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화태도 치끝 선착장 옆 웅덩이 곁에서 노인 한분이 뜰채를 옆에 놓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웅덩이에는 숭어들이 우글거리는데 노인은 잡지 않고 그저 바라만 봅니다. 뜰채만 가져다 대면 숭어들을 마구 건져낼 수도 있을 듯도 한데 말입니다.
“어째서 숭어를 안 잡고 그냥 보고만 계세요?”
“아직 때가 아니오.”
“어째서요?”
“저기 갯고랑 물이 끊기고 숭어들이 웅덩이에 갇힐 때까지 기다리는 거요. 지금 건드리면 싹 다 나가부러.”
저러다 진짜 썰물을 따라 숭어가 다 빠져 나가버리면 어쩌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노인의 대답이 담백합니다.
“열 번 오면 다섯 번쯤 잡아요.”
숭어가 빠져나갈까봐 조급하게 굴면 다 놓칠 수 있지만 때를 기다릴 줄만 알면 절반은 성공한다는 말씀. 5할이면 얼마나 높은 승률인가요? 또 삼십분쯤이 흐르자 노인은 비로소 뜰채를 들어 숭어를 건져내기 시작합니다. 세상의 물고기들이란 대체로 때라는 그물에만 걸려드나 봅니다. 섬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고수들을 만납니다. 인생도처 유상수!
2020년 2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90강은 2월 1(토)-2(일)일, 화태갯가길을 걸으러 갑니다. 여수의 섬 화태도 둘레를 따라 난 13km의 갯가길은 가는 내내 바다와 섬들을 보며 걸을 수 있는 최고의 트레일입니다. 금오도 비렁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데 덜 알려져 있어서 더 좋습니다. 때가 맞으면 삶의 고수들도 만날 수 있는 길. 돌산도 향일암의 일출과 동백꽃, 향일암 아래서 맛보는 여수 겨울바다 해산물 요리들은 덤입니다. 따뜻한 여수 겨울바다를 따라 하염없이 걷고 싶은 분들을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20년 2월의 답사지인 여수 화태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제주 올레 후에 생겼으나 올레를 뛰어넘는 둘레길
작정하고 나선 길이다. 아무 상념 없이 걷기만 하자고 나선 길이다. 화태도(禾太島) 갯가길. 제주 올레길이 걷기 붐을 일으킨 이후 온 나라에 온갖 길들이 두서없이 생겨났다. 섬들도 저마다 이름을 달고 길들이 만들어졌다. 여수 갯가길도 올레가 낳은 자식 중 하나다. 그 많은 길들 중 올레를 능가하는 길은 극히 드문데 화태도 갯가길은 청출어람이다.
화태도는 지난 2015년 12월 돌산도와 다리로 연결되면서 섬의 시대를 마감했다. 여수와 연결된 돌산과 연결됐으니 육지로 편입된 것이다. 길은 돌산도 예교마을 화태대교 입구부터 시작된다. 다리에는 자동차가 다니는 길 옆으로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인도가 따로 만들어져 있다. 인도는 차도만큼이나 널찍하다. 다리 아래 왼쪽은 금오도행 여객선이 드나드는 신기항이고, 오른쪽의 길쭉한 섬은 송도다. 송도 건너편이 돌산읍 소재지인 군내리다. 군내리 마을 주민인 노인들 몇 분도 운동 삼아 이 길을 걸으러 나섰다. 조용히 뒤따르며 노인들의 이야기를 귀동냥해 듣는다.
“군내리가 겨울에는 따뜻해. 근데 옛날에는 여름에 태풍이라도 오면 벌벌 떨면서 도망가기 바빴지.”
천왕산 아래 남향으로 자리한 군내리는 북풍을 막아주는 천왕산으로 인해 겨울에는 더없이 따뜻하다. 하지만 여름에 태풍이라도 불면 천왕산에 가로막힌 태풍이 용틀임 치며 군내리를 휩쓸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태풍 때는 도망가기 바빴다는 말씀. 다리 건너 송도를 보고서도 노인들은 한마디씩 거든다.
“포클레인 작은 거나 한 대 사라.”
“뭐에 쓰게?”
“그걸로 송도 칡이나 캐러 가자. 저번에 가보니 칡 둥치가 한 아름이나 되더라. 한 이십 년은 된 거 같어.”
“송도 사람들이 파라고 내버려 둔데?”
“요샌 칡이고 뭐고 다들 든네버려.”
