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에 앞서 <현대조선잔혹사>라는 책을 냈어요. 조선소에서 일어나는 산업재해를 다룬 책인데요, 당시에 취재를 하려고 조선소에 위장취업을 했어요. 멋도 모르고 갔죠. 작업현장이 너무나 열악했어요. 일하다 정말 죽을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제가 일했던 곳이 조선소의 하청의 하청의 하청이었어요. 직원은 30명 정도였고요. 그때 당시 제가 34살이었는데 그 30명 중에 제가 나이가 제일 많았어요. 나머지 직원들은 거의 20대 중·후반이었죠.궁금했죠. '이토록 위험한 현장에 일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이 의문이 이 책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해요."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후마니타스 펴냄)의 저자 허환주 기자는 책을 쓰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뉜 이중화된 노동구조 안에서 가장 열악한 곳으로 내몰리는 열여덟 현장실습생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프레시안, 후마니타스, 알라딘 주최로 17일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에서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 북토크, '김용균 이후를 말하다'가 열렸다. 책의 저자인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와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패널로 참여했고 전수경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이 사회를 맡았다.
"오늘 저녁 무사히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허 기자가 겪은 조선소는 위험한 작업현장이었다. 웬만한 빌딩 높이의 배 내부에는 안전난간이나 안전망도 없었다. 폭 30cm의 발판에서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추락하는 구조였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매일 아침 여관방에서 눈을 뜰 때마다 '내가 오늘 저녁에 무사히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하며 현장으로 출근했다"고 말했다. 조선소의 경험을 좀 더 이야기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697'이라는 숫자를 떠올렸다.
"조선소에는 무재해 간판이 있어요. '사망자 0명, 재해자 0명 무사고 696일' 이런 식으로. 한 번은 옆 동에서 일하던 직원 한 분이 작업장에서 떨어져서 반신불수가 됐어요. 금방 소문이 돌았죠. 저는 당연히 무재해 간판에 써 있는 숫자가 바뀔거라 생각했어요. '재해자 1명, 무사고 1일'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다음날 출근해보니 696일에서 697일이 돼 있는 거에요. 하청노동자가 일하다 다치거나 죽는 건 처음부터 수치로 세지도 않는 거죠. 더 당황스러운 건, 일하다 사람이 다쳤잖아요? 그런데 그 다친 현장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더라고요. 사고 난 다음날부터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일하고 있고..."
허 기자는 "그 무사고 며칠 기록은 처음부터 정규직만 카운트하도록 돼 있고 노동부나 산자부는 그걸 알면서도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며 그 제도를 시행해온 것"이라며 '위험의 외주화'가 계속되는 배경을 설명했다.
"80%의 취업률, 아이들을 영세사업장까지 밀어낸 결과"
허 기자는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상당수가 청년들이라고 지적했다. 허 기자는 "조선소 등 제조업이 하청업체라고 하면,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대부분일 것 같다는 편견이 있다"면서 "실제로 본 현장에서는 하청, 비정규직과 같이 열악한 곳일수록 나이 어린 친구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허 기자는 언뜻 다른 주제로 보이는 '현장실습생'과 '하청 비정규직'의 연결고리를 '특성화고'에서 찾았다. 허 기자는 "나이가 어렸던 친구들은 그 지역 특성화고를 졸업한 아이들"이라며 "그 아이들이 조선소에 들어오는 주된 루트가 바로 현장실습"이라고 말했다.
현장실습 제도는 산업화 시기인 196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업 육성화 정책을 펼친 박정희 정부는 '산업역군'을 만드는 통로로 '현장실습'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제도는 이명박 정부 들어 더욱 강화됐다. 예산을 무기로 학교 간 경쟁을 시키고 아이들을 줄 세웠다.
학교 등급, 그리고 학생 성적에 따라 아이들은 현장실습이라는 '통로'를 통해 안정적이고 안전한 '좋은 일자리'와 열악하고 위험한 '나쁜 일자리'를 나뉘어 배치됐다. 학교는 이러한 이중구조 중심에서 아이들을 구별해 좋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로 나누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특성화고 취업률은 80%가까이 올라갔으나 동시에 아이들의 일자리 질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허 기자는 "현장실습생 제도는 노동환경의 울타리를 절대 벗어날 수 없다"며 "80%가까이 올라간 취업률은 아이들을 근로감독도 제대로 되지 않는 영세사업장에까지 밀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저는 아직 그날에 멈춰 있습니다"
지난 2018년 12월, 작업 중 사망한 고 김용균 씨도 태안화력발전소의 하청노동자였다. 김 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저는 아직 그날에 멈춰있다"며 "속에서 돌덩이가 타오르는 것 같다"고 지난 1년을 이야기했다.
"용균이가 죽고 용균이가 일했던 곳에 가봤어요. 너무 열악했어요. 앞이 안 보일정도로 컴컴하고 분진이 눈처럼 쌓여있고. 기계 한 대가 15층 높이인데 위력이 쎈 회전체가 막 빠르게 돌아가요. 용균이는 그런 곳에서 밤새도록 혼자 일했어요.
가 보니까 용균이가 왜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용균이 동료들, 20대 초·중반 되는 애들은 매일같이 거기서 일하니까 위험에도 무감각해졌어요. 용균이가 죽고 나서야 거기가 위험한걸 알았대요. 처음 보는 사람은 딱 봐도 알겠는걸.
특별조사단의 진상조사결과 용균이가 규칙을 다 지켜서 죽었다고 나왔어요. 그런데도 원청은 하청에 책임 없다 그러고 하청은 자기네 사업장 아니니까 책임이 없다 그러고.
용균이 사고가 나기 전에 그곳에선 8년 동안 12명이 산재로 죽었어요. 28번이나 시정요구를 했는데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묵살한 거에요. 그때 사고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시정 요구한 것만 제대로 들어줬더라면 용균이는 살아있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산재 사망자가 한해 2400명이라고 해요. 용균이처럼 죽는 사람이 2400명이라는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랐어요. 그 숫자도 비정규직이 압도적이고. 아무도 이런 죽음에 책임지지 않는구나,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국가는 어디에 있는 건가. 시끄럽다고,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매일 싸워야 해요. 아무도 안 지켜주니까"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같이 기업에 큰 책임 묻는 제도가 있다면..."
16일 김용균 씨 사망으로 개정된 '김용균법', 즉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처음 '김용균법'은 산재에 대한 원청의 책임 범위를 크게 확대했다. 그러나 김용균법은 국회 통과 과정에서 애초 취지가 무력화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전소·지하철·조선업·건설현장 등은 도급을 금지하는 '위험사업장'에서 제외돼 김용균 씨와 같은 노동자를 보호할 수 없게 됐다. 또 사업장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작업을 전면 중지하는 요건도 까다롭게 바뀌었다.
김 이사장은 그 점을 가장 아쉬워했다. 김 이사장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같이 기업에 큰 책임을 묻는 제도가 있다면 처벌이 무서워서라도 기업이 안전한 시스템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북토크를 마치며 허 기자는 "우리가 값싸고 질 좋은 서비스를 누리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값싼 서비스 뒤엔 김용균 씨, 그리고 구의역 김 군 같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아이들이 있다"며 "불편하더라도 현실을 계속 들여다보고 바꾸려는 노력을 함께 해야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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