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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국가주의의 잔재 청산해야

[화제의 신간] 작가 송기숙의 민중.민주.인권 이야기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을 맞아 지난 1994년 전12권의 대하장편소설 <녹두장군>을 펴냈던 민족문학작가 송기숙(70) 선생이 문단 데뷔 40주년과 고희를 기념해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화남 간)이라는 산문집을 냈다.

'우리의 교육지표사건'(1978)과 광주민주화운동(1980)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그는 작가로서 행복했다. 고 이문구 선생은 생전에 그를 지칭해 "국가가 보호해야 할 인간천연기념물"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냈고, 문학평론가 백낙청 선생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해학, 재치 있는 비유를 통해 분단문제에 깊이 천착해온 작가" 라고 높게 평가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은 "그의 글은 사람됨에서 우러나온 인간적 경험의 진실한 반영이며, 하늘이 만들어준 그대로의 바탕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 작가"로, 문학평론가 정호웅은 "민중언어의 가장 풍성하고 자유자재한 탐구자이자, 주변부의 언어로 스스로 중심이 되는 한 세계를 일군 대표적 작가"라 평가했다.

이 책은 그가 작가로서 마지막 호사를 누리는 잔치이기도 하다. 출판사의 권유로 과거에 쓴 산문들 중 오늘날에도 생생한 의미를 전해주는 것들을 고르고 다시 가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묶고 생전 처음으로 기자간담회까지 가졌다.

***소작료를 절반으로 내린 '최대사건', 암태도 소작쟁의**

이번 산문집에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그 연장선으로 이어진 근대화 과정에서 파괴된 공동체 정신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짙게 깔려있다.수록된 4부 18편의 산문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 '나'와 나와 똑같은 타자인 '너'가 모인 '우리'라는 공동체가 어떻게 파괴돼 갔으며 지금도 왜곡된 채 알려진 '그때 그 시절'의 실상을 '현장 취재'로 생상하게 전해준다.

작가는 우선 책의 제목이 된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에서 농민들의 노조 역할을 했던 두레조직의 비극을 전했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할 때 경제적으로 가장 눈독을 들인 게 농업수탈이었다. 총독부는 농촌을 수탈하며 수탈에 장애가 되는 두레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두레의 저항이 두려워서 그랬던지 법으로 해체하지 않고 간접적인 방법을 썼다. 양조법을 제정하여 막걸리를 비롯한 과일주 등 술 제조를 일절 금하고, 풍물 치는 걸 금했으며 소작기간을 1년으로 단축했다.

결정타는 소작지의 소작기간을 1년으로 줄인 것이었다. 그 전에는 비록 소작이라 하더라고 경작권은 영소작이나 마찬가지로 안정되어 있었는데, 소작기간을 1년으로 못박아 버리자 악덕지주와 마름들은 대번에 콧대가 올라갔다. 농사를 잘못 지었다는 핑계로 소작을 떼어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로 치면 비정규직화가 단행된 것이다.

그때부터 1년 농사짓고 나면 소작인들은 지주 눈치 보며 닭 꾸러미와 떡시루가 지주와 마름 대문간에 줄을 섰다. 소작을 옮겨도 땅떵어리를 옮기는 게 아니고, 소작인을 그 동네 사람으로 갈아 치웠기 때문에 여태 손발 맞춰 모 심고 논매며 이웃사촌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고 말았다. 일제가 노린대로 소작료는 7~8할로 치솟아 농촌경제와 농촌사회는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가만이 앉아서 덕을 본 사람들은 한국 지주들이었다. 일본의 그런 정책은 한국의 지주와 농민을 적대 관계로 대립시켜 한국 전체의 항일 에너지를 약화시키자는 분열정책과도 맞물려 있었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그 분노가 1924년부터 소작쟁의로 폭발한다. 대표적인 곳이 신안군 암태도 농민들이었다. 아사동맹(단식농성)까지 하며 투쟁한 끝에 총독부는 암태도 지주한테 소작인들의 요구대로 소작료를 4할로 내리라고 했다.그 뒤로부터 육지에서는 소작쟁의 흉내만 내도 지주들이 발발 떨고 소작료를 4할로 내렸다. 그러니까 총독부의 개입은 단순히 암태도 한 사건에 대한 개입이 아니라, 일본의 농업 수탈 정책 자체를 포기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전국적으로 소작지 소출의 3, 4할 포기한 것이므로 그것은 3.1운동의 성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민족종교 보천교 뜯어다가 조계사 짓기도**

