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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재판소, '영욕의 50년' 그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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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 최고재판소, '영욕의 50년' 그 이면

[화제의 신간] "보수파의 보루, 배심제로 시대감각 찾아야"

일본의 권위지 마이니치 신문의 전설적인 사법기자 출신으로 명저 <도쿄지검특수부의 내막>을 썼던 야마모토 유지(山本祐司.69)가 이번에는 일본의 대법원인 최고재판소가 오늘날의 위상을 구축하기까지 그 이면사를 집대성했다.

***야마모토 유지가 집대성한 "최고재판소를 통해 본 일본의 역사"**

<일본 최고재판소>(법률문화원 간)은 저자가 집필만 8년에 걸쳐 97년 고단샤(講談社) 출판사를 통해 <최고재판소 이야기(最高裁 物語)>라는 제목의 일본어 판을 내놓았지만, 꼭 8년 뒤 현재 사법연수원 교수로 재직 중인 김용찬 부장판사의 번역을 거쳐 한국어판이 나오게 됐다.

역자는 이 책을 바쁜 업무에도 불구하고 걸쳐 번역에 몰두하게 된 이유에 대해 "전문적인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야마구치 유지가 최고의 사법기자라는 명성답게 소설처럼 단숨에 읽힐 정도로 재미있게 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3년 전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역자는 "이 책이 일본의 최고재판소를 중심으로 한 사법과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주요 내용이지만, 사실 사법과 재판의 역사를 통하여 바라본 '전후(戰後) 일본의 현대사'라는 점을 깨닫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바쁜 업무 중에도 번역까지 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역자는 "대형 서점의 법률학 코너에는 실정법에 대한 해설서 등 이론서나 실무가들을 위한 책들은 많지만 비록 남의 나라 이야기이지만 이처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사법제도의 근본을 파헤치면서도 재미있게 읽히는 책은 드물다"면서 "일본 사법제도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나라의 사법제도까지 깊이있게 이해하게 해주는 도움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수파의 보루, 최고재판소"**

일본 최고재판소는 1947년 8월4일 발족했다. 저자 야마모토 유지는 "이 책이 나온 97년은 최고재판소 탄생 50주년"이라면서 "이 반세기 최고재판소의 역사는 이시다 카즈토(石田和外) 최고재판소 장관 시대를 경계로 '이시다 이전'과 '이시다 이후'로 나뉜다"고 잘라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1969년 제5대 최고재판소 장관에 취임한'이시다 이전'은 인권을 중시하는 리버럴파가 전성시대를 이루기도 했으나 '이시다 이후'에는 이시다 장관이 리버럴파의 보루(최고재판소)를 공략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공의 복지'를 중시하는 보수파로 다져진 최고재판소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또 최고재판소는 '정치에 대해 지나치게 배려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으나 93년 제8대 최고재판소 장관이었던 오카하라 마사오(岡原昌男)가 중의원에서 "기업의 정치헌금은 법률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통렬한 비판을 하면서 정경유착 고리 근절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나아가 저자는 "최고재판소가 그동안 중요사건에서 당당하게 위헌입법심사권을 발동해 대담한 헌법판단으로 시민의 신뢰를 얻었다"고 최고재판소의 권위를 인정했다.

***야마모토 유지, "배심제 도입으로 재판 활력 불어넣어야"**

그러나 저자는 야구치 코이치(矢口洪一) 전 최고재판소 장관의 말을 인용, 배심제의 도입 필요성을 제기했다.

야구치 전 장관은 "재판을 전문가 집단에게 맡기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면서 "구미에서는 사회의 정의는 자신들이 지킨다는 강한 신념이 있는데, 일본에서도 배심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재판 그 자체에 시민이 참가하는 제도이니 재판관의 전제적 관료화는 저지될 것이며, 배심원의 대부분은 직업을 갖고 있으니 오랫동안 붙들어 둘 수는 없기에 재판이 스피디해진다"면서 배심제를 적극 옹호했다.

