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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진정 '우리의 나라'인가?

[한미FTA 뜯어보기 131 : 2차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에 맞서(1)] 공공성을 묻는다

노무현 정부가 지난 2월 예고도 없이 느닷없이 시작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최근 4차 협상까지 마치고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한미 FTA는 단순한 무역협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경제 사회와 삶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할 만한 위력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따라 내년 초로 설정된 한미 양국 정부 간 FTA 협상 타결 예정시점까지 앞으로 4~5개월 동안 국내에서는 이 협정의 문제점에 대한 토론과 찬반 양측의 행동이 가열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참여연대 부설 연구기관인 참여사회연구소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지난 달 27일 '공공성과 한국사회의 진로'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을 열고 한국 사회의 현 단계와 공공성 세우기의 새 길에 관한 토론을 벌이는 가운데 한미 FTA를 주요 주제로 다뤄 눈길을 모았다.

이 심포지엄에서 '한미 FTA와 시장사회로 가는 한국적 길-탈공공화와 제2차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이라는 제목으로 한미 FTA에 관한 발제를 했던 이병천 참여사회연구소장(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이 발제 내용을 간추려 <프레시안>에 보내온 기고문을 4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이 글에서 이 소장은 한미 FTA를 기득권 세력과 자본에 의한 '제2차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의 일환으로 진단하고 그 극복을 위한 대안의 길을 '공공성의 연대정치'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편집자>

▲ 이병천 참여연구소장. ⓒ데일리서프라이즈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나라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나라를 원하는가. 이 나라는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조국은 땅이 아니다, 땅은 그 토대에 불과하다. 조국은 이 토대 위에 건립한 이념이다. 그것은 (…) 그 땅의 자식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다."(M.Viroli, Repubblicanesimo, 1999, 김경희·김동규 역, <공화주의>, 인간사랑, 2006, p.173)

너와 내가 제각기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을 가지면서도 '우리'로서 함께 묶일 수 있는 공통의 끈, 너와 내가 더불어 살아갈 준거와 목표가 될 이념, 공동체에 대한 의식, 너와 내가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공동의 정치 공동체로서 나라가 지향해야 할 공통의 가치(political common goods) 또는 집단적 정체성을 우리는 지금 가지고 있는가.

나라 밖으로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이후, 나라 안으로는 개발독재가 붕괴한 이후 우리 국가와 시민사회는 언제, 얼마나 진지하게 우리가 공유해야 할 지향점으로서 공동의 이념과 비전, 전략을 논의하고 이에 대한 공공적 토의를 조직하고 축적해 왔는가. 그런 이념, 비전, 전략을 구현하는 나라의 상(像)과 제도의 형태, 그리고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이는 헌법이 제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정체성이다)의 구체적 모양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해야 소수 기득권층과 특권층을 위한 나라,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소수 지배세력이 대중을 동원하고 억압하면서 외세에 끌려 다니고 외세에 빌붙어 그들의 사적 특수이익과 욕망을 도모하는 데 여념이 없는 나라, 제 중심은 어디에 두었는지 잃어버린 채 강대국 또는 제국(帝國) 따라잡기와 편승하기 아니면 남 이기기에 골몰하는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 사는 평범한 다수 대중, 선량한 평민들이 나라 안에서 아웃사이더, 이방인, '타자'로 배제되지 않고 모두가 동등하게 권리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의 지분(stake)을 갖는 공동체의 구성원(stakeholder)으로서 참여와 토의(public deliberation)의 주체가 되는 '모두를 위한 나라'(김상봉, 모두를 위한 나라는 어떻게 가능한가-공화국의 이념에 대한 철학적 성찰, 시민과 세계, 제8호, 2005 하반기), 뿌리 깊게 주체적이면서 호혜, 평등, 평화의 선린관계를 발전시키고 세계를 향해 활짝 경계가 열린 나라, 그리하여 안팎으로 두루 열린 '활사개공(活私開公)'과 '활공개사(活公開私)'의 시민적 사회국가를 세울 수 있을까.

