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민주주의자'이고 싶은가**
국가보안법의 존폐를 둘러싼 '논쟁'이 증폭되고 있지만, 이 논쟁은 양식 있는 사람들의 진을 완전히 뺄 모양이다. 팽팽한 긴장은 거리에서, 제도 정치권에서 지속된다. 찬성하는 편에서는 양심, 사상의 자유 등이 불가침의 인권이라는 점과 지금이 남북화해의 시대임을 내세우며 폐지를 주장하는 반면, 반대하는 편에서는 '국가정체성'과 북한의 적화야욕 등에 따른 국가안위를 제기하며 장외투쟁도 불사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있다. 아니 으름장은 백주에 식칼을 동원하여 자해 등을 하는 장외투쟁으로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성속의 삶'을 넘나드는 가톨릭계의 전추기경과 불교계의 '큰스님'도 반대의 입장에 가세하여 상황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광경의 뒤에는 과거 군부파시스트체제가 이 사회에 드리운 죽음의 긴 그림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어른거리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모두는 민주주의의 수호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자신들의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상이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들은 진정 민주주의자들인가?
이 지점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다시 언급하는 것은 그 동안 비판의 초점이 되어 왔던 법조문의 존폐를 새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법이 사회관계들의 응집된 표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국가보안법의 폐지 여부가 지금 이 사회의 핵심 이슈가 되었다는 것은 법조문의 폐지를 넘어 이미 사회적으로 큰 변화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조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과거와 같은 억압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질서를 묵인, 용인하지 않겠다는, 그것을 넘어 나아가겠다는 하나의 의미 있는 움직임의 징표이다.
이승만정권이 자신의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냈으며 진보당의 대통령후보였던 조봉암을 사형시킬 수 있었던 것, 70년대 박정희 유신체제가 인혁당 관련자들에 가한 사법사상 초유의 '학살'을 할 수 있었던 것, 지난 해 독일에서 입국했던 송두율교수에게 '빨갱이, 거물간첩'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무차별 마녀사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외견상 이 '악법' 때문이었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 법을 문제시하지 않으며 그것의 작동을 가능케 했던 무지막지한 사회적, 정치적인 관계들에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이 '인위적 야만'은 미시적, 일상적 수준에서 반복되는 사회구성원들의 행위와 발상에 '내면화'됨으로써 가능하였다. 물론 그것의 내면화는 '적과 동지의 구분'만이 유일한 생존의 원리였던 냉전반공체제 속에서 강제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기검열'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어 우리의 주위를 끊임없이 배회하면서 새로운 사냥감을 찾고 있다.
그런데 이 괴물은 자신을 유지, 증식시키기 위해 우리 각자를 먹잇감으로 노릴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간여하는 모든 관계들을 먹이로 한다는 점이다. 나의 생각과 발상, 양심과 사상을 스스로 검열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나와 가족, 나와 친구, 나와 스승 혹은 제자, 나와 직간접적으로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들의 발상을, 양심과 사상을 검열하는 것이다. 이 순간 나를 묶고 있는 모든 관계들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왜곡, 분절되고 나아가 급기야는 황폐화된다.
거기에는 진정성에 기반한 그 어떤 사회관계도 존재할 수 없다. 거기에는 자기검열로부터 이탈했다고 낙인찍힌 사람들과의 교류가 가져다줄 그 어떤 공포와 두려움–공포는 항상 미지, 불투명성에 기인한다–에서 비롯된 침묵, 냉담, '애써 모른척하기' 등의 '거리두기'만이, '낙인찍힌 자'의 배제 및 배척만이,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한 불신과 부정만이 존재할 뿐이다. 조봉암의 사형,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학살, 그리고 송두율교수에 대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 각자는 어떤 능동적 항의도 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 괴물 앞에서 또 주저하고 망설이며, '정말 내가 양심을 지닌 인간인가'라는 자괴감와 모멸감만을 곱씹고 삼켰을 뿐이다.
그 거대한 괴물은 어찌나 무뢰한지 우리와 같은 범인들은 물론 하느님과 대화하는 추기경의 양심조차 시험에 들게 하고 있다. 시민사회 안에 자리한 또 다른 국가라고까지 그 누군가가 갈파한 교회의 상징적 지도자조차도, 오직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주의 뜻'만이 판단의 근거라고 설파하는 그 분조차도 자기검열이 강제해 놓은 그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의 영역으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거기에서 어떤 의미 있는 논의와 사상적 교류가 이루어지고 의견 수렴이 가능하겠는가.
바로 여기에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으면 안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 법이 강제한 부당함에 침묵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희망인 최소한의 건강한 사회관계들마저 파괴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대상 그 자체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상황에서, 모든 세속의 일을 초월하고자 하는 성직자들조차 불쌍한 대중의 존재와 그들의 양심과 사상을 미더워하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생산적인 관계들이 존치할 수 있으며, 더불어 사는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기대를 꿈꿀 수 있는가. 과연 양심 위에 국가보안법이 존재하고, 따라서 우리가 그것에 고해성사해야 한다면, 진정 '가난한 자들의 양심'을 믿고 선택했던 그 희망의 교회는 어디로 갔는가.
이 사회는 힘 있는 특정한 개인, 사회세력 혹은 정치세력이 소유할 수 있는 그 어떤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이 사회를 운영하는 원리는 구성원들 사이의 논의를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러한 과정이 보장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게 요구되는 전제가 그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발상과 생각, 양심과 사상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유보될 수 없는 원칙이다. 이 원칙이 부정되는 순간 이 사회가 어디로 귀착될 것인지는 역사가 수 없이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런데 기우에서이지만, 아니 기우이길 바라지만,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는 국가보안법의 존폐를 둘러싸고 사생결단을 낼 것처럼 하면서, 뒤로는 그것의 개정 내지 대체입법의 가능성을 타진하며 '정치적 거래'를 하고자 하는 제도정치권의 모습들이 어른거린다. 진정 묻는다. 국가보안법의 개정 내지 대체입법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 진정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존중한다고 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 앞에 그 어떤 수식이 붙이더라도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 폐지에 대한 원칙을 결코 훼손시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대한 태도는 최소민주주의자와 파시스트를 가늠하는 준거이지, 최소민주주의자와 '더 많은 민주주의자'를 가늠하는 판단의 기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반대하는 것에 대해 '파시스트적이라는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폐지 주장에 대해 '급진적'이니, '빨갱이'니 하는 비판의 논리적, 역사적 근거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다시 묻는다. 진정, 최소한 민주주의자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들 앞에 존재하는, 당신들과 함께 이 사회에서 숨쉬고, 노동하고 생활하는 사람들,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당신들의 선호에 관계없이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야 할 당신의 가족, 친구, 동료, 당신을 스치듯 지나가는 이름 모를 이웃이다. 우리가 당신들과의 대화가능성을 언제나 열어 놓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발상과 생각, 양심과 사상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당신들의 발상과 생각, 그리고 사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태도가 민주주의자와 파시스트를 구별하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최소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보장해주는 주춧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
이광일: <정치비평> 편집위원,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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