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소 노동자는 1급 발암물질에 노출돼 일한다. 근무현장에 석탄분진도 자욱하게 낀다. 정부는 안전대책을 마련한다며 단가 2950원짜리 특진마스크 지급을 발표했다. 하지만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은 여전히 700원, 1100원짜리 마스크를 쓰고 일한다. 원청은 특진마스크를 지급하라고 했는데, 하청은 기존에 쓰던 마스크를 다 써야 특진마스크를 준다고 한다."
이태성 발전비정규직연대회의 간사는 김용균 보고서가 나온 이후에도 발전소 노동자의 안전 문제는 변한 것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발전소만이 아니었다.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조사위원회, 집배원 노동조건개선 기획추진단 등이 낸 보고서도 현장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고김용균노동자1주기추모위원회는 3일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휴지조각이 된 조사보고서'라는 이름의 토론회를 열고, 노동자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때마다 정부 주도하에 시민사회와 노동계가 참여하여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지지만, 정작 현장은 변하지 않는 현실을 고발했다.
김용균부터 집배원까지, 휴지조각이 된 조사보고서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석탄화력 발전소 특별노동조사안전위원회'는 지난 8월 김용균 씨와 같은 죽음을 막기 위해 △ 연료환경설비운전 및 경상정비 노동자의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 △ 하청업체의 노무비 착복 금지 △ 위험 업무의 2인 1조 근무를 위한 인력 충원 등 22개 권고안을 냈다.
이 중 일부나마 이행된 것은 노동 안전을 위한 필요인력 충원뿐이다. 그마저도 김용균특조위가 권고한 490명에 못 미치는 170명이 충원됐다. 인원이 충분히 충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2인 1조 근무를 시행하면서 노동자의 담당 구역은 두 배로 늘었다. 정규직 전환 등에 대해서는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조사위원회 역시 작년 4월 조선업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 2017년 5월 1일과 2017년 8월 20일 각각 6명과 4명의 하청 노동자가 사망하는 중대재해가 연달아 일어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조선업위원회에는 노동자 대표와 정부 대표뿐 아니라 사용자 대표도 참여했다. 노사정 대표는 진통 끝에 △ 다단계 하도급 구조 △ 무리한 공정 진행 등이 조선업에서 사망 사고가 반복되는 원인이라는 데 합의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후 노사정이 합의한 근본 원인을 개선하기 위해 진척된 상황은 없다.
집배원 노동조건개선 기획추진단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집배원은 한해 평균 17명이 과로사하는 업종이다. 집배원추진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집배원의 노동시간은 연 2745시간에 달한다. 한국의 평균적인 노동자에 비해 연 87일 더 일하는 셈이다.
작년 10월 이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 대표, 사용자 대표, 전문가 대표가 △ 인원 충원 △ 토요 근무 폐지 △ 집배업무강도 진단시스템 개선 등에 합의했다. 그러나 집배원추진단 활동이 끝난 뒤 사용자인 우체국은 인력 충원이 아닌 인력 재배치면 충분하다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이후 특수고용노동자, 민간위탁 기사를 활용하는 등의 '꼼수'로 일부 인력을 충원했다. 토요 근무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중대재해 조사보고서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려면
이날 토론회 참가자들은 중대재해 조사보고서의 권고 이행 방안으로 이행점검위의 구성과 권고 이행에 대한 결정권자의 의지, 그리고 결정권자의 의지를 만드는 시민의 역할을 강조했다.
전주희 김용균특조위 조사위원은 "쌓여가는 조사보고서의 운명이 이후 어떻게 됐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이행검검위가 필요하다"며 "정부와 노동자, 시민사회를 주체로 한 조사보고서의 점검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회의 사회를 맡은 권영국 변호사는 "직접고용까지 이어진 구의역 김군 조사보고서 때와 비교하면 결정권한을 가진 사람이 의지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인다"며 "김용균특조위 때도 정부가 뭔가를 해보려 했던 것 같은데 이후 별로 언급이 없는 것 같고, 결정권자의 의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시민의 역할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715쪽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책(김용균 보고서)을 냈고, 이걸 이행하도록 하는 게 우리 목적이었는데 휴지조각이 된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조사보고서가 휴지조각이 되지 않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서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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