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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도 핵무기 사찰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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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도 핵무기 사찰 받아야 한다”

김재명의 '중동 현지르포' <9> 디모나 핵발전소와 오시라크 원자로

***바누누 "이스라엘도 핵무기 사찰 받아야 한다"
김재명의 '중동 현지르포' <9> 디모나 핵발전소와 오시라크 원자로**

미 부시행정부가 2003년3월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걸었던 구실 가운데 하나가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WMD)였다. 그러나 그 뒤 숱한 인력과 예산을 들이고도 WMD는 찾아내지 못했다. 이라크에서 만난 지식인들은 "이스라엘에 가서 찾았으면 벌써 찾아냈을 것"(바드다드대 하산 알리 사브티 교수․역사학)이라 말한다. 맞는 말이다. 지난 1999년 500쪽 가량의 두꺼운 책 『이스라엘과 핵폭탄』(Israel and The Bomb)을 쓴 애브너 코언(미 국제안보연구소 연구원)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최대 300개 가량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스라엘의 핵보유 논리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만난 이스라엘 우파 지식인 제럴드 스타인버그 교수(바르일란대․정치학)는 "아랍이라는 바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의 생존을 담보하는 최후 수단"이라 주장했다. 아랍국가들의 공격에 밀려 이스라엘이 국가적 생존의 위기에 몰리면, '마지막 카드'로 핵폭탄을 쓸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주변 아랍국들은 그런 말을 믿지 않는다. 미 부시행정부가 올들어 개발 움직임을 보이는 소형 핵무기를 이스라엘은 이미 개발해놓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제기되는 실정이다.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정부가 이를 확인한 적은 없다. 사실이라고 확인도, 아니라고 부정도 하지 않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의 애매한 태도를 보여왔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은 1960년대 중반부터 핵개발을 시작, 1970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세계 6번째로 많은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본다. IAEA의 핵 사찰을 피하려고 이스라엘은 1968년에 비준된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가입하지 않은 상태다.

***삼엄한 이중 철조망 속의 거대한 돔(dome)**

이스라엘 핵개발의 산실이 디모나(Dimona) 핵발전소(원자력연구센터)다.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사막 한가운데 있는 디모나 원자로는 150메가와트 규모. 1965년 섬유공장으로 위장한 채 프랑스로부터 비밀리에 사들인 장비로 세워져 풀루토늄을 만들었다. 디모나는 오늘날 이스라엘을 세계 6개 핵강국으로 발돋움시킨 터전이다. 지난해 이스라엘은 미국제 순항미사일을 개조,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다. 육․해․공에서 중거리 핵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2부작 '평화기획 중동'을 준비중인 KBS <일요 스페셜> 팀(장영주 PD)과 함께 필자는 예루살렘을 출발, 디모나 핵발전소로 떠났다. 디모나로 가는 길은 멀었다. 그리고 조심스러웠다. 이스라엘 운전기사에게 디모나를 가자고 하면, 말썽이 생길 것 같아 그곳에 가까운 큰 도시인 베르세바로 가자고 해야 했다. 다행일까, 운전기사가 이스라엘 시민권을 지닌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스라엘 남부도시 베르세바를 거쳐 디모나에 닿았다. 예루살렘을 떠난지 4시간쯤 뒤였다. 자료를 보니, 디모나는 아스라엘 정부가 1955년 성서 여호수아서(書)에 나오는 지명 이름을 따와 조성한 작은 마을이다.

문제는 어디에 디모나 핵발전소(원자력연구센터)가 있는가였다. '핵발전소'니 '원자력'이란 말을 써가며 주민들에게 물어보기가 조심스러웠다. 점심을 먹으며 식당 주인에게 그냥 '발전소' '큰 공장'이란 단어를 섞어 물어보니, 디모나 북쪽 외곽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곳으로 가보니 큰 공장은 맞는데, 휴대전화기 생산업체였다. 하는 수 없다. 그곳 공장 수위에게 '디모나 원자력연구소가 어디 있느냐'고 대놓고 물었다. 영어가 짧은 그 수위는 못 알아듣는다. 그럴 때 보디 랭귀지란 걸 섞어 써야 제격이다. 하늘을 가리키며 내리 꽂는 식으로 주먹을 아래로 내려치면서 쾅하는 소리를 내자, "아! 쾅하는 것 말이요? 그곳은 저쪽으로 가야지" 하며 고맙게도 정문 밖으로 나와 팔레스타인 운전기사에게 길을 자세히 가르쳐준다.

