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법안 통과를 위한 타협 탓에 애초의 구상에서 많이 후퇴했고, 일부 전문가들은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다는 비판까지 했다. 그러나 연구를 위해 미국에 잠시 체류하고 있는 필자의 눈에도 이날의 역사적 의미는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 지난 21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의회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의료보험제도 개혁안의 필요성에 대한 연설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
100년 만의 의보개혁, 신선한 충격
우선 세계최강의 선진국에서 무려 5400만명이 의보가 없는 상황에서 3200만명을 의보대상자로 함으로써 향후 미국 시민 모두가 의보혜택을 받을 길을 열었다. 시장만능주의가 지구를 휩쓰는 가운데 그 심장부 미국에서 의료의 '공공성'을 중시하는 철학이 일정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번 의보개혁은 빈곤한 계급계층에게 의료제공을 확대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내실화를 뜻하며, 더구나 의회 예산국의 공식 보고에 따를 때 장기적으로 정부 재정부담과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이는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공화당은 이 명분있는 개혁을 그토록 반대했을까? 이날 표결에서 공화당의 찬성표는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처럼 정당 보스가 개별 국회의원들을 줄세우기로 몰아갈 수 없고 양당협력의 정치를 중시해온 전통에 비추어 중대한 법안 표결에서 상대 당이 만장일치로 반대한 것은 무척 이례적이다.
이 현상에 대한 정확한 원인 진단이 간단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오늘의 공화당이 파당적 이해를 위해 무슨 일이든 서슴없이 저지르는 집단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도 공화당은 클린턴에게 정치적으로 도움될 일이라면 설령 국민에게 유익하더라도 어깃장을 놓는 일이 다반사였다. '테러와의 전쟁'으로 먹고살았다 할 부시 행정부 8년의 일방적 독주도 당연히 대화와 설득, 타협의 양당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패거리 정치' 물리친 정책의 승리
상·하원에서 모두 다수당의 지위를 잃고 대선에도 패배한 공화당과 그 주변의 이익단체, 지지자 집단에는 양당협력에 적대적인 정치문화와 이념적 아집이 깊이 뿌리내린 상태다. 공화당 상원 지도자 미치 머코넬(Mitch McConnell)이 지난 15개월간 견지한 전략은, 당의 단합만이 다음 선거의 승리를 가져온다면서 자당 의원들이 양당정치적 활동으로 미디어의 조명을 받을 유혹을 버리게끔 다독이는 것이었다. 어느 면에서는 노무현정권의 주요 개혁을 효과적으로 좌절시킨 당시 소수야당의 행태를 빼닮았다.
오바마는 양당협력을 강조하면서 조심스러운 중도파적 행보를 유지했지만, 돌아온 것은 '연방정부의 비대화'를 거부한다는 무차별적 공격이 조장한 대중들의 부정적 여론뿐이었다. 한때 오바마는 임기 초의 엄청난 지지율과 (때이른 노벨평화상 수상이 입증하는) 국제적 기대가 뒷받침한 정치적 자산을 아예 잃어버릴 지경까지 몰렸다.
의보개혁의 승리는 정치공학이 아닌 진실의 승리, 오바마의 말대로 "좋은 정책이 좋은 정치"(Good policy is good politics)라는 금언의 실천이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법안 통과를 위한 대통령의 결의에 찬 노력은 늦은 감은 있지만 인상적인 것이었다.
이민법과 일자리, 두마리 토끼 잡아야
그런데 의사당에서 의보개혁 법안이 막바지 진통을 겪고 있던 바로 이날, 미국 각지에서 수만명이 수도 워싱턴에 모여들어 이민법 개정 촉구 집회를 열었다. 의보개혁 싸움의 와중에서 주요 대선공약인 이민법 개혁은 별로 논의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물경 1200만명에 달하는 '불법이민자' 문제의 해결 요구가 끓어오르고 있다.
