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필독서로 꼽혀 온 〈해방 전후사의 인식〉(〈해전사〉, 한길사)을 정면으로 겨냥하는 내용으로 보수 언론으로부터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재인식〉, 책세상)에 필자로 참가한 일부 학자들이 연일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노 대통령은 〈해전사〉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고 말한 적 없다"**
이 책의 편집위원장을 맡은 박지향 서울대 교수(서양사학)는 〈재인식〉의 머리말에서 "2004년 초가을 노무현 대통령이 〈해전사〉를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고 언급했다는 소식을 지면을 통해 접하고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로서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책의 구상이 구체화된 것은 그 때"라고 밝혔다. 이런 내용은 언론을 통해 대서특필됐다.
하지만 정작 노무현 대통령은 이같은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청와대는 13일 "2004년 8월 25일 독립유공자 및 유족 초청 오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은 많은 젊은 사람들이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시대적인 흐름 때문에 직접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아무 실천은 못 하지만 가슴 속에 불이 나거나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다 한번씩 한다"고 언급했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재인식〉의 필자로 참여한 이영훈 교수는 총론 격인 첫 번째 논문 '왜 다시 해방 전후사인가'에서 〈해전사〉를 아예 "1980년대 좌파민족주의 진영의 정치학에 충실한 실천적 역사 쓰기"라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해전사〉의 주요 필자들인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과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학)를 겨냥해 강한 비판론을 개진했다.
***이완범 교수 "이영훈 교수는 토론의 예의부터 지켜라"**
이런 상황에 대해 역시 〈재인식〉에 필자로 참여한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정치학)는 13일 CBS라디오 〈뉴스레이다〉와의 인터뷰에서 "학문은 학문일 뿐 정쟁의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며 "〈해전사〉는 좌편향적인 이론이고 〈재인식〉은 우파라는 양분법적인 도식화는 학계 발전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제동을 걸었다.
이완범 교수는 특히 '박지향 교수의 노무현 대통령 관련 언급'을 거론하며 "우리 사회 전체가 좌파적 인식으로 편향돼 있다고 보지 않는다"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역사인식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더 큰 문제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서로 토론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완범 교수는 또 이영훈 교수도 강하게 비판했다. 이 교수는 "이영훈 교수가 강만길 위원장과 최장집 교수의 글을 인용하며 '문제다'라고 비판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며 "그 분들은 그 당시 상황에서 할 이야기를 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완범 교수는 "이제 와서 그때의 맥락을 무시하고 그때의 발언을 끄집어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선학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만약 그 분들과 토론하고 싶으면 그 분들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여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만약 그 분들이 예를 들어 이렇게 몇 글자로 그 분들의 학문적 저작이 거두절미돼 인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상당히 기분이 나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완범 교수는 〈재인식〉이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는 〈해전사〉의 필자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1979년에 대학에 입학해 〈해전사〉 1권을 읽고 자란 이른바 〈해전사〉 세대로서 30년 동안 계속 〈해전사〉를 공부했고 3, 4, 6권에는 글을 싣기도 했다"며 "그런데 이번에 (〈재인식〉 편집위원회에서) 새 책을 낸다고 해서 1990년대 후반에 발표한 글을 수정해서 싣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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