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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또 다른 고3'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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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또 다른 고3'의 이야기

[프레시안 books]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 : 현장실습생 이야기>

이제는 식상하기까지 한 '조국 사태'에서 국민적 공분을 샀던 것은 웅동학원이나 사모펀드가 아니라 '자녀 입시'였다. 조 전 장관만이 아니다. 야당 원내대표의 아들은 경시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서울대 실험실을 빌렸다. 실력의 유무를 떠나 부모의 인맥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던 일임은 분명하다. 이번 사태로 부유층, 기득권층의 '자제들 스펙 몰아주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분노와 허탈감을 느꼈느냐면 그건 아니다. 그보단 "이제 알았어?"라는 냉소가 나왔다. 성공적인 입시를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고 한건 30대인 나의 학창시절에도 있었던 이야기다. 오래전부터 우린 모두 알고 있었다. 교육은 부모가 가진 사회 경제적 자본의 영향 아래 놓인다. 그 교육은 노동조건에 절대적인 영향을 발휘하고 노동조건은 다시 사회 경제적 격차를 만들어낸다. 교육은 계급이다.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또 다른 '고3'들의 이야기

모두가 구름 위 스카이캐슬을 바라볼 때 잠시 시선을 돌려본다. 볕도 들지 않는 낮고 낮은 그 어딘가에 '열여덟' 아이들이 있다. 대학진학률이 80%에 육박하는 나라에서 나머지 20%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고교 졸업 후 바로 노동시장에 뛰어드는 직업계 고등학교 아이들이다. 인문계고 아이들이 수능을 한창 준비할 고3시절, 직업계고 아이들은 실무 능력을 쌓기 위해 일터에 나간다. 이 아이들은 학생일까, 노동자일까. 고등학생이자 노동자인 '현장실습생'을 다룬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후마니타스 펴냄)는 우리가 외면하던 20%의 삶을 추적한 책이다.

그간 산업재해를 취재해온 <프레시안> 허환주 기자가 이번에는 직업계 고등학교의 현장실습생들을 취재했다. 지금까지 산재사고를 노동문제로 바라보던 관점에서 한걸음 더 들어간다. 불공정한 원·하청 관계 속에서 위험에 노출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살펴보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살펴본다.

이 책은 한 여고생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전공과 무관한 콜센터에 다녔던 현장실습생 은주 양은 추운 겨울 저수지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저자는 그 죽음을 시작으로 프레스 끼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제주도 이민호 군, 그리고 2016년 구의역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죽음을 맞이한 김 군 등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의 죽음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바로 '교육'이었다.

경쟁과 차별, 서열로 만들어지는 '교육의 공정성'

이 교육의 사슬은 '산업 역군'을 키우기 위해 직업계고를 확대한 박정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 사슬의 정점은 이명박 정부의 '마이스터고' 정책에 찍혀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정부는 부족한 생산직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일선 학교에 아이들의 취업률을 높일 것을 압박했다. 만약 취업률을 올리지 못할 경우, 정부는 예산 삭감, 학교 통폐합 등의 카드로 학교에 압력을 가했다.

학교 입장에서는 취업률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취업률을 높이는 방식이었다. 성과를 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학생들을 줄 세워서 차별하고 경쟁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소수의 우수한 학생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잉여인력으로 전락한다.

게다가 취업률을 높여야 하는 학교는 아이들을 전공과 상관없이 현장실습을 통해 어디든 보내려 한다. 현장실습은 사실상 알바, 저임금 노동착취로 이용되는 식이다. 학교가 인력 파견 업체로 전락한 이유다.

그렇게 일터로 보내진 아이들은 학교의 보호도, 회사의 보호도 닿지 않는 곳에 말 그대로 내던져 진다.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아이들은 눈치껏 빨리빨리 일하다 프레스기에 끼어 죽거나, 적응하지 못하고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물론 개중에는 공기업이나 대기업 취업에 성공한 소수의 우수한 학생들도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도 '고졸'의 벽을 넘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대우는 대졸 밑이다.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런 그들에게 세상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러길래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랬느냐" 그런 질문을 의식하기라도 하듯 저자는 은주와 유사한 사연을 쉴 새 없이 펼쳐놓는다. 마치 '이건 공정하냐'고 휘몰아치듯 따진다.

공정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은주들의 사연을 모으고 모아 이 책은 결국 공정성에 대해 묻는다. 교육은 공정해야 한다고 다들 말한다. 그래서 지금 교육이 공정한가. 공정한 기회를 주고 있는가. 또다른 관점에서, 공정의 기준은 과연 '공정'한가. 이 불공정한 세상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 아닌가.

여기서 저자는 좀 더 직접적으로 핵심을, 우리의 양심을 찌른다. 우린 이들의 사연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비정규직이 사라질까 두렵다. 값싸고 질 좋은 서비스가 비정규직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더럽고 힘든 일을 해줄 '나 아닌' 누군가가 필요하다. 시험을 통과한 정규직의 '노력'은 비정규직과의 차별로 보상받아야 한다. 그래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한다. 그것을 우리는 '공정하다'고 말한다. 솔직해지자, 우리는 공정함을 이유로 누군가를 착취하고 기회를 빼앗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사회의 모순은 가장 약한 자들에게 가장 잔인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공정의 모순 속, 우리는 교육이란 이름으로 열여덟 아이들을 벼랑 끝에 세워 놓았다. 계급의 가장 밑바닥, 아이들의 손발을 잘라놓고 '너는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 특성화고 출신 노동자는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폭은 너무나 한정돼 있어요" 우리는 이제 그 '공정함'을 부끄러워 해야 한다.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2019, 허환주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값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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