문제의 디모나 핵발전소는 식당주인이 가르쳐준 방향과는 정반대로, 디모나 동남쪽으로 25km쯤 떨어진 네게브 사막에 자리하고 있다. 넓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핵발전소 부지는 매우 넓다. 주변 도로를 차를 타고 10분쯤 달려야 끝이 보일 정도다. 주변은 이중으로 철조망으로 둘러쌌고,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작동 중이다. 길가엔 촬영금지, 정차금지 팻말들이 곳곳에 보인다. 아울러 주변 언덕엔 감시초소들이 들어섰다. 이스라엘 정부가 그곳을 특급 보안지역으로 정해놓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팔레스타인 운전기사는 우리 일행의 취재 의도를 짐작했는지, 매우 불안해 하는 모습이다. 멀리 햇볕에 빛나는 둥글고 하얀 돔을 찍기 위해 차를 천천히 몰라고 하면, "감시 카메가 우리를 보고 있다"고 대꾸한다. 그러면서도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늦춰준다. 그가 이스라엘 운전기사였다면? 아마도 당국에 신고를 했을 것이고, 모사드에 연행돼 문초를 당하거나 최소한 카메라 필름을 빼앗겼을 것이다.

***바누누와의 짧은 만남**

이스라엘 핵개발 사실을 폭로,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핵 베일이 벗긴 인물은 모르데차이 바누누(50)다. 1985년까지 디모나에서 9년 동안 기술자로 일했던 바누누(당시 32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독립국가를 이룰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펴다 해고당했다. 그러나 당시 디모나 지하에 있는 제2작업장에서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과 리튬, 그리고 베릴륨 생산라인에서 일했던 바누누는 이미 비밀리에 찍은 필름 두통을 갖고 있었다. 1986년 그는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 기자에게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진을 건네주고 인터뷰를 했다. 그의 폭로로 디모나 원자력연구센터가 그동안 섬유공장으로 위장한 채 핵무기를 만들어 왔음이 분명해졌다.

그로써 바누누는 혹독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나라 바깥을 떠돌던 바누누는 영국 런던에서 미모의 여인 꾐에 빠져 이탈리아 로마로 갔다가, 모사드 요원들에게 체포당했다. 여인의 정체는 이스라엘 해외정보기관인 모사드 소속이었다. 이스라엘로 압송돼온 바누누는 18년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보수적인 유대교 신자인 바누누의 부모는 그를 가리켜 "조국의 배신자 자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며 의절(義絶)했다. 바누누를 보는 이스라엘 사회의 분위기는 양쪽으로 갈렸다. 그에겐 '배신자' 또는 '양심의 목소리'란 극단적으로 다른 평가가 내려졌다. 이스라엘 좌파정당인 노동당 지도자이자 노벨평화상(1993년) 수상자인 시몬 페레스조차 그를 '배신자'라 여긴다.

독방에서 가혹한 옥살이를 한 바누누는 그 흔한 감형도 없이 형기를 다 채우고 지난 4월22일 이스라엘 남부 아슈켈론 쉬크마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그곳은 팔레스타인 정치범들이 많이 갇혀있어 규율이 삼엄하기로 악명이 높다. 우리로 치면 일제 식민지 아래 대전형무소 같은 곳이다. 옥중의 바누누는 유대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믿음을 바꾸었다. 출옥해서도 바누누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현재 예루살렘의 성조지 성공회성당에 몸을 맡기고 있는 바누누가 쓰는 전화와 인터넷을 도청 감시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외국인들을 만나거나 특히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도 금지 당했다. 이를 어길 경우 체포될 것이란 경고도 받았다. 18년 전 바누누를 인터뷰했던 영국 <선데이 타임스> 기자 피터 후남은 풀려난 바누누를 다시 만난 뒤 곧 추방당했다.

디모나를 다녀오던 날 오후, 바누누를 만나 짧은 인터뷰를 가진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그가 외국기자들과 만나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그가 머물고 있는 예루살렘의 성조지 성공회성당으로 갔다. KBS <일요 스페셜> 팀(장영주 PD)과 함께였다. 그랬더니 그가 성당 마당을 산책하며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미스터 바누누!" 하고 불렀다. 그가 다가왔다. 성당 경비가 "이러면 곤란하다"고 중간에서 막았다. 일단 그는 뒤로 물러서더니, 성당 부속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바누누가 다시 나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는 5분쯤 뒤 다시 나왔다. 다음은 굳게 잠긴 성당 쇠창살 문을 사이에 두고 주고받은 짧은 대화다.

