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될 경우 지방자치단체들이 기존의 조례를 폐기하거나 변경해야 하는 사례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정부는 '지자체들이 한미 FTA에 상치되지 않는 내용으로 조례를 제·개정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안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미 FTA 저지 제주도민 운동본부'와 안동우 민주노동당 의원이 '한미 FTA가 지역 조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제주도청에 공동으로 질의한 결과 제주도에서만 한미 FTA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는 조례가 최소 14건이라는 답변을 받은 것으로 1일 확인됐다.
정부가 밝힌 한미 FTA의 기본 원칙은 최혜국대우 원칙, 내국민대우 원칙, 시장접근 원칙, 현지주재 의무 금지 원칙, 이행요건 부과 금지 원칙, 고위경영자 및 이사회 국적의무 부과 금지 원칙 등 총 6가지다.
제주도청이 제주도의 기존 조례들을 검토한 결과 이런 FTA 6대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비합치 조례'에는 △제주특별자치도 인재육성기금 조례 △제주특별자치도 개발사업 시행 등에 관한 조례 △제주특별자치도 농임축수산업의 수급안정에 관한 조례 △제주도 친환경 우리농산물 학교급식 사용에 관한 조례 △제주도 농수축산물 직판장 설치 및 운영 조례 △제주특별자치도 옥외광고물 관리에 관한 조례 △제주특별자치도 수산물 방역 및 안정성 검사에 관한 조례 △전복양식단지시설 관리 운영 조례 △제주도 어항 관리 조례 △제주도 지역연안 관리 심의위원회 운영 조례 등 제주도만의 특성을 반영한 조례들이 다수 포함됐다.
이 가운데 '인재육성기금 조례'의 경우 이 기금의 지원대상을 제주도 내에 주소를 둔 사람으로 한정하는 조항이 '내국민대우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지적됐다. '개발사업 시행 등에 관한 조례'에서는 도민 우선고용 계획과 개발사업에 대한 도내업체 참여 계획을 명문화한 조항이 역시 '내국민대우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파악됐다.
'농임축수산업 수급안정에 관한 조례'에서는 계약재배 조항, 출하조정, 자조금 적립 등 주요 조항들이 '내국민대우 원칙'과 '시장접근 원칙'등에 어긋나 대폭적인 손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친환경급식 조례'에서는 '내국민대우 원칙'에 어긋나는 '우리 농산물 사용' 문구를 삭제하거나 수정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어항 관리 조례'의 경우 어항 이용단체로 수협과 어촌계장을 명문화한 조항이 '내국민대우 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지적됐다.
이밖에도 △제주특별자치도 해양생태계보전지역 관리 자문위원회 구성 및 운영 조례 △제주도 해수욕장 운영관리 및 사용료 징수 조례 △제주특별자치도 유어장·어업허가·기르는 어업 등에 관한 조례 △북제주군 연안항만시설 관리 및 사용 조례 등이 한미 FTA 체결에 따라 폐기되거나 수정돼야 할 조례로 꼽혔다.
제주도청의 이같은 분석결과는 정부가 밝힌 한미 FTA 기본원칙만을 근거로 해서 주로 1차 산업만을 대상으로 분석한 것이며, 지난 4차 제주협상까지 진척된 분야별 협상 내용이 상세히 밝혀질 경우 비합치 조례의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조례뿐 아니라 지방공기업이 가지고 있는 권한 가운데 일부도 한미 FTA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령 제주도지방개발공사가 보유하고 있는 도내 지하수에 대한 독점개발권은 한미 FTA의 '시장접근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향후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 "FTA와 상치되는 조례는 무효"
비합치 조례들이 한미 FTA 협상이 체결된 후에도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조례들을 사전에 파악해 일일이 우리 측 유보안(개방유예안)에 담는 것이다. 이미 경기도의 몇몇 지자체들은 자체적으로 이런 비합치 조례들을 파악해 정부에 보고해둔 상태다. 고양시는 친환경 상품 구매 촉진 조례 등 20건의 조례를, 이천시는 학교급식비 지원에 관한 조례 등 7건의 조례를, 구리시는 시 금고 운영에 관한 조례 등 3건의 조례를 비합치 조례에 해당한다고 정부에 보고했다.
이와 관련해 우리 정부는 지난 9월말 장영달 열린우리당 의원에게 보낸 국정감사 자료에서 "우리 측 협정문 초안 내용은 국내 법률 및 지자체 조례와 상충되지 않도록 작성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는 같은 문서에서 "한미 FTA에서의 미국 측 요구사항과 국내 법령 사항 간 상충 여부는 협상이 타결돼 최종 협정문이 확정돼야 정확한 파악이 가능하다"고 밝혀 한미 FTA를 체결하기에 앞서 이 협정과 충돌하는 지자체의 조례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는 임무를 '사실상' 방기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협정문이 국내 법률 및 조례와의 양립이 불가능할 경우의 해결 및 조정에 관한 원칙'을 제시하라는 장영달 의원의 요구에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도는 미국 등 연방국가와는 달리 법률, 명령, 조례, 규칙의 상하위 규범 체계를 갖추고 있어 조례는 상위 법규와 충돌할 수 없고 기존의 법률에 위배되는 경우 상위규범 위반으로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면서 "이런 우리 법체계 하에서는 지방자치단체들이 '법률' 또는 헌법상 법률과 동등한 효력을 갖는 'FTA 등 국제조약'에 상치되지 않는 내용으로 조례를 제정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무효"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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