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봄 황우석 교수가 인간 배아를 복제했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들썩거리고 있을 때 내로라하는 인문학자들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이라는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황 교수는 청중의 마음을 뒤흔들며 자신의 연구가 갖는 '사회적 의미'를 역설했다. 인문학자들의 날카로운 균형 잡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인문학자들은 한없이 무기력했다. 심지어 몇몇 인문학자들은 낯 뜨거운 '황우석 찬양'에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다.
이런 에피소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두 문화'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실천을 선도해 온 지식인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모은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고즈윈, 2005)에서 이필렬 방송대 교수(과학사)는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한국 인문학자들의 자연과학 이해 수준은 그들이 인간 배아 복제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논의를 하지 못한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고 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 인문학자들은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인문학이 조언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조언을 제대로 하려면 현재의 인간 삶에 대한 고찰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현대인의 삶이 도처에 존재하는 과학기술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과학기술의 성격에 대한 파악은 인간 삶의 파악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된다. 인문학에서도 과학기술을 조금 멀찍이서 바라보고 그 움직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인문과 사회적 성찰 없는 과학기술은 위험하다**
하지만 이필렬 교수의 외침에는 메아리가 없다. 단적인 예가 있다. 2004년 한 종합 일간지는 과학기술자와 인문학자의 만남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했다. 말 그대로 '두 문화'를 대표하는 최고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다. 생명복제의 최고 권위자,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 유행을 선도한 사회학자, 나노기술의 권위자, 미시사를 도입한 역사학자 등이 마주 앉았다.
하지만 정작 결과물은 해당 신문사 기자들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로 '저질'이었다. 과학기술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연구가 갖는 가능성과 한계를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반면 인문학자들은 최첨단의 과학기술이 도대체 인간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 대신 견강부회와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경탄'만이 남았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런 '성찰 없음'이 초래할 위험은 명백하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의 경고를 들어보자.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윤리는 어떻게 작동해야 할까.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채택하는 과학기술의 추이에 따라 윤리관념도 변해야 할까. (…) 인문사회가 천박해질수록 사람들의 세계관과 윤리관념 속으로 과학기술이 천박하게 침투하고, 그럴수록 위험사회는 가까워진다. (…) 인문과 사회적 성찰 없는 과학기술은 위험하고 과학기술의 규모가 클수록 그 범위는 확장된다. 시간과 공간과 계층을 뛰어넘을 수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성찰' 부재한 인문주의자**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비교적 명확하다. 지금 인문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적' 관심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무관심과 '비판적 성찰'의 부재야말로 극복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그리고 인문주의자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런 개입은 '인문학의 부흥'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르네상스 시대 인문학이 근대 과학기술 발전의 액셀러레이터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인문학이 돌진하는 과학기술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야 할 때다. 이필렬 교수의 지적을 다시 들어보자.
"인문학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만 갖추면 그들의 논의는 매우 풍성해질 수 있다. 원자력과 환경 문제에 대해서 그들도 주도적인 발언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회에 널리 알려진 스타 인문학자가 등장할 수도 있다. (…)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학자는 인간 배아 복제에 대해서, 원자력 발전에 대해서, 기후변화에 대해서 깊은 인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발언하는 인문학자이다. 그래서 유럽 국가에서와 같이 철학자가 원자력발전 검토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신학자가 미래에너지 정책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는 일이 생겨야 하는 것이다. (…) 인문학자들 중에서도 스타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 인문학도 살고 우리 사회도 균형 잡힌 사회가 될 수 있다. 현대 과학기술을 인문학적 지식 속에 녹여서 현실적합성이 있는 활동을 벌이는 인문학 스타의 출현, 너무 지나친 기대일까?"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시민들의 개입 중요해**
제목부터 인문주의자를 겨냥하고 있는 이 책에는 공백이 있다. 인문주의자의 과학기술에 대한 무관심과 비판적 성찰의 부재가 문제인 것처럼 과학기술자의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비판적 성찰의 부재도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실린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송성수 박사의 지적은 깊이 되새길 만하다.
"이제 과학기술자는 연구개발 활동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을 넘어서서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적·윤리적 차원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 우리나라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지위가 다소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마당에,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는 것은 과학기술자에게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 (…)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면 이러한 현상은 그동안 과학기술자들이 사회적 책임이라 할 만한 영역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던 데 기인한다고 풀이할 수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과학기술이 일상생활에 급격히 침투하면서 과학기술에 연루된 사회적 문제가 계속 불거져 나왔지만, 이에 대한 과학기술자 사회의 대응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인문주의자와 과학기술자를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성찰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 시민들이 과학기술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개입할수록 지식인들도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기술 시대에도 민주주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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