지금 공공성을 묻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한국에서 이 공공성의 물음은 의미심장하다. 객관적으로는 오랜 반공 국가주의와 개발독재의 유산에 더하여 자본세계화의 도전이 중첩된 지금은 모두를 위한 나라 세우기를 가로막는 안팎의 강력한 지배력, 그 강제와 동의의 힘을 제어하는 일이 벅찬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우리가 풀어야 할 '우리 안의 숙제'가 있다. 지속가능한 복지사회 건설이라는 과제를 둘러싼 논의에서도 알 수 있지만, 지금 공공성 세우기를 위해서는 이른바 '집단행동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지난한 과제를 우선 감당해야 한다. 그것은 더불어 살아갈 넓은 의미의 공공재 구축을 위해 우리 사회구성원들이 무임승차자 없이, 권리와 함께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며, 불확실한 미래의 일인 '모두를 위한 나라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집단행동 또는 지난 날 근대화를 위한 집단의지와는 차원이 다른 집단의지를 창조하고 열정을 조직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저항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우리 안의 보수주의' 또는 '자생적 신자유주의'의 유혹을 넘어서 우리 자신의 공적 주체성을 재창조하고, 그에 기반을 두고 시장, 자본, 국가를 민주적 공공성에 뿌리 내리게 하는 일련의 제도형태를 창안하는 과제라 할 수 있다.

모두를 위한 나라에서도 시장과 소유권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소유적 자유만이 아니라 능력신장의 자유도 보장하고, 효율성을 높이고, 경제적 소통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지속가능한 현대 경제공동체의 기본 구성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개인의 사적 소유와 경제적 자유가 그 반대물로, 즉 맹목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이라는 구조적 권력체로 전화되어 인간과 생태계를 맹목적 가치 증식의 수단으로만 삼게 됐다는 데 있다.

그리고 과도한 시장논리는 부단히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차별을 조장하며, 우리의 삶을 자기 안에 가두는 병리적 개인주의와 나르시시즘의 경향을 조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순수 경제적으로도 시야가 단기주의와 투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자본제적 시장사회는 사회구성원 간의 소통, 정의, 연대, 평화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나라경제의 중장기적 효율성도 저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자본권력과 시장경쟁의 맹목적 충동을 어떻게 조절하여 공공적 룰과 제도 속에 착근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현대성의 역사는 한편으로 자본제적 시장사회의 맹목적인 축적과 경쟁의 운동 및 그 위에 선 국익확장 운동,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것들을 공공적 룰과 제도 속에 착근시키려고 하는 공공성의 정치 또는 사회적 대항운동과 시티즌십(citizenship)을 확대 및 심화하려는 운동 간의 충돌과 쟁투의 역사였다.

시장 자본사회의 맹목적 운동 대 공공성의 정치 간 쟁투의 역사는 나라마다 지역마다 크게 다른 다양성을 보였다. 이같은 국민적, 지역적 다양성, 그리고 그 쟁투를 둘러싼 지배적 헤게모니 전략과 대항 헤게모니 전략을 탐구하는 것은 현대성의 역사 이해와 새로운 대안 모색에서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제적 시장사회의 맹목적 축적 충동이 나라 안의 공공적 룰과 제도로부터뿐만 아니라 세계체제 수준에서도 탈착근된, 다시 말해 이중적으로 탈착근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각 국민국가는 국제자본에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입지경쟁 국가로 전락하고 있다. 구조조정, 투자자 보호, 공정경쟁, 투명성,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이 이 시대의 지배적 가치로 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정치적인 것'과 공공성의 정치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한국과 동아시아는 남미나 아프리카 나라들에 비하면 비교적 뒤늦게 미국 패권 하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격랑 속에 빠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개방, 경쟁, 투자자 보호,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의 내용을 일신함으로써 한국의 '1997년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를 새로운 단계로 업그레이드시키는 탈공공화 보수혁명의 성격을 갖는다. 이에 따라 한국의 시민사회운동 또한 새로운 공공성의 연대정치를 어떻게 새롭게 발전시킬 것인가를 화두로 삼아야 하는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일찍이 세계의 역사적 경험이 보여준 바 있지만, 중상주의 또는 후발 산업화 단계 이후에 오는 한 나라의 민주화라는 것은 단지 정치적 민주화라는 쟁점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신질서 형성을 위한 개혁이라는 쟁점을 함께 갖게 된다. 역사상의 시민혁명은 단지 정치혁명에 그치지 않고 이와 동시에 사회경제적인 사안들에 하나의 결말(settlement)을 가져오는 '이중적 전환'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정치적 민주화로의 이행 이후에는 어떤 신 자본주의 질서인가, 어떤 룰에 기반을 둔 시장인가, 따라서 어떤 민주주의인가가 사회정치세력들 사이에 치열한 다툼의 초점으로 당연히 대두된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개혁과 신질서 형성의 길은 정치적 민주화 및 그 주도 세력의 성격, 구체제의 강도, 진보세력의 역량, 그리고 당대 세계체제의 성격과 나라가 거기에 편입되어 있는 양상 등에 의해 달라진다.

