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반사고의 70% 이상은 하산하는 길에 발생한다고 한다. 힘이 떨어진 데에다 집중력도 등산길만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도 지금 하산길 몸조심을 해야 할 때다. 경계할 것은 금융위기다. 2001년 이후 넘쳐흐르던 국제유동성이 미국, 유럽, 일본 등의 금리인상으로 졸아붙을 기미를 보이자 자금이동이 급류를 타고 있고, 이 와중에 취약한 나라들부터 위기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아이슬란드에 이어 터키도 위기 조짐
최근 터키가 외환위기를 겪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돼 온 터키에서는 5월 초부터 국제 투자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채무불이행(디폴트)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리라화 가치는 4월 말 이후 20% 이상 하락했다. 터키 중앙은행은 화폐가치 하락과 이에 따른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6월에만 기준금리를 4%포인트나 올렸다. 그간 터키에 유입된 국제유동성은 2003년에 1만 포인트대에 머물렀던 이스탄불100 지수를 올해 2월에는 4만8000포인트까지 4배 이상으로 밀어 올렸다. 하지만 주가지수는 다시 3월부터 하강하기 시작해 현재는 2월 말 고점에 비해 30% 이상 낮은 수준이다.
터키는 우리나라와 교역하는 규모가 크지 않아, 터키에 외환위기가 일어나도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터기의 위기가 신흥시장국 전체에 대한 불안감을 확산시키게 될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도 줄기차게 신흥시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자본의 흐름을 한층 가속화할 수 있다. 스위스 은행 UBS의 아시아 수석전략가인 삭티 시바는 지난 주에 "터키의 금리인상으로 신흥시장에 대한 외국인 투자자의 불안감이 커져, 엉뚱하게 아시아 증시까지 유탄을 맞았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북유럽의 소국 아이슬란드가 올 들어 외환위기를 맞았다. 부동산 가격과 주가를 부풀렸던 국제유동성이 방향을 돌려 빠져나간 게 위기의 시작이었다. 이밖에 뉴질랜드, 동구의 헝가리와 루마니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도 경상적자 누적으로 통화가치가 급락하고 있어 우려 섞인 시선을 받고 있다.
금융자유화가 진행된 1980년대 이후 금융위기 발생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세계은행(IBRD)에 따르면 1980년대에 45건, 1990년대에는 63건의 위기가 발생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위기만 해도 1980년대의 남미 위기, 1995년의 멕시코 위기, 1997년의 동아시아, 1998년의 러시아 위기 등이 있다. 세계 금융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금융위기는 일상화하는 모습이다. 부채위기, 은행위기, 외환위기 등 위기의 형태는 다르지만 국경을 부지런히 넘나드는 국제유동성이 환경이 변했을 때 위기를 촉발하는 방아쇠가 되는 게 최근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국제자본 이동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고수익을 좇아 신흥시장국으로 유입된 민간부문 자금은 1년 사이에 23% 늘어난 4910억 달러로 사상최대치를 기록했다. 신흥시장 가운데 지난 2년간 가장 각광을 받아 온 인도 증시는 미국 뮤추얼펀드의 자금이 집중되면서 시장규모가 141%나 성장했다. 러시아 증시도 원자재 관련 주식에 투자가 몰리면서 150% 성장했다. 신흥시장 투자펀드에는 올 들어 5월 초까지 330억 달러가 유입돼, 지난 한 해 동안의 220억 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금이 주식시장에 투자돼 있는 데에다 우량주 편중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 세계은행의 지적이다. 신흥시장의 대표 격인 중국 역시 경제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기업의 불투명한 재무상태와 정부규제의 신뢰성 부족 때문에 위기가 발생할 때의 대처능력에 대해 의문이 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진국들이 금리정책을 전환할 경우 자금이 급속히 이탈하며 자본시장에 위기가 초래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 세계은행의 경고다.
금융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투자자의 리스크 선호도를 보여주는 금리 스프레드(spread)를 고려할 때 현재처럼 스프레드가 좁혀진 시장 상황은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와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아시아 금융위기 직전인 1997년 10월에는 신흥시장국과 선진국 사이의 수익률 스프레드가 3.5%포인트로 좁혀졌으나, 금융위기가 정점에 이르렀던 1998년 9월에는 이 스프레드가 14.91%로 확대되면서 외국자본이 급속히 이탈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금리 인상과 부동산거품 붕괴가 미국경제에 경착륙의 충격을 몰고 올 경우에도 신흥시장은 위기에 노출될 전망이다. 올 초 제2의 플라자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눈길을 끈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IE)는 미국과 중국의 경제가 내리막길을 걷는 가운데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문제가 원만하게 조정되지 않을 경우를 가정해서 신흥시장국 가운데 어느 나라가 금융위기에 가장 취약한지를 분석했다.
이 연구소가 △교역량의 감소 △원자재 수출의 감소 △국제금리의 상승 및 민간자본 유입의 감소 △통화의 고평가 △통화ㆍ재정 정책상의 어려움 등 5가지 파급경로별 영향을 평가한 결과 터키, 베네수엘라, 헝가리,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러시아 등이 고위험군 국가로 분류됐다. 이 연구소는 "세계 GDP의 21%와 12.5%(2004년 기준)를 각각 차지하는 미국과 중국 두 나라의 경제가 침체하고 여기에 미국 경상수지 적자 문제까지 불거진다면, 이는 단순히 경기침체의 문제가 아니라 신흥시장국을 금융위기의 문턱으로 몰아낼 것"이라고 예상했다.
중국은 괜찮을까?
1997년에 아시아는 높은 저축률, 재정의 상대적인 건전성, 저물가, 고성장 등 펀더멘털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지만 외국자본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가 빠져나가면서 금융위기를 겪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부사무총장을 지낸 시게하라 구미하루는 "아시아 금융위기의 교훈은 건전한 거시정책을 가진 경제라 할지라도 통합된 국제자본시장의 새로운 환경 속에서는 갑작스런 신뢰상실의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개별 국가들이 튼튼한 금융시스템을 갖고 있다면 위기를 피할 수 있겠지만 보통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넘치는 자금은 도덕적 해이를 불러와 위기의 규모를 키우는 역할을 한다. 시게하라는 "대규모 자금 유입은 개별 프로젝트에 대한 자본조달을 용이하게 하고 자산가격을 끌어올리게 된다"며 "이는 은행이 엄격한 수익성 심사보다는 담보에 의존하는 경향을 낳고, 건설이나 부동산에 편중된 대출을 낳게 된다"고 말했다.
1997년에 우리가 겪은 위기는 기업의 부채위기가 은행위기로 전이되고 이것이 다시 외환위기로까지 이어진 전형적인 금융위기의 양상이었다. 8년이 지난 지금은 금융권의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이뤄졌고, 감독 시스템도 개선된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2000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이 위기의 제방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할 만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03년 신용카드 위기에서 보듯이 금융위기는 외환위기만은 아니며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바꿔서 올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경제개방과 더불어 성장의 외길을 달려온 중국이 불가피한 '성장통'처럼 금융위기를 맞게 될 경우에는 우리 경제에 닥칠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세계경제의 환절기에 감기에 걸리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bonghyun.lee@reute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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