그는 "최종 판결까지 19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록히드 사건 같은 일도 없어진다"라면서 "12명의 시민이 재판하는 배심제도는 '재판상식'과 '시민감정'이 동떨어지는 일 따위는 일어날 수 없다"며 일본 사법제도의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저자는 "배심을 요구하는 시민 쿠데타에 호응하는 최고재판사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만약 배심제가 실현을 향해 움직인다면, 붕괴되기 시작한 일본은 '사법=재판'을 중심으로 복권(復權)의 언덕을 오르리라"라고 배심제 도입에 강한 기대를 나타냈다.

저자는 "이 반세기, 최고재가 정치와 펼친 어마어마한 드라마를 쫓다 보면, '재판에 시민의 감각을, 하루 빨리 배심제 채용을!'이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그것이 일본을 활기차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현재 배심제와는 다른 참심제(시민이 명예법관으로 참여해 심리.형량 결정에 참여)를 20004년에 도입해 2009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다.

***검찰보다 낮았던 재판관의 위상**

<일본 최고재판소>는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부터 다큐멘터리 소설 형식으로 숨가쁘게 사건이 전개된다. 이 책의 앞부분을 살짝 들춰보면 7백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의 무게가 별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전전(戰前), 재판관의 지위는 낮았다.
현재의 최고재판소장관은 내각총리대신, 중의원의장, 참의원의장과 같은 지위에 있으나, 전전에 재판관의 톱이었던 대심원원장은 사법대신의 지시를 받는 등 대신보다 훨씬 낮은 지위였다.

현재의 사법은 행정(정부), 입법(국회)과 나란히 삼권의 하나로 자리 잡아 지위도 높아졌으나, 사법이 가볍게 여겨졌던 시대에는 지위 역시 낮았던 것이다. 전전의 상황을 도식화하면 사법대신-대심원(현재의 최고재판소)-공소원(현재의 고등재판소)-지방재판소의 삼심제로서, 현재의 최고재판소와 대심원의 차이는 확연한 것이다.

1947년 8월 4일 최고재가 발족되었을 때 최고재에 들어가지 못했던 마지막 대심원판사들이 한 단계 낮아진 '○○고재 판사'로 발령받은 사실을 보더라도, 대심원의 지위가 현재의 최고재에 훨씬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최고재판사는 장관을 포함하여 15명, 이에 반해 대심원판사는 원장 이하 1백20명이라는 다수에 이른다. 그만큼 대심원은 실무적인 분쟁처리기관이라는 성격이 훨씬 강하였고, 사법을 대표하는 것은 대심원원장이 아니라 사법대신이었던 것이다.

재판관에게는 항상 사법대신이라는 무거운 짐이 지워졌을 뿐만 아니라, 재판관들이 억울하게 생각했던 것은 검찰관의 권한이 너무나 막강했다는 것이다. 재판관은 사법성(현재의 법무성)의 관할 하에 있었고, 재판관의 인사・예산까지 검찰관이 쥐고 있었다. 역대 사법대신은 검사총장 등 검찰 고관을 지냈던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재판관이 사법차관을 역임하는 일은 있어도 사법대신이 되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검찰이 사법대신을 차지함으로써 재판을 포함한 방대한 사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각료회의에 참석하여 국정에 참가하는 자를 그렇지 않은 재판관들이 이길 수는 없었다. 당연히 검찰의 인맥은 정계에도 뻗쳤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법권의 독립'을 외치는 것은 재판관의 지위향상 운동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재판관이 무죄판결을 내리는 것은 검찰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기도 했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자와의 싸움은 비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재판관의 지위를 높이고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다는 '사법(재판)의 독립'은 재판관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것이다.
대심원 판사 호소노 쵸료(細野長良)는 사법제도 개혁 추진에 앞장선 인물이다. 그의 개혁방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재판소는 천황 직속의 기관으로 하고 사법성은 폐지한다. 현재의 사법성을 존속시키고자 한다면,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사법대신은 현직의 판검사로부터 임명하지 않는다. 재판소와 검사국의 인사・예산을 분리할 것, 판사의 지위를 검사의 상위에 둘 것. 사가 직무를 집행할 때 지은 죄에 대하여 판사합의체의 기소권을 인정할 것"등 이 문서에는 사법성이 재판관을 지배하는 상황을 뒤엎을 사항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세계열강에 들어가기 위해 근대화를 서두르던 일본 정부는 차례차례 유럽의 사법제도를 도입하고 1875년에는 현재의 최고재에 해당하는 대심원을 설치, 1880년에는 형법, 치죄법(형사소송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모든 법률의 기본이 되는 대일본제국헌법이 발포되었다. 그것은 1889년 2월 11일에 이루어졌으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1조)로 시작되는 제국헌법은 '천황은 신성하며 동시에 침범할 수 없다'(3조), '천황은 나라의 원수이며 통치권을 총람하고.……'(4조)와 같이 천황절대의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세계열강에 끼어들기 위해서 일본의 근간을 확실하게 '군국주의' '제국주의'에 둔 것이다. '사법'에서도 '천황의 재판'을 전면에 내세웠다. 즉 제국헌법 57조에서 '①사법권은 천황의 이름으로 법률에 따라 재판소가 이를 행한다. ②재판소의 구성은 법률로 이를 정한다'고 선언하였고, 이듬해에는 재판소구성법이 제정되었다.