신흥종교도 마찬가지였다. 농민전쟁이 실패한 뒤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기 시작한 보천교와 증산교를 비롯한 수많은 신흥종교들은 거의가 미륵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의식과 저항의식이 그만큼 강했다.

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수많은 선각자들이 나름대로 민족을 건질 사상을 펼치고 싶었지만, 적당한 매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사상을 종교 형태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종교의 교주에 앞서 이 세상을 건지려는 경세가들이었다.

보천교 교주 차경석은 농민전쟁 때 정읍 농민군 대장 격인 정읍 접주 차치구의 아들이며, 증산교 교주 강증산도 정읍 출신이다. 이런 종교들이 농민전쟁의 중심지였던 정읍을 중심으로 전라북도 일대에서 나타났다. 그 신도들도 거의 농민들이었다.

일제는 그 기세에 눌려 신문을 이용해 이들 종교들을 '종교의 탈을 쓰고 백성들 돈을 울궈 내려는 사기꾼'으로 모는 등 터무니 없는 루머를 수없이 조작하여 퍼뜨렸다.

지금 서울 인사동 조계사는 정읍 대흥리에 있던 보천교 본부를 뜯어다가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불교를 탄압하여 사대문 안에 절을 짓지 못하게 했지만, 일제는 신흥종교는 탄압하면서 불교는 껴안았던 것이다. 그 건물의 규모만 보더라도 당시 보천교의 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흥종교도 그렇지만 소작쟁의에 승리했던 농민들 사정도 거의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1929년 세계적인 공황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사회주의 물결이 일본 본토는 물론 식민지 한국을 뒤덮자 일제는 다시 소작법을 개정하고 강압통치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작가는 "두레가 마을 단위의 조직에 머물지 않고, 면 단위나 군 단위로 연대했더라면 더 높은 차원에서 사회개혁을 하지 않았겠느냐"면서 "두레가 면 단위 군 단위를 넘어 국가 단위로 뭉쳤다면 엄청난 정치조직이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국민교육헌장'으로 국가주의 내면화시킨 박정희**

<붉은악마와 국가주의 시비>에서는 '국가주의'에 대한 작가의 혐오감이 강하게 드러난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들이 주축이 되어 붉은 셔츠를 입고 한 덩어리 한 목소리로 '대~한 민국'을 외쳤다. 자발적으로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했던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문화현상은 아무리 단순한 것도 뿌리가 있는 법"이라면서 "일제시대부터 박정희 정권을 거쳐 그 뒤까지 교육이나 정치가 내내 철저한 국가주의였고, 둘재는 그나마 교육방법이 주입식이어서 국가주의가 우리 의식 속에 깊숙이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작가는 "자발적이라는 점이 더 문제"라고 주장한다.

국가주의 교육과 정치를 우리 국민들에게게 내면화시킨 사람이 바로 박정희다. 박정희 정권이 개정하기 전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 첫 문장은 '나,너, 우리, 우리나라,대한민국'이었다.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이념을 극명하게 표현한 내용이다.

