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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파워'가 '친미' 아로요 굴복시켰다"

필리핀 언론, "아로요, 국민영웅·배반자 사이 선택해야" 압박

그동안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동참하며 미국의 최대 우방 가운데 하나였던 필리핀의 '친미'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이 무장저항세력의 '즉시 철군'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대이라크 전선을 무력화시켜 미국을 격노케 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시했던 아로요 대통령은 왜 이런 결단을 한 것인가.

14일 밤 광화문에서 열린 파병철회 철야농성에 참가한 카사마코 필리핀 이주노동자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파리마'씨는 이같은 의문과 관련, "필리핀 민중의 광범위한 철군 여론이 '친미' 아로요 대통령을 굴복시켰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도 추가파병을 막는 방법은 오로지 대중적인 파병반대여론을 형성하는 것이고, 정권도 필리핀처럼 강력한 국민 여론 앞에서는 더 이상 한미동맹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격노에도 아로요 "철군하라"**

델리아 알버트 필리핀 외교장관은 14일 성명을 통해 "필리핀군은 이미 이라크에서 철수중"이라며 "외교부는 국방부와 필리핀 인도지원군의 철수와 관련해 협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알버트 장관은 또 "51명의 파병군 가운데 이미 43명만이 남아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필리핀은'자국민 인질 석방'을 위해 납치무장세력의 "7월 20일까지의 조기철군"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아울러 알버트 장관의 이날 발표는 13일 라파엘 세기스 필리핀 외무차관의 "필리핀은 이라크에 주둔중인 자국병력을 신속하게, 가능한 한 빨리 철군시키겠다"는 발표 이후 가해진 미국 정부의 강력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나온 것이어서,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세기스 차관의 12일 철군 발표 이후 미국은 노골적으로 아로요 대통령을 압박했었다. 13일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필리핀 발표에 실망했으며 납치단체에 잘못된 신호를 주는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로요대통령이 철군 지시를 내려 필리핀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그는 14일 '필리핀 정부의 결정이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리는 지켜봐야 한다"면서 고 김선일씨 피살에도 불구하고 추가파병을 결정한 한국 등을 예로 들며 '앞으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뉴양스의 노골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아로요, 부시가 환대한 3인의 지도자중 하나**

아로요의 이번 결단은 그동안 그가 보여온 저자세 대미외교 자세를 보면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이다.

아로요 대통령이 이끄는 필리핀 정부는 미국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참여하며 이라크 파병 결정도 초기에 내린 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그 덕분에 아로요 대통령은 지난해 미국을 방문할 당시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그동안 단 3명에게만 베풀었다는 정도의 융숭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특히 필리핀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화하자 이를 계기로 자국내 이슬람 반군세력인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KF) 등 반정부이슬람단체를 소탕하기 위해 미국에 적극 협조하는 등 '맹목적인 친미정책'을 펼쳐왔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필리핀의 최대 수출시장이 미국과 일본이며, 최근에 악화된 경제 상황까지 고려한다면 아로요 대통령의 이번 결단은 분명 이례적이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 필리핀 주요언론, 아로요 노골적으로 압박**

이같은 의문에 대한 답은 다름아닌 필리핀의 정권을 두차례나 교체시킨 전력이 있는 필리핀 민중의 '피플 파워'이다.

필리핀 노동자 델 라 크루즈가 이라크 무장세력에 납치됐다는 사실이 보도된 이후 필리핀 국민은 정부에 조속한 석방 교섭에 나서도록 압력을 가했다.

크루즈 가족은 물론 필리핀 여론은 '자국민 보호우선'이라는 원칙에 따라 "아로요 대통령은 그를 살려야 한다"며 "아로요 대통령은 미국의 이라크전을 지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지를 고려해서는 안된다"며 아로요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다. 또한 석방 교섭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다수 국민들이 마닐라 시내에서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집회를 가지면서 경찰과 충돌 사태를 빚는 등 아로요 정부는 이번 사태로 반정부 여론 증폭이라는 큰 위기감에 쌓여 있었다.

이 과정에 특히 큰 역할은 한 것은 다름아닌 언론이었다. 필리핀의 대다수 언론들은 국내 메이저언론들과는 달리, 이라크전을 비난하고 미국의 태도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진정한 국가이익이 무엇인지 잘 판단해야 한다고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었다.

일간 <데일리 트리뷴(Daily Tribune)>은 필리핀 정부가 철군을 결정한 뒤 미국의 압력이 대단하던 13일자 사설에서 "아로요 대통령의 미국에 대한 충실한 동맹역할은 필리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며 "델 라 크루즈가 참수당한다면 강력한 대중의 역풍에 직면할 것"이라고 아로요를 압박했다. 신문은 또 "앞으로 며칠동안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대통령이 필리핀 국민의 영웅이 될지 아니면 배반자가 될지 결정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간 <말라야(malaya)>도 이날 사설을 통해 "델라 크루즈 가족들은 납치세력에 계속해서 선처를 호소해야 하며 정부에 대해서는 이라크 주둔 필리핀군을 철수하라는 요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이어 "가족들은 필리핀 국민은 필리핀 정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며 "국민들은 이라크 국민들과 아무런 악한 관련이 없으며 우리를 부시의 전쟁에 참여시킨 것은 글로리아 아로요일뿐"이라고 아로요의 참전결정을 강하게 비난했다. 신문은 "정부는 국가이익과 워싱턴에의 맹목적 순종 사이의 구별도 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 아로요, '피플 파워' 누구보다도 잘 알아**

이같은 다수 국민과 언론의 압박은 아로요에게 더없는 압력이 아닐 수 없었다.