당시 세계에 근대국가로 보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법권의 독립'이 헌법에 보장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58조 2항에 정해진 '재판관은 형법상의 선고 혹은 징계처분에 의한 경우 이외에는 그 직을 면할 수 없다'는 규정이었다.
'천황의 재판'과 '재판관은 죄나 처벌이 없는 이상 면직되지 않는다'는 두 개의 방파제로 군이나 행정 권력의 횡포한 개입을 저지할 수 있을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대원칙을 당당히 행사한 사례는 전전 50년 동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법률에 따른다는 외형을 갖추면서 정부가 재판관들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1925년 추밀고문관 히라누마 키이치로(平沼騏一郞, 검사총장)가 가토 타카아키(加藤高明) 내각에게 치안유지법을 제정하도록 요구하였고, 이 치안유지법이 사회주의자.자유주의자 사냥에 맹위를 떨치게 된 것이다.

검찰・경찰의 임무 중 '불온사상 단속'이 점차 커다란 목표가 되기 시작했다. 특고경찰(특별고등경찰의 약자. 구 경찰제도에서 정치사상 관계를 담당했다)에 의한 처참한 고문. 치안유지법 자체가 절대적인 진압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옥사한 작가 고바야시 타키지(小林多喜二)와 같이 재판관의 손이 닿지 않는 경찰서 내에서 고문당하고 결국 살해당하는 케이스가 적지 않았다. 권력에 의한 범죄를 태연하게 자행하는 관헌에게 '사법권의 독립'에 대한 배려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재판을 믿을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31년 선전포고 없이 시작한 중일전쟁이 수렁에 빠지고, 미국・영국과의 정세는 험악해지고 있었다. 전쟁을 꿈꾸는 지배층은 조금이라도 반발하는 세력에게는 철저한 탄압책으로 대응했고, 이를 위해서 치안유지법은 더없이 좋은 무기가 되었다. 그 1조를 보기만 해도 확실히 사상단속법임을 알 수 있다.
'①국체를 변혁하거나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또는 정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②전항의 미수죄는 이를 벌한다.'

이 법률의 적용 제1호는 교토대학, 도시샤대학 등의 '학련 사건'으로(법률제정 4개월 후) 학생 38명이 기소되었고, 그 후 이 법률은 지도자를 사형, 무기징역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점차 강화되었다. 즉 1928년 6월 29일의 칙령으로 다음과 같이 개정된 것이다.
'국체를 변혁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 또는 결사의 간부 그 외 지도자 임무에 종사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 혹은 5년 이상의 징역 혹은 금고에 처한다……'고 되었다.