한국의 1987년 민주화 이행에서는 사회경제적 의제가 거의 완전히 배제됐다. 그것은 '사회적 결말(social settlements)이 없는 단순한 정치적 민주화'에 그쳤다. 한국의 민주화 이행은 그런 까닭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오도넬을 비롯한 대표적인 이행이론가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에 따른 심대한 모순을 간직하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시장개혁이 이루어진 지배적 기조는 개발국가-재벌-은행의 삼각지배 연계와 선별적 개방체제가 골간이 된 개발주의라는 구 특권체제를 주주의 주권을 중심으로 한 공정경쟁 시장과 전면개방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사회경제적 개혁의 주된 전선은 주주 주권 중심의 '시장 민주주의' 대 구 특권체제의 대립으로 설정되었다.

나는 이 개혁의 기본적 성격이 군주제적 자본주의를 귀족제적 자본주의로 개편하는 것이었다고 보아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결과는 주주 주권이 우위에 서면서 구체제와 상호의존적으로 결합하는 기묘한 혼성형태로 나타났다. '삼성공화국'으로 귀결된 재벌개혁의 결과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화의 사회경제적 실체를 채워 넣은 것은 경제적 자유화였으며, 이 자유화가 민주주의를 봉쇄하고 민주주의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하여 집권 초기에 기대를 모았던 짧은 '전성기'를 훌쩍 넘긴 후 참여라는 깃발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친 이 나라의 대통령이 말했듯이, 경제 권력의 공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정권을 내어준 냉전 구보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민주화 시대를 주도한 집권세력이 추진한 사회경제 개혁의 기조가 '좌파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나오는 주장들에는 정치선전적 요소가 매우 강하다. 실제로 집권세력이 사회경제 신질서의 기본가치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은 주주가치, 투자자 보호, 이를 위한 투명성과 책임성, 공정경쟁, 그리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이다. 현 집권세력과 야당의 차이는 상대적으로 재벌에 얼마나 조금 더 또는 덜 우호적이냐, 그리고 선성장 후분배의 구체제가 물려준 모순까지 중첩되며 나타난 '민주화의 깨어진 약속' 때문에 국민 대중 사이에 광범하게 퍼진 분노의 응어리를 위로부터 순치하기 위한 온정주의적 복지의 요소를 얼마나 더 가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느냐 하는 정도다.

그런데 투자자 보호, 시장경쟁의 규율,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이 시대의 주된 가치로 전면에 부상하면서 배제된 것은 무엇인가. 정치적 민주화를 사회경제적 민주화와 공공성 확대로 진전시키는 과제, 그런 요구와 힘들이 공적인 정치적 의제에서 밀려났다. 달리 말하면 민주화 이후 '모두를 위한 나라' 건설을 위해 사회경제적 개혁의제로서 필수과목이 되어야 했던 사회적 기본재의 분배정의라는 것, 또는 이해당사자 간의 시민권 계약이라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사회경제적 삶의 방식에서 인민주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공적 소통과 행동, 쟁투(contention)를 통해 새롭게 반성적으로 재구성되는 인민주권 또는 주권재민에 기초한 사회통합, 헌신(commitment)과 사회적 협력이라고 하는 것 등이 의제에서 배제됐다.

우리가 이런 공적 의제를 잃어버린 것이야말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최대의 빈틈이자 역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정확히 이런 점 때문에 나는 민주화 20년 동안 시민운동이 '민중적인 것'을 우리의 집단의지로 세우지 못했고, '사회적인 것의 정치화'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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