배포도 좋지! 칡 한 뿌리 캐겠다고 포클레인을 사라는 사람이나 살까 궁리하는 사람이나. “그나저나 산돼지 때문에 큰일이여. 농사도 글렀어.”
“농사뿐이간디. 산돼지가 염소도 잡아 묵어. 우리 동네 사람이 염소를 묶어놓고 키는데 잘 있나 가봤다가 기겁을 했다네. 산돼지가 염소를 산 채로 뜯어 묵고 있더래. 무서워서 어쩌지도 못하고 그냥 도망 왔다네.”
“산돼지가 헤엄도 무자게 잘 치니. 이 섬 저 섬 건너다니고. 큰일이여 큰일.”
화태갯가길 시작지점은 치끝
다리를 건너자 ‘남면’이란 표지판이 서있다. 여기부터는 여수시 돌산읍이 아니라 여수시 남면에 속한다는 안내판이다. 3백여 미터쯤 직진하면 화태갯가길 시작지점인 치끝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왼편 뚝방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화태갯가길은 치끝에서 월전마을을 거처 독정이, 묘두, 뻘금을 지나 다시 치끝까지 되돌아오는 13km 남짓의 트레일이다. 화태도는 췻대섬, 파태도, 수태섬 등으로 불리다 지금의 이름이 됐다. 2.18㎢의 면적에 200여 가구, 400여 명의 주민들이 살아가는데 섬사람들의 주업은 어류 양식이다. 100여 가구가 가두리 양식장에서 우럭, 도미 등의 어류를 기른다. 여수에서 가장 많은 어류 양식업을 하는 곳이 바로 화태도다. 여수 전체 양식 어류의 40% 가량이 화태도에서 생산된다.
뚝방길을 느릿느릿 걷다보니 선착장 옆 웅덩이 곁에서 노인 한 분이 뜰채를 옆에 놓고 가만히 앉아 있다. 저것은 필시 숭어를 잡으려는 것이겠지, 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웅덩이에는 숭어들이 우글거린다. 들물에 들어왔던 숭어들이 썰물 때가 되도록 뻘을 먹으면 노느라 빠져나갈 생각을 않는다. 웅덩이를 따라 바다로 이어진 갯고랑으로는 여전히 숭어들이 오고간다. 하지만 바로 앞에 숭어떼가 있는데도 노인은 숭어를 잡지 않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뜰채만 가져다 대면 숭어들을 마구 건져낼 수도 있을 듯도 한 데 말이다. “어째서 숭어를 안 잡고 그냥 보고만 계세요?” “아직 때가 아니요.” “어째서요?” “저기 갯고랑 물이 끊기고 숭어들이 웅덩이에 갇힐 때까지 기다리는 거요. 지금 건드리면 싹 다 나가부러.” 아! 그래서 숭어들이 저리 많은데도 안 잡는구나. 그런데 저러다 썰물을 따라 숭어가 다 빠져 나가버리면 어쩌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노인의 대답이 담백하다. 놓치면 그만이란 말씀.
5할이면 얼마나 높은 승률인가!
노인은 마지막 남은 한 마리까지 다 빠져 나가도 꿈쩍 않을 태세다. “열 번 오면 다섯 번쯤 잡아요.” 숭어가 빠져나갈까봐 조급하게 굴면 다 놓칠 수 있지만 때를 기다릴 줄만 알면 절반은 성공한다는 말씀이다. 5할이면 얼마나 높은 승률인가! 조급하지도 욕심 부리지도 않고 절반의 성공에도 만족할 줄 아는 어부가 진정한 고수다. 노인은 벌써 1시간 전부터 자리에 앉아 숭어들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또 삼십 분쯤이 흐르자 비로소 웅덩이와 바다 사이 갯고랑의 물길이 끊겼다. 그래도 아직 제법 많은 숭어들이 남았다. 노인은 뜰채를 들어 숭어를 건져내기 시작한다. 대체로 세상의 물고기들이란 때라는 그물에만 걸려든다. 낚시 바늘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그물이 아무리 촘촘해도 때를 기다릴 줄 모르면 허방이다. 섬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고수들을 만난다. 인생도처 유상수다!