긴급칙령으로 법률에 사형, 무기징역(또는 금고)까지 처하도록 정한 것은 일본에서도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중의원에서 일부 야당이 반대했으나 정부가 이를 일축하였고, 사회의 질식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이를 재판관측에서 보자면 '악법도 법이다'라고 할 수 있으나, 치안당국은 재판관도 용서하지 않았다.

치안유지법을 전면 이용하여 '적화판사(赤化判事) 사건' '노농변호사단(勞農辯護士團) 사건'을 잇따라 적발하여 법률의 전문가를 철창에 가둔 것이다. 모두 1933년에 일어난 일이다.

정치권력에 반대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국가에 대한 범죄가 성립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번에는 또 "사리사욕에 눈멀어 국민을 돌보지 않는 정치가나 재계인들로부터 정치를 되찾고 국가를 올바르게 혁신시켜야 한다"는 취지로 검찰의 '쿠데타'가 있었다 .

1934년 4월 5일 오전 9시, 도쿄지재 검사국은 제국인견사, 타이완은행에 대한 일제수사를 감행했다. 재계인사들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 혹독한 것이었다. 검사들은 고문까지 자행하며 체포자들에 대해 다른 체포자에게 자백을 권하도록 '자백권고서'를 쓰게 했고, 이를 취조에 이용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타이완은행으로부터 제국인견사 주식을 4백주 받았습니다만, 그 중 100주는 다카하시 코레키요 대장성대신의 자녀분께 건네주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제가 벌을 받아도 상관없으나, 다카하시 대장성대신께 피해를 주는 것은……"이라는 허위 내용의 탄원서를, 대장성 차관인 쿠로다를 몰아세워 억지로 쓰게 했다.

게다가 고야마 마츠키치(小山松吉) 사법대신이 각의에 들어가 "현직 대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폭로하자 사이토 마코토 내각은 붕괴했다. 검찰 수사로 내각이 쓰러진 것은 1914년 지멘스 사건(군함 구입 등에 관련된 오직사건)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검찰파쇼' 무너뜨린 '이시다 판결'**

이 무시무시한 검찰의 의도에 대해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로 활약한 거물 변호사 이와타 츄조가 피고인들의 변호를 담당했다. 이와타 등의 등장으로 '제국인견 사건'은 국회에도 제기되었으며 수사의 한계를 넘어선 '인권유린' '검찰파쇼'라는 비판이 일게 되었다. 재계인에 대한 고문도 처음 있는 일이거니와, '검찰파쇼'라는 매도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판결은 1937년 12월 16일 엄중한 경계 하에 내려졌으나 16명의 피고인은 전원 무죄. 재판장은 혈맹단 사건을 다루었던 온후한 후지이 고이치로(藤井五一郞)였고 판결문은 주임배석판사 이시다 카즈토(石田和外, 후의 최고재장관)가 썼다. 군부・우익의 움직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판결이었으나, 이시다는 '사건은 공중누각, 모두 꾸며낸 일'이라고 단정했다.

제국인견사 주식 매매에 관하여 타이완은행장 시마다가 특별배임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기소되었으나, 상행위로서의 주식 매매가 있었을 뿐 범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치가・관료의 뇌물수수도, 이시다 판사의 말을 빌리자면 "뇌물에 사용되었다고 하는 제국인견사 주식 1,300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933년 6월 19일 이래 부국징병보험회사의 지하 대금고 속에 계속 들어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제국인견사 주식을 뇌물로 쓸 수 있었겠는가?"라는 논리가 된다. 제국인견 사건이 검사들이 만들어낸 '공중누각'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시다는 판결문 속에서 '수중(水中)의 월영(月影)을 잡듯이'라는 명문구를 남기고 있다. 물에 비친 달을 잡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정경유착 의혹 수사에 대해 돈의 수수 여부에 관하여 법률해석이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되는 케이스는 있었어도, '사실무근, 공중누각'이라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일로 피고인들은 고통을 강요당했으며 내각까지 붕괴되었다. 피고인들의 원한 맺힌 '검찰파쇼'라는 요란한 대합창 속에서, 수사부 검사는 할 말도 없었고 항소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검찰의 입증을 철저하게 깨부순 이시다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도쿄지재에 이시다라는 경골한(硬骨漢)이 있다"는 평판이 퍼졌다. 이리하여 검찰의 불온한 의도는 후지이 고이치로 재판장, 주임인 이시다 카즈토 배석판사 등에 의해 보기 좋게 저지되었다.