-이즈음 심경은 어떠한가.
"편하지 못하다. 이스라엘 당국이 바깥출입은 물론 사람들과의 만남을 제한하고 있는 탓이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를 '배신자'로 여기지만,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 (이스라엘 당국은) 오랫동안 나를 가두었어도 나의 정신만큼은 가두지 못했다. (18년 옥살이라는) 가혹한 대가를 치렀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핵무기 개발 사실을 폭로한 이유는?
'(중동 땅에서) 또다른 홀로코스트(대학살)가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그런 일을 했다. 나는 바깥 세상에다 디모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리려 했을 뿐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구실 가운데 하나가 대량살상무기(WMD)였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이즈음 이란과 북한의 핵무기개발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IAEA가 이스라엘에 대한 핵무기 사찰을 벌여야 한다고 보는가.
"IAEA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는 국제사회로부터 이중잣대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바누누는 자신을 '배신자'라 손가락질 하는 이스라엘을 떠나고 싶어한다.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길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당국은 바누누가 여권을 가질 수 없도록 했다. 따라서 그는 출국 자체가 금지된 상태다. 밀항 가능성을 막으려고 당국은 바누누로 하여금 항구도시는 물론 바깥을 멀리 나다닐 수 없도록 했다. 앞으로 그는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캠페인을 벌여나갈 생각이다. 그는 (이라크 오시라크 핵발전소가 1981년 이스라엘 공습에 파괴된 것처럼) 없애야 할 것은 바로 디모나 핵발전소라 여긴다.

***"전투기 네 대가 나타나 폭격했다"**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국들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극도의 신경을 써왔다. 그 좋은 보기가 1981년 6월7일 이스라엘 메나헴 베긴 수상의 명령 아래 이뤄졌던 이라크 오시라크 원자로를 공습이다. 1970년대 후세인은 프랑스 정부를 설득, 프랑스 핵개발 모델을 따라 바그다드에 가까운 알-투에세 지역에다 투와이타 핵개발센터를 세웠다. 그 핵심시설이 40메가와트 규모의 오시라크 원자로였다. 이스라엘도 디모나 핵발전소 설비를 같은 프랑스에서 비밀리에 들여왔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당시 사담 후세인은 막 벌어진 이란과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레이더를 피해 낮은 고도로 1,100km를 날아온 이스라엘 F-15, F-16 전투기들의 기습공격에 대공포도 제대로 못 쏘고 당했다. 불과 80초만에 수십억 달러를 들여 지은 오시라크 원자로가 파괴됐다. 이스라엘 공습은 당연히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미국마저도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공습행위를 비난하는 유엔결의안에 찬표를 던졌을 정도였다.

오시라크 원자로는 바드다드 시내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있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이라크 경찰이 길목을 막는다. 통역 카짐이 재치 있게 말했다. "오시라크를 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저편에 있는 에시타르 마을에 가는 길이다" 카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에시타르 마을은 오시라크에 바로 붙어있는 마을이다. 그곳 마을에 들어서니, 황량한 들판에서 농사를 짓는 가난한 이라크 농부들이 살고 있다.

그 마을에서 23년 전 이스라엘 공습을 봤다는 살렘 무신(67) 노인을 만났다. "당시 나는 이라크 산업부 소속 운전기사로 일했는데, 이른 저녁시간에 (기록에 따르면 오후 5시35분) 하늘에서 전투기 네 대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곧 굉장한 폭음이 일어났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결국 오시라크 현장에 다가갈 수는 없었다. 다시 이라크 경찰에게 가는 길이 막혔다. 이번에는 "오시라크로 가려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자 무전기로 어디론가 연락을 하더니, "미군이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때문에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얘기다. 바깥 담벼락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바그다드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도대체 미군은 그곳 오시라크 부지에서 뭘 하고 있는가. 이라크 침공 뒤 못 찾은 WMD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는 것인가...

***미국의 이중잣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따른 사담 후세인 정권 몰락은 중동지역의 군사적 지형(地形)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한마디로 '군사력 균형의 결정적 붕괴'를 몰고 왔다. 40만 대군을 유지하던 아랍권의 군사강자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 이슬람권의 군사력과 이에 맞선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들 사이의 극단적인 군사적 불균형은 바로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에서 비롯된다.

앞서 바누누가 지적했던 바처럼, 아랍 국가들은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스라엘의 핵무기 보유, NPT 미가입에 대해선 시비를 하지 않고 이란에 대해서만 시비를 걸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핵무기가 중동 지역 안정에 큰 위협"이라 주장해왔다. 바로 여기서 IAEA를 사실상 지배하는 미국의 '이중잣대'가 드러난다. 친미국가인 이스라엘의 핵보유와 그렇지 않은 나라들의 핵개발 노력을 다르게 재는 이중잣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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