선창가 방파제 안은 물이 다 빠져나가고 어선들도 꼼짝없이 갇혔다. 이때를 기다려 노인 한 분은 또 열심히 어선의 바닥을 닦아내는 중이다. 이끼가 자라니 그것들을 제거해야 배가 오래간다. “그대로 두면 굴통이 생겨요. 굴통이 배를 못 쓰게 해요.” 굴통은 삼각 따개비를 이르는 듯하다. 그런데 바닷물을 걸러먹고 살아가는 굴통이 배를 갉아먹기라도 한다는 것일까? “아뇨. 굴통이 생기면 벌레가 붙고, 벌레가 배를 갉아 먹어요.” 그래서 팔순의 노인은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자기 어선에 붙은 이끼 제거 작업을 한다. 오늘은 나온 김에 이웃집 어선들도 함께 닦아준다.
노인은 건넌몰에 산다. 화태도에는 묘두, 월전, 대동, 독정이, 마족, 건너몰, 치끝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대동마을과 건너몰을 합해서 화태마을이라 하는데 화태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팔순의 노인이 아직도 정정한 현역 어부다. ‘여름에는 문어잡고 봄에는 기(게) 잡고, 낙지도 잡고 사요. 가을에는 문어 쬐깐 잡고 겨울엔 바람이 씨고 그래서 많이 노요.” 요즈음은 문어철이다. 노인은 문어 건지로 문어를 잡는다. 문어 건지란 문어를 잡는 외줄낚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문어는 통발이나 문어 단지로들 많이 잡는데 화태도에서는 주로 외줄낚시로 잡는다. 문어건지는 갈코리 모양의 낚시인데 이 갈코리에 고등어 토막 등을 끼워 문어를 낚는다.
노인을 남기고 산길로 접어들어 이십 분 남짓 걷다보니 마족포구다. 마족 포구에서 삼거리로 갈라지는데 도무지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는 마족 선착장 길의 입구에 서 있다. 이정표를 자동차가 가리고 있어서 한참을 헤맸다. 삼거리 갈림길에는 어디나 이정표가 있어야 맞다. 다시 해안길로 접어든다. 길가에는 낡은 초소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해안 경비를 서던 초소다. 초소 안의 벽면에 새겨진 구호가 아직도 섬뜩하다. ‘적은 반드시 내 앞으로 온다.’ 초소를 지나 숲길을 빠져나오니 월전 포구다. 선창가는 낚시꾼들로 시끌벅적하다. 방송 영향인지 요즘 부쩍 어딜 가나 가족 단위 낚시객들이 늘었다. 파출소도 우체국도 이 마을에 있다. 독정이와 함께 돌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아직도 기항하는 마을이다. 월전(月田)은 달밭이란 뜻이다. 그래서 월전의 옛 이름은 달밭기미다.
섬사람들은 모두가 달의 자손이다
기미는 작은 만을 뜻한다. 바다나 강, 냇물, 들판 등이 산과 산 사이 혹은 물과 물 사이로 굽이쳐 들어간 작은 만이나 골짜기, 여울 등을 모두 기미, 혹은 구미, 꾸미, 금, 금미 등으로 부른다. 여진어를 어원으로 둔 말이다. 여진어 kueima(수변)에서 왔다. 아이누어 kume도 같은 뜻이다. 달밭기미는 내륙으로 쑥 들어간 만이 있어서 배들이 정박할 수 있는 포구를 이루었다. 화태도 옆에는 월호도도 있다. 달빛 호수의 섬. 달밭, 달빛 호수, 이 부근 섬들 지명은 어찌 이토록 그윽한가? 정확한 어원이 무엇인지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 달이 떴는데 호수면 어떻고 밭이면 어떻고 또 해변이면 어떤가? 섬사람들은 모두가 달의 자손이다. 달이 인력으로 바닷물을 밀었다 당겼다 하면 섬사람들은 달의 길을 따라 살아간다. 달이 바닷물을 잡아 당겨주면 갯벌에 나가 게와 소라와 해초를 뜯어오고, 바닷물을 풀어주면 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들을 잡아다 먹고 살아간다.
월전포구 선착장 끝에서 길은 끊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시작된다. 해변의 숲길. 옛날에 다들 갯것을 하고 나무를 하러 다니던 길이다. 이 해변을 돌아서면 섬의 서쪽이다. 독정이 포구에서 다시 또 이정표가 어긋난다.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화살표 방향을 따라 가니 도로가 나온다. 이 길이 아닌가보다 싶어 다시 되돌아 독정이 선창가로 내려가니 해변을 따라 길이 이어진다. 여기도 초소 건물인가, 선착장 끝 길 입구에 폐허가 된 작은 건물 하나가 서 있다. 건물 옆길로 들어서려다 잠깐 멈칫한다. 참 여럿이도 똥을 싸놓았다. 필시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낚시꾼들 소행이다. 화장실이 없으니 이해한다. 마려운 똥을 싸는 것을 어쩌랴.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길 가운데 똥을 싸다니. 급하게 쌌으면 치우기나 하던가, 아니면 길을 벗어나서 싸던가. 참 할 말 없게 만드는 낚시문화다. 제발이지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우고 살자! 안내판이라도 붙여주고 싶다.