그러나 권위를 상실한 검찰의 공백을 메운 것은 재판소가 아니라 역시 거대한 권력, 즉 군부였다. 파시즘은 확립되었고 전체주의가 사회를 덮었다. 1940년 재판관으로부터 사법차관이 된 미야케 마사타로(三宅正太郞)는 다음과 같은 엄격한 말을 후배 재판관들에게 남기고 있다.
"법 해석이 세론에 휩쓸리면 매우 위험하다. 지금이야말로 법률을 법률로서 제대로 지키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때다."

1945년 패전 후 사법성 안에도 GHQ(연합국군 최고사령부)의 미국 군인이 들어와 있었다.
사법대신 이와타가 우선 손을 댄 것은 '사법권의 독립'을 위해 검사.판사의 지위를 일시 정지시키는 것이었다. 뒤이어 대심원원장, 검사총장의 경질이 예정되었는데, 그때 호소노 쵸료 히로시마공소원 원장이 은퇴한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사법개혁을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까지 각오하던 쵸노 도쿄공소원 판사는 이와타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대심원원장이 바뀐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임에 호소노씨 외에 다른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도죠 군부정권에 위험을 각오하고 항의한 사람은 호소노씨 한 사람입니다. 대심원원장을 비롯하여 재판소 고관들은 보고도 못 본 체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자신의 입신을 위해 모른 척 하는 사람들뿐입니다. 개중에는 강한 자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사법성까지 가서 호소노씨에게 들으라는 듯이 비판한 고관까지 있어 비겁했습니다. 이게 비상시 재판소를 대표하는 고관들의 실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시세가 바뀌면 패전이라는 북새통을 틈타 자기야말로 민권을 지키며 군권에 저항한 제1인자와 같은 얼굴을 하고 판칠 게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변호사 역시 전시 하에 민권을 옹호하지도 않았고 변호사로서의 사명을 돌아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기야말로 민주주의자라는 얼굴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법부에 몰려들어 보수관료와 손을 잡게 된다면 앞으로 막을 열게 될 '사법권의 독립'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역사적 중책을 짊어질 대심원원장은 호소노씨 외에는 그 누구도 있을 수 없습니다. 비교하려 해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와타는 쵸노의 진정이 계속되는 약 15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이와타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할 뿐이었다.

전후 미 군정 하에서 만들어진 신헌법에는 최고재 판사는 내각이 임명하나 최고재장관만은 내각총리대신과 마찬가지로 천황이 임명하도록 지위가 끌어올려졌다(6조).
이것으로 두 지위는 완전히 동격이 되었다. 전전부터 현직 재판관인 호소노, 쵸노 등 많은 재판관들이 필사적인 노력으로 전개했던 '사법권의 독립'은 문자상으로는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호소노는 "군에 저항한 사람은 나 한 사람이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라고 정면에서 따지면서, 호소노의 금욕적인 사고방식과 용감한 행동에 경의를 품었던 중간층 재판관들도 급속도로 멀어져 갔다.

사법계 사정에 밝은 평론가 야마부키 시로(山吹司郞)는 말한다. "호소노는 지휘자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으나,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스스로 카리스마를 잃고 말았다."
호소노는 자기편이라 믿었던 하급재판관도 적으로 돌아서 버렸다는 충격을 감추면서 필사적으로 견뎠다.

호소노는 패배를 거듭했다. 호소노의 제안은 모조리 거절당했다. 그리고 호소노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고재 판사를 선출하는 자문위원 전원이 각기 최고 재판사에 최적이라고 생각되는 후보자 30명의 리스트를 제출하기로 미리 짰던 것이다.