박 정권은 이 첫 문장을 '하늘, 파란 하늘, 파란 하늘에 태극기'로 바꾸었다. 개정 교과서 첫 문장은 전시체제의 일본 군국주의 1학년 교과서 첫 문장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에 있는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라는 구절도 국가주의 이념을 극명하게 표현한 구절로 위에 든 개정 교과서 첫 문장을 구체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이 구절이 민주주의, 곧 개인주의 이념이 되려면 '나의 발전이 나라 융성의 근본임을 깨달아'라고 해야 한다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또 헌장에는 '나라' '국가' '애국' '조국' 등 국가를 가리키는 말은 네 번이나 나오지만 '나'는 딱 한 번 나오는데, 그마저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이라고 국가에 예속시키고 있다. 또한 '협력' '협동' '상부상조' 등 단결을 표현한 말은 세 번이나 나오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인권'과 '사회정의' 같은 말은 한 마디도 없다.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자는 구절도 요상하다. 기능주의를 숭상하여 '능률과 실질'을 '중시'하자는 것도 아니고 '숭상'하자고 최고 가치로 내세워 가치관을 뒤집고 있다.숭상이라는 말을 쓰려면 그 대상이 '인권'이나 '사회정의' 정도여야 한다. 이런 가치에 대한 강조 없이 능률과 실질을 '숭상'할 경우, 가장 능률적(기능적)이고 실질적(실속 있는)인 돈벌이는 도둑질이다.

지금 교육정책의 현안 문제는 교과서의 국정.검인정 제도이다. 교과서의 획일적인 내용으로는 당장 급변하고 있는 새 시대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아예 국정이나 검인정 제도 자체가 없다.

지금 전교조 교과연합 교사들이 국정교과서 제도의 위헌성을 들어 소송을 준비중이다. 이런 일은 교사의 요구를 기다릴 것이 없이 정부가 할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지금까지 국민교육헌장도 그대로 두고 있다. 몇 년 전까지도 어느 단체든가 그 헌장 공포일인 12월5일에 기념행사를 할 지경이다.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한 권위주의적 통치의 잔재는 교육에 지금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남아있다. 교장의 성향에 따라 아직도 초등학교에는 애국조회를 하는 학교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애국 애국'이 아니라 '인권 인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작가는 간담회에서 '국민교육헌장'과의 악연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때가 어떤 시절이었느냐. 3성장군 출신의 도지사가 도열한 휘하 공무원의 옆구리를 지휘봉으로 찔러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게 하고는 제대로 못 외우는 사람을 진급에서 누락시키던 시절이었잖아.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닌 거야. 그래서 나와 동료교수 10명이 주도해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서를 발표했지. 그게 바로 박정희 유신독재의 이념적 심장이라 할 국민교육헌장을 정면에서 반박한 거거든. 김재규 말처럼 유신의 심장을 쏜 거지. 성명을 발표한 교수 전원이 중앙정보부로 연행돼 고초를 치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교수님들은 죄가 없다, 즉각 석방하라'고 외친 학생들까지 50여명이나 구속이 됐으니까. 나도 그 일 때문에 '긴급조치9호 위반'이라는 죄명을 쓰고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

작가에 따르면 박정희 씨의 새마을 운동은 국가주의 정책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새마을이라는 허상을 내세워 농민들을 그 허상 속에 묶어 놓고 농촌을 수탈하여 이른바 중흥의역점이던 공업화를 가속시키는 정책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추곡 수매가격을 정부가 매년 새로 책정하는 곡가 정책이었다. 지금은 거꾸로 정부의 부담이 되었지만 그때 수매 가격은 지대를 빼고도 생산비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저곡가 정책은 공장노동자들의 생계비 압박을 덜어 저임금의 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도시로 올라가 도시빈민으로 떠돌며 공장 문을 기웃거리게 만들어 공업부문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이처럼 새마을운동은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하고 정말 잘 살 것 같은 헛꿈만 부풀려 놓고 실제로는 농촌을 공업화의 희생물로 농촌의 피폐화를 가속시켰다.

우리 내부에 남아있는 박정희 국가주의를 청산해야 한다는 게 작가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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