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12일 “우리 국민 중에는 미국에 대해 ‘NO’라고 말하면 안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며 “미국과 한국의 동북아 평화개념은 다를 수 있으며 대미 패배주의적 관점을 극복하고 설득하면 된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현재 북한은 개혁개방의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정리, 정돈의 시기’를 맞고 있고 이것이 마무리되면 다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분석하고 “북한과는 상호의존성을 더 높여야 하며 남북대화에 힘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남북관계, 재임기간동안 '삼면애로'"**
정세현 전 장관은 이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제10회 평화나눔센터(소장 : 최대석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정책포럼에서 “2004년 남북관계, 회고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하며 “재임시절 남북관계는 삼면애로(三面隘路)를 겪었다”고 운을 뗐다.
2002년 1월부터 2004년 6월까지 통일부 장관을 역임, DJ 정부와 노무현 정부 대북정책에 모두 관여해 왔던 정 전 장관은 미국의 대북강경정책, 북한의 남한에 대한 높아진 기대감, 안보불안심리 등 국내 문제를 남북관계에서의 ‘세 가지 어려움’으로 꼽았다.
그는 “부시 대통령 집권 이후 강경해진 미국의 대북정책으로 한-미, 남-북 관계를 조절하기가 어려웠다”며 “미국의 그러한 정책으로 인해 남북관계에 대한 한-미간 견해차는 시간이 갈수록 심화됐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우리 국내 분위기는 그렇지 않은데도 북한이 남한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대수준은 시간이 갈수록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으로서는 노무현 정부에 386 등 젊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이 들어갔으니 DJ 정부 시절보다 잘 해줄 것이라 생각한 듯 하다”며 “그러나 국내에서는 북한도 우리의 지원만큼이나 협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남북관계를 무턱대고 개선해선 안보에 도움이 안된다는 안보불안심리, 남북관계 호전 자체를 한미관계 중시 않는 반증이라 주장하는 일종의 흑백논리 등 국내 내부 문제도 남북문제를 어렵게 했던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국내 보수적 대북관이 개혁정책 및 정치 편가르기와 연계되며 더 어려운 정책환경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美에 ‘NO’라 말 못하는 사람 많아, 대미 패배주의적 관점 극복해야”**
정 전 장관은 이번 포럼에서 “우리 사회는 미국에 대해 일종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며 “미국에 대한 패배주의적 관점을 극복하고 설득하면 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우리는 미국에 대해 'NO'라고 말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지도급 인사 가운데 그러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데 때로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었다”며 “NO라고 말하는 것이 반미는 아니며 사안에 따라 비판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미국과 한국의 동북아 평화개념이 다를 수 있다”며 “우리가 사는 곳인데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와 대북인권법 등에서 미국에 끌려다닐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50년 동맹국가인 미국에게 희망사항이 있으면 말하면 되고 미국도 한국을 존중해줄 준비가 돼 있다고 생각한다”며 “개성공단에 대해서도 미국은 처음에는 꺼려하는 분위기였지만 우리가 하자고 주장해서 하게 된 것”이라고 실례를 들어 설명했다.
“개성공단은 우리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북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구체적인 손익 액수를 제시하면서 설득했다”며 “공단사업은 북한에 돈을 퍼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북한에 개혁개방하는 학습장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개성은 중국의 ‘심천 모델’이며 ‘상해 모델’을 배우기 위한 초석”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핵문제도 마찬가지”라며 2002년 불거진 제2 북핵위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당시 남북관계를 일시 접어두고 핵문제 해결을 먼저 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병행전략을 채택했다”며 “이는 93년 핵문제 당시 YS의 ‘핵 가진자와 악수할 수 없다’는 발언이 북한의 ‘통미봉남’을 불러왔던 아픈 기억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남-북 상호의존성 더 높여야”, “北, 현재 ‘정리정돈’ 시기”**
정 전 장관은 현재의 남북관계에 대해서는 “일부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남북교류인원과 북한 교역 총액에서 우리 교역액이 4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교역국이 되는 등 상호의존성이 상당히 높아졌다”면서 “상호의존성은 더욱 높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부 ‘퍼주기’ 비판자들이 독일사례를 거론하며 철저한 상호주의를 주장하는 데 대해 “서독도 처음에는 조건 없이 동독에 제공했으며 오히려 더 주겠다고 까지 제안했었다”며 “동독이 서독의 지원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때부터 조건을 붙이기 시작했다”고 반박했다. “일종의 ‘레버리지’(영향력)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또 ‘북-중간 경제적 친화성’이 강화되는 현상에 대해서는 “북한도 투자 부문에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며 “중국이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남북간 상호의존성이 커지는 것에 대한 경계보다는 동북3성의 경제 안정과 발전을 위한 측면이 강하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러나 “북핵문제가 해결되면 일본 자본이 대규모로 북한에 유치될 것”이라고 경계하고 “북한은 우리가 겪고 있는 무역역조를 경계해야 하며 우리는 선점을 위해서도 지금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현재 북한이 문을 걸고 대외관계에 소극적인 이유로는 조문파동, 탈북자 문제, 북한인권법, 북핵6자회담과 대선 이후 미국 변화 관망 등을 꼽으면서도 “북한은 현재 '정리 정돈의 시기'를 맞이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중국은 개혁개방 10년 만인 89년 천안문 사태를 계기로 개혁개방으로 인한 부작용을 걷어내기 위한 3년간의 정리정돈 기간을 거쳤고 베트남도 마찬가지”라며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개방으로 들어선 나라는 이러한 기간을 모두 거쳤으며 북한에도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2년만에 올해 7월부터 내부 단속과 정리정돈 시기가 찾아온 것”이라고 평가했다.
***“특사 파견으로 남북대화 나서야”**
그는 향후 전망에 대해서는 그러나 “북한의 정리정돈 기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며 “정리정돈 이후에는 개혁개방에 더 속도를 낼 가능성도 있고 ‘U턴’ 하는 역행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핵문제에 있어서도 “북한이 현재 ‘악의’로 6자회담에 참가 안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내각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기에 미국 정책 방향을 보고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이 상황에서 한국은 “남북대화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특사 파견을 거론하고 “지금 필요로 하는 특사는 중재자급 거물 특사가 아니라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아는 communicator(전달자)급 특사”라며 “북한에 대해 현 국제정세를 폭넓게 설명해주고 기대수준을 조절하도록 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남북간 대화와 ‘물꼬트기’가 이뤄진다면 그는 “남북대화가 6자회담을 따라가는, 미국이 일을 추진하고 우리가 그 뒤에 서있는 모양새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우리가 이런 역할을 해내야 미국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우리의 위상과 입지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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