요구했다. 총무경선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응했다. 그는 지난해 야당파괴저지 투쟁 당시 나의 활동에 감사하다면서 2000년 16대 총선에서 제1당을 지켜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힘든 협상과정에서 여당의 총무 손세일, 한화갑, 박상천 세 사람을 상대해 협상해야했다. 물론 이회창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는 했어도 홍성우 변호사를 총선공천심사위원장으로 영입하고 윤여준과 내가 참여한 공천은 김윤환 이기택을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파란을 불러 일으켰고 선거법 협상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결과는 16대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났다.

야당파괴에서 살아났고 16대 총선에서 승리한 한나라당은 차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0년 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된 나는 이회창의 보수색채 강화에 제동을 자주 걸고 개혁노선을 강조했다. 2000년 DJ정부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비난 비방을 퍼붓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점진적 대북자세전환을 요구했다. 물론 16대 총선 직전에 DJ정권이 정상회담 일정을 미리 발표함으로써 선거에 남북관계를 이용하려한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었다. 유권자들도 통일 문제를 선거에 이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보여 선거 결과에 전혀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처럼 남북관계 통일문제 등에 내가 전향적인 주장을 펴자 민정계를 비롯한 보수파 중진들은 "빨갱이 아니냐, 당을 떠나라"라는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 2001년 한나라당의 이부영 김덕룡 그리고 새천년민주당의 김상현 김원기 정대철 김근태 이창복 등이 함세웅 신부와 법륜스님 등과 함께 지역주의 등을 극복하기 위한 화해와전진포럼을 결성했다. ⓒ이부영

나는 점차 한나라당이라는 거대한 정치세력의 중심부가 그 같은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인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남북관계 뿐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 사회 내부의 화해 공존도 심각한 장애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97년 IMF외환위기의 발생과정에서 치러진 대선에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당의 후보였던 이회창은 패배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드러나기 마련인 노동자 농민들의 고통, 기업구조조정에서의 무리와 부정부패, 선거를 앞두고 경기부양을 위해 남발된 신용카드로 인한 위기와 그에 따른 신용불량자들의 양산과 가계위기 등에 대해 한나라당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DJ정권에 대한 색깔론 공세에만 매달리면서 국민들의 경제적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우리지 못했다.

▲ 2002년 이부영이 한나라당 대선후보경선에 나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이부영

나는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이회창의 압도적 우위에 맞서 나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한나라당이 변하지 않거나 변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라와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회창은 주류론, 즉 DJ정권 등장으로 정권을 빼앗긴 한국 사회의 주류 즉 영남중심의 전통적 보수세력이 다시 복귀해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웠으나, 나는 남북화해와 민주개혁을 내세우는 세력이 한나라당의 주류가 되어야 탈냉전시대의 한국사를 주도하는 정당으로 한나라당이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신주류론'을 내세워 투쟁했다. 결과는 이회창, 최병렬에 이어 3위, 15%의 득표에 그치는 완패였다. 나의 경선캠프 안에서는 15%의 득표도 적지 않은 것이라는 위로의 말도 있었지만, 자갈밭에 모심기라고 자학하는 목소리가 더 많았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운동 막바지까지 미군장갑차에 숨진 두 여중생을 위한 집회, 농산물개방에 항의하는 농민들의 항의운동에 한나라당 후보가 관심을 갖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다시 말해서 강경보수 일변도의 그의 행보를 가능한대로 중도보수노선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다. 고통당하고 있던 국민 곁으로 다가감으로써 득표에 도움을 주게 할 뿐 아니라 선거 이후에 승패에 관계없이 한나라당의 노선을 중도보수노선으로 이끌어 보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미군장갑차 희생 여중생을 위한 추모농성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한나라당과 지지자들 속에서 알레르기 비난 반응이 일어났다. 그 방문을 주선한 나와 박계동에게 비난이 집중됐다.

이 같은 퇴영적 자세로는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결과는 다시 이회창의 패배였다. 그러나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에서는 나와 개혁파 의원들에 대한 수구 보수파의 색깔론 공세가 강화되었다. 최병렬 김용갑 정창화 이상배 등이 그런 인물이었다. 지난 5년간 한나라당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헛된 일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97년 말 거의 같은 시기에 한나라당에 입당했던 제정구의원이 99년 초에 세상을 등졌다. 그가 있어 한나라당의 변화 노력을 함께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자주 생각했다. 그래도 한나라당 원내총무로 일하면서 보람으로 기억되는 일은 1999년에 '제주 4.3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여야합의로 성사시킨 일이었다. 제주도민들과 당시 한나라당 소속 3명의 국회의원 양정규 현경대 변정일이 찬성했고 정부여당이 법안을 제출함으로써 이회창과 한나라당의 당론을 어렵사리 동의 쪽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다. 4.3특별법은 그 후 과거사법 입법의 효시가 되었다.

라. 한나라당 탈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새정치국민회의의 후신인 민주당에서도 DJ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었다. 낡은 지역주의와 보스정치에서 벗어나 국민통합의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민주당의 짙은 DJ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듯 했다. 나를 비롯한 한나라당 안의 개혁세력도 그 같은 새로운 제3의 정치세력 형성을 시도했지만 대다수 의원들은 "당을 떠난다"라는 결단에는 거의 움츠러들었다. 거기에는 '야당을 버리고 여당으로 옮긴다'는, '음지를 떠나 양지로 옮긴다'는 엉뚱한 여론의 부담감이 작용했다. 최종적으로 이부영, 이우재,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등 의원 5명이 결단했다. 이 5명이 먼저 한나라당을 떠나 벌판에 나서서 결단을 못하고 있던 민주당 안의 새 세력을 이끌어 내기로 했다. 언론은 우리 다섯 사람을 '독수리 5형제'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정당이 열린우리당이었다. 96년 새정치국민회의의 분당으로 공중분해된 통합민주당의 후신이 다시 살아난 듯 했다. 그러나 나는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낙선할 것이 예상됐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주의 정치와 금권보스정치를 넘어서는 정당을 바로 세워야한다는 오랜 다짐을 실현하기 위해 열린우리당을 세우고 그 후보로 나섰던 것이다.

▲ 2003년 7월 7일 이부영 이우재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등 5의원이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내세우고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이부영
이 선택에 대해서도 나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했다. 과연 그 같은 정치행보는 정치발전에 기여했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왔는가, 뒤에도 두고두고 생각하는 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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