꽃머리산이라니! 이토록 어여쁜 이름의 산도 있을까
똥덩어리들만 잘 피하면 묘두까지 이어지는 해변 길은 내내 파도 소리 들으면 걸을 수 있는 최고의 트레일이다. 묘두 마을이 보이는 갈림길에 이르니 이정표가 나타난다. 썰물 때는 해변 길로 들물 때는 도로를 따라가라는 표시다. 묘두는 고양이 머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묘두를 괴머리라고도 부른다. 괴 혹은 괴이, 괭이는 고양이의 지역 말이다. 묘두마을 앞바다는 호수처럼 둥그렇다. 어째서 건너 섬이 월호도라 이름을 얻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묘두마을을 돌아 나와 도로를 따라 200미터 남짓 걸으면 꽃머리산 입구다. 여기도 이정표가 없다. 그래도 길은 더 없이 고즈넉하다. 꽃머리산이라니! 이토록 어여쁜 이름의 산도 있을까? 꽃머리산을 올랐다 내려가니 다시 처음 그 자리다. 치끝.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왔구나 나그네여!
다시 화태대교 앞이다. 화태도 사람들은 이 다리가 건설되고 나서 화태도에 없던 것 3가지가 새로 생겼다고 말한다. 도둑, 쓰레기, 이웃 간의 분열이다. 도둑들이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와 널어놓은 곡식이나 해초를 훔쳐간다. 놀러온 낚시꾼들이나 등산객들은 도시락 싸들고 와 먹고 가면서 쓰레기 버리고 똥이나 싸놓고 가기 일쑤다. 관광객들 상대로 장사 하는 이들은 서로 손님 유치하려고 반목이 생겼다. 다리 건설을 그토록 염원했던 섬 주민들이 느끼는 감정은 그래서 복잡 미묘하다. 연륙이 된 많은 섬들이 그냥 육지의 변두리로 편입되면서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 섬에 다리를 놓는 것은 주민들의 열망 때문이다. 나그네 또한 섬에서 오래 살았고 여전히 섬을 떠돌고 있으니 그 열망을 천번만번 이해한다. 하지만 연륙교는 양날의 칼이다. 교통의 편리를 얻은 대신에 섬의 정체성을 잃게 만든다. 교통 불편 해소 방법이 꼭 다리 공사뿐일까?
섬 주민들이 다리에 목을 매는 이유는 그동안 정부가 교통 불편 해소를 위한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토건 자본의 이해 때문이기도 하다. 마치 자동차 산업과 토건 자본을 부양하기 위해 철도 대신 자동차도로만 이중삼중으로 수도 없이 만들었던 상황과 같은 맥락이다. 외국의 경우 많은 섬 주민들이 다리 건설을 포기하고 섬의 정체성을 지키는 쪽을 택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형 여객선의 대형화, 전천후 여객선 도입, 야간 운항, 소형 비행기 운행 등으로 정부가 섬 주민들의 교통 불편 해소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더 이상 섬의 육지화를 멈추고 교통 불편도 해소하면서 섬의 고유성도 지킬 수 있는 정책들을 도입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2월 섬학교 제90강 <여수의 섬 화태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2월 1일(토)>
08:00 서울 출발(정시에 출발합니다. 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90강 여는 모임.
-여수 도착
-점심식사(돌산도에서 남도밥상)
-화태도 갯가길 걷기(13km)
돌산예교-화태대교-치끝-마족-월전-독정항-묘두-꽃머리산-뻘금-치끝
-저녁식사 겸 뒤풀이(향일암 아랫마을에서 생선회정식)
-자유시간 및 휴식, 취침(다인실)
<2월 2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게장백반)
-향일암 탐방 혹은 자유시간
-선어시장 장보기
-점심식사(장어탕요리)
13:30 서울 향발. 제90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따뜻하고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장갑, 선글라스, 버프(얼굴가리개),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실손보험 미가입자는 반드시 여행자보험에 가입해 만일에 대비하세요.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2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5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0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70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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