지난 5월10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연임에 성공, 지난달 공식 취임한 아로요 대통령은 '국민의 힘'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다. 그 자신이 정치인으로 입문하고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제2의 피플 파워' 등 시민세력의 힘이 컸기 때문이다.

1947년생인 아로요 대통령은 필리핀 9대 대통령으로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웠던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전 대통령의 딸이다. 그녀는 미국 워싱턴의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2년동안 유학생활을 보냈으며 필리핀 국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같이 공부해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대학 교수와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다 '제1의 피플파워'로 집권한 코라손 아키노 정부하인 1986년에 무역산업부 차관보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으며 마르코스 정권을 붕괴시킨 시민조직들이 연합, 창당한 필리핀민주투쟁당(LDP)의 공천을 받아 1992년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1995년 재선당시에는 1천5백70만표를 얻어 필리핀 선거 사상 최다득표를 기록하며 가장 촉망받고 인기있는 여성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1998년에는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이 이끄는 라카스당 후보로 부통령에 당선돼 사회복지부장관을 겸직했다.

2000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사건이 일어나자 장관직을 사임한 뒤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시위 대열에 합류, 2001년 1월 에스트라다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아키노에 이어 피플 파워로 대통령에 오르게 됐다.

*** 아로요, 국민적 지지기반 취약 **

이처럼 국민의 힘을 가장 잘 아는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지만 대통령에 재선한 이후 가장 큰 고민은 국민적 지지기반이 빈약하다는 점이었다. 자신과 대통령선거에서 맞붙었던 영화배우 출신인 페르디난도 포 2세는 빈곤층 출신이라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민적 지지를 받았지만, 아로요 대통령은 엘리트 출신 기득권층이었다.

이에 아로요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후 부패혐의로 쫒겨난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많은 대중들이 대통령궁 앞에 몰려와 에스트라다를 연호하며 아로요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일들에 종종 직면해야 했다.

게다가 다른 한편엔 필리핀 군부의 압력이 상존하고 있다. 필리핀 군부는 지나 1989년 이후 모두 8차례나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정국불안의 중심에 서 있었다. 지난해에도 3백명 이상의 소장파 장교들이 아로요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며 마닐라 호텔을 접수하는 등 정치적 불안정성을 야기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건은 평화적으로 해결됐지만, 이 과정에 아로요가 임명한 국방부장관과 군정보부 수장은 물러나야 했다.

더욱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동참하면서, 국내 무슬림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빈부격차, 빈곤층 나날이 악화**

이와 함께 열악한 경제상황도 아로요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필리핀 인구 8천4백만명 가운데 40%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극빈층이며, 어린이 3명 가운데 1명은 영양실조 상태다. 4월말 현재 실업률은 공식 발표만으로도 13.7%에 이르렀다. 국가채무는 1천억달러에 달하고 지난해 외국인직접투자는 전년도에 비해 82%나 줄었다. 빈부격차는 더욱 심각해, 상류층 5%가 국토의 80%를 차지하고 있어 다수 국민은 절대적, 상대적 박탈감에 휩싸여 있다.

더욱이 '경제 전문가'를 자처하는 아로요 대통령이지만 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후 IMF요구에 따라 시행한 어설픈 구조개혁은 실업률 증가와 전기세, 수도세 인상 등 서민 물가불안을 야기, 일반 대중의 고통만 가중시켰다. 이에 필리핀인들 사이에는 "아로요가 미국 말만 들어 가진자만 더 잘살게 하고, 다수 국민은 빈곤의 늪에 빠트리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팽배해있다.

이처럼 안팎으로 권력기반이 취약한 아로요였던만큼 자국민 석방을 요구하는 국내의 거센 여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결국 철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낳고 있다.

***해외노동자가 필리핀의 생명줄**

하지만 이같은 철군 여론의 이면에는 해외에서 일하고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감사와 존경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현재 필리핀 경제의 최대 주력은 필리핀의 해외노동자들이 매년 국내로 송금하는 60억~80억달러의 외화다.

필리핀 주요 일간지 <필리핀 스타(Philippine Star)>는 13일자 사설을 통해 "매일같이 약 2천5백명의 필리핀인들이 고국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해외로 나가고 있다"며 이번 사건도 "이러한 비극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신문은 "우리는 종종 중동에서만 1백40만명, 해외에서 약 7백40만명의 필리핀인들이 거주하고 일하면서 매년 고국에 60억에서 80억달러에 달하는 외화를 보내고 있다는데 자부심을 표하고 있지만 이는 축하할 일이 아니라 탄식해야할 일"이라고 탄식했다.

실제로 납치된 트럭 운전사 크루즈도 9년동안 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에서 일해 왔다. 신문은 이와 관련 "8명의 자녀를 둔 그는 가족과 함께 지내려 했으나 실직한 기간 동안의 빚덩어리 때문에 해외로 내몰리게 된 것"이며 "지난해 2년 계약으로 다시 사우디로 떠나 일자리를 구했으며 그러다가 이번에 무장저항세력에 납치된 것"이라고 전했다.

요컨대 해외에서 각종 궂은 일은 하면서 필리핀을 버팅켜주고 있는 필리핀 노동자들에 대한 필리핀인들의 감사와 존경이 이번 인질 사태가 발생하면서 "국민의 생명보다 우선하는 국익은 없다"는 광범위한 여론을 만들어냈고, 아로요는 이같은 국민의 뜻에 승복한 셈이다.

필리핀 인질을 구한 것은 다름아닌 필리핀의 '피플 파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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