호소노에게 '신임표'를 던진 사람은 호소노 본인과 도쿄대학 총장 남바라 시게루 단 2명이고 나머지는 불신임으로 돌아섰으니 대참패라 할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최고재판사 후보를 뽑는 자문위원 스스로가 최고재판사 후보가 되도록 사전공작을 폈다는 사실이다. 자문위원이란 심판인데 그 입장을 이용하여 선수가 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서민들로부터 통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대량으로 와르르' 쏟아졌으니, 그들은 우선 자기 자신의 입신을 생각하는 성질의 인간이었다는 점을 증명한다. 심판에서 선수로 전환한 반호소노파 자문위원 변호사 즈카자키, 하세가와, 마노 세 사람은 스에가와 히로시 등과 함께 가장 많은 10표, 또한 호소노가 이름을 대고 비난 연설을 퍼부은 재판관 시마 타모츠, 후지타 하치로, 이와마츠 사부로도 모두 9표를 거두어 당선되었다.

호소노라는 단 한 사람의 정의파를 미워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뭇매질을 하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사법성・변호사 그룹 위원은 냉혹하게도 끝까지 호소노를 몰아붙였다.

어쨌든 1947년 '사법(재판)의 독립'을 내걸고 최고재를 정점으로 하는 전국의 재판소가 사법성의 관할에서 떨어져 나오자, 인사.예산 등 이관되는 권한이 방대하였고 신설되는 사무국(곧 사무총국으로 개칭)이 이를 장악하게 되었다.

***재판관 아사(餓死) 사건**

그러나 최고재판소가 발족한 직후인 1947년 10월 11일, 도쿄지재 판사 야마구치 요시타다(山口良忠)가 처와 어린 두 자식을 남기고 굶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재판관, 검찰관 일반을 고발하는 유서가 발견된 것이 한층 충격을 더했다. 배급되는 대용식이나 항상 늦게 배급되는 식량에만 의존해서는 '아사'하고 만다는 사실을, 야마구치는 자신의 목숨으로 실증했다.

야마구치 아사 사건의 진정한 원인은, 쌀과 같은 식량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상황 속에서 비록 돈이 있어도 사서는 안된다고 금지하는 법률에 있다. 그러면 '살아있는 국민 전부가 법률을 어기고 암거래 물자를 입수했다는 게 되지 않느냐'라는 논리가 성립되어 충격은 사회 전체로 퍼졌다.

여기에 '죽음'을 예감한 야마구치의 일기가 있다.

"식량관리법은 악법이다. 그러나 법률인 이상 국민은 절대로 이에 복종해야 한다. 나는 아무리 괴로워도 암거래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 따라서 이를 범한 자는 단호히 처단해야 한다. 나는 평소 소크라테스가 악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법률에 따라 깨끗이 형에 복종한 정신에 탄복했었다. 오늘날 법치국가 국민에게는 특히 그 정신이 필요하다. 나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나 식량관리법 하에서 기꺼이 아사할 생각이다. 암거래와 유연히 싸우다 죽겠다. 매일의 내 생활은 정말 죽음에의 행진이다. 판검사 중에 몰래 암거래를 하면서도 시치미를 뗀 채 법정에 나오는 자가 있는데, 나만은 이처럼 결백한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병고를 완전히 잊고 후련해진다."

야마구치의 아사는 심각한 의미를 지녔다. 이 사건의 근저에는 '죽음'이냐 아니면 '법률위반'이냐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아무리 정의를 입에 담더라도 무대 뒤에서 암거래 쌀을 탐욕스럽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 고상한 정의는 붕괴된다. 그리고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국민의 신뢰' '정의' '양심' 따위의 말을 진심으로 쓰고 있는 재판관들이다.
'아사'란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큰 '식욕'을 끊는 일이다.

이 사건은 일본의 재판관들에게 법과 현실에 대한 깊은 고뇌를 던졌다.