불법이민자 문제는 의보개혁과 달리 단순한 국내문제가 아니라 현 세계체제의 양극화와 직결된 난제 중 난제다. 의보 싸움이 초래한 양당의 깊은 골과 국론분열 때문에 이민법 개혁이 더욱 어려움에 처한 것은 이날 집회를 주도한 세력들도 인정할 정도이며, 이 과제가 양당협력 없이 해결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오바마가 과연 이 쟁점에 관해 어떻게 양당협력을 강제하면서 의미있는 작품을 생산하느냐다. 얼마전 두 정당의 상원의원인 찰스 슈머(C. E. Shumer)와 린지 그레이엄(L. Graham)의 양당협력적 초안이 제출되었다. 백악관의 일차적 반응은 물론 호의적이었다. 실제 이민법 개혁은 부시도 2007년에 법 개정을 시도하다가 포기한 뜨거운 의제이며, 이 문제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무능과 비전 결여가 2008년 선거 참패의 한 원인임은 알려진 사실이다. 오바마는 이민법 개혁을 약속함으로써 1000만명 가까운 중남미계 유권자를 대선 투표장으로 이끌어냈다고 평가된다.
실업문제와 뒤엉킨 뿌리깊은 인종주의
미국인 일반, 특히 백인들은 '인종주의'를 입에 올리기조차 꺼리지만, 의사당 밖의 의보개혁 반대 시위자들이 흑인의원을 향해 거침없이 '깜둥이'(nigger)라고 외치는 모습에서 그들 속마음에 도사린 인종적 적대감을 읽을 수 있다. 이민법 논의는 외부의 테러위협에 대한 히스테리적 공포나 불법체류자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근거가 박약한) 대중의 편견을 부채질하면서 교묘하게 인종주의적 증오와 편협한 계급 이해를 정당화하기 쉬운 쟁점이다.
그러나 이민법 개정을 포기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다. 이민법 개혁과정은 올 11월 중간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오바마가 이 사안을 놓고 정치적 주도권을 잡지 못하면 야당은 의보개혁 갈등의 후유증을 증폭시키고 연방정부와 월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부추겨 총공세에 나설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백악관과 민주, 공화 양당이 모두 정치공학에 함몰되고 말지 아니면 개혁다운 개혁을 성취해낼지 지켜볼 일이다.
법 개정의 구체적 윤곽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미 미국 내에 자리잡은 불법체류자와 그 자녀들의 신분을 합법화하는 폭넓고 과감한 조치가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 불법체류자가 미국 시민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 아니라 미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는 점, 불법체류자의 불법고용에서 비롯되는 저임금, 탈세, 각종 편법 등의 해결은 원활한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제 여건 조성의 밑거름이라는 점을 오바마와 민주당은 설득해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민법 개혁을 실업대책과 연결시켜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민주당정권의 작품인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을 평가하고 재고하는 데까지 나아갈지는 미지수지만.)
세계의 이목 집중된 미국 민주주의의 기로
오바마가 미래의 경제위기 재발을 예방할 금융개혁에 성공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처음부터 많지 않았다. 상층 엘리트 대다수는 시장만능주의의 신봉자이며 양대 정당은 너나없이 돈줄에 얽매여 있다. 또다른 주요 의제인 교육개혁 역시, 대통령이 실적이 부진한 학교 교사를 전원 해고한 결정을 지지할 정도로 시장주의적 성향이 강해 전망이 불투명하다. 또 지난 정권하에서 자행된 고문과 인권침해 등 위법행위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법적 심판이 후순위로 밀려버림으로써 장기적으로 극우세력에게 끌려다닐 빌미가 남게 되었다. 병력을 증강하고는 있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암울한 전망과 북핵문제 해결이라는 난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민법 개혁은 오마바 행정부의 두번째 승부처다. 국내 개혁이 합격점을 받아야 대외정책 전환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점에서 오바마의 행보는 세계인의 관심사이다. 또 파당적 이해만 앞세우는 공화당과 극우세력의 무서운 단결력과 실행력은 우리 정치의 앞날을 위해서도 깊이 되새길 일이다. 지난 1월 연방대법원이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를 들어 기업의 정치자금 사용제한을 위헌 판결한 일은 미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운 기로에 서 있는지 실감나게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보편적 권리를 지키려는 이들이 더욱 튼튼하고 정교하고 광범위한 연대의 정치를 구축하는 데 투신해야 할 엄중한 시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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