이처럼 <일본 최고재판소>에는 전전(戰前)의 일본 재판소가 처했던 열악한 상황과 이를 극복하여 사법의 독립을 확립하려는 몸부림들이 가득 담겨앴다.

종전 후 연합국군 최고사령부의 점령 하에 탄생한 신헌법과 최고재판소가 겪어야 했던 좌절과 음모, 최고재판소 여명기에 있었던 재판관들의 노력과 정치인들과의 갈등 그리고 재판관 아사(餓死) 사건의 고뇌는 태평양 전후에 벌어진 사건들이다.

이어 일본 독립의 해인 1952년을 전후로 하여 발생했던 공안사건들 그리고 이에 드리워진 권력의 모략, 여론과 재판소의 갈등, 소위 '도쿄중앙우편국 사건'.'도쿄도 교조 사건' 재판 등으로 상징되는 최고재판소의 리버럴 전성시대, 보수 정치인의 음모에 의한 리버럴 재판관들의 축출, '도쿄대학 야스다강당 점거 사건'으로 상징되는 스튜던트 파워와 이를 뒤이은 '황폐한 법정', 리버럴 사법을 제압하려는 보수 자민당 정권의 움직임, 최고재판소 자신에 의한 '내부숙청'이라 일컬어지는 청년법률가협회 문제 등의 사건들이 이 책에 펼쳐진다.

***최고재판소 '두 개의 얼굴론'**

또 '이타이이타이 병' 등으로 상징되는 공해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빛나는 역전의 발상', '운명의 갈림길'이라 불리는 '전농림경직법 사건' 이후의 최고재판소 리버럴파의 조락(凋落), '사상이 얽혀 있는 공안・노동사건에는 엄격하고, 일반사건에서는 인권을 중시하여 대담하게 판결한다'는 소위 '최고재판소, 두 개의 얼굴'론, '연합적군'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그리고 이에 뒤이은 '일본적군'의 인질사건에 따른 소위 '초법규적 조치', 보수 최고재판소와 보수 자민당 정권이 대립하게 되는 '중의원선거구 정수(定數) 소송' 등의 전후 달라진 현실 속에 최고재판소의 고민 끝에 만들어내는 판례들이 소개됐다.

특히 록키드 사건 등으로 상징되는 정치인과 관료의 오직(汚職), 타락한 재판관으로 고민하는 최고재판소, '백년에 한 번'이라는 대소송 '오사카공항 소송'의 반전, 재판소의 '사법소극주의'와 '겸양의 미학'을 둘러싼 갈등, '변혁의 격류' 속에 횡행하는 관료의 퇴폐와 오움진리교 사건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최고재판소 장관.판사 그리고 많은 재판관들의 성격.풍모와 처신, 최고재판소 내부의 사무총국, 최고재 조사관, 사법연수소 이야기 등도 흥미진진하다.

역자 김용찬 판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인간을 판단한다는 재판의 중요성과 그 책임의 막중함에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고, 규율과 배려・이상과 현실.목적과 수단.국가와 개인.인권과 공익.신속과 적정.재판과 여론.사법과 정치.독립과 조화.개인으로서의 양심과 재판관으로서의 양심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간사의 갈등과 충돌에 다시 한 번 옷깃을 추수르게 됏다"면서 "일본의 사법 현실에서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슷한 상황과 문제의식을 발견하게 됐다"고 술회하고 있다.

역자는 또 "9년 전 일본에 연수를 갔을 때에 일본 공법 분야의 많은 판례를 접하다 보면 왠지 그 이론 구성이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던 기억이 있다"면서 "이 책을 통하여 일본 최고재판소의 흐름과 분위기(예컨대 '최고재판소, 두 개의 얼굴'론 등)를 알게 됨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판례가 생성될 수 밖에 없었던 토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제는 우리가 외국의 법제도를 도입하고 학설.판례를 소개함에 있어서는 단순히 그 제도 등을 알리는 것 이외에도 그 제도 등이 생겨난 토양(그 나라의 사회적.문화적.정치적 환경 등)도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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