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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에서 생각하는 동아시아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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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에서 생각하는 동아시아 공동체

[창비주간논평] 동아시아 미래에 대한 희망의 증거

지난 1월 어느 아침, 객원교수로 초청받아 머물던 큐슈(九州)대학 국제교류센터의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뉴스를 대했다. 후쿠오카(福岡)의 초등학생들이 부산과 후쿠오카 두 도시의 교육위원회가 공동제작한 부교재를 수업중에 사용하는 장면이었다.

동아시아인들의 교류와 연대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나는 하도 반가워 그 교재 <좀더 알고 싶은 후쿠오카·부산>을 구해보았다. 두 도시가 작년 행정교류도시 체결 20주년을 맞아 공동제작한 초등학교용 책자로서 "서로의 역사와 문화, 생활이나 습관, 교류의 모습 등"에 대해 학습하도록 내용이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두 도시 초등학교 공동교재에서 발견한 '情'

그 교재를 학습한 학생들이 무엇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뒷표지에 디자인되어 있는 '情'이란 로고에서 깊은 마음의 울림을 느꼈다. 정이란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이다. 서로에의 정이 키워질 때 바로 상대의 삶과 생명을 배려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21세기 평화와 화해의 동아시아 미래사를 쓰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공생(共生)의 감각'이다. 그것이 국경을 넘어 일상생활에서 확산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일본에서는 정권교체 이후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일본은 물론 아시아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내가 후쿠오카에서 지난 겨울을 보내면서 지켜본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관심의 밑바닥에는 급성장하는 중국에 대한 짙은 초조감이 있는 것 같다.

일본의 초조감, 끝나지 않은 '시간과의 경쟁'

어느날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한 자동차 회사 스즈키의 스즈키(鈴木修) 회장은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을 추월한 것에 대해 질문을 받자, 일본을 정신 차리게 자극을 줘 고마운 일이라고 답하는 장면을 본 적 있다. 잠자는 토끼를 깨워준 거북이에게 감사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일본을 건강하게 하자'라든가, '일본은 힘이 있다'라는 언설이 일본의 매스컴에 크게 주목받게 되고, 시바 료오타로오(司馬遼太郞)의 러일전쟁 관련 소설과 사카모토 료오마(坂本龍馬)가 드라마를 통해 지금 다시 불려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버블경제 이후 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에 비해 활력있던 메이지 시기를 그리워하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나는 지난 세기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모두 겪은 '시간과의 경쟁'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근대화에 조급해하는 그 과정에서 일본은 제국과 패전을, 중국은 내전과 혁명을, 한국은 피식민과 분단을 겪었다.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강대국의 꿈에 사로잡혀 시간에 쫓기는 악성경쟁의 덫에서 벗어나 공생의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동아시아 주변으로서의 일본사

여기서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연초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교수가 일본 <시소오(思想)> 1월호에 발표한 글에서 제시한 통찰을 우리 모두 한번 숙고해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는 일본에 있어서 역사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패러다임인 '동아시아의 중심으로서의 일본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주변부로서의 일본사'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할 때라고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의 발언은 일본을 향한 것이지만, 단지 일본인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인 누구나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중의 주변의 눈' 즉 서구 중심의 세계사 전개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한 동아시아라는 주변의 눈과 동아시아 내부의 위계질서에서 억눌린 주변의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강조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이 눈을 체득해야만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새로운 지역질서를 이룩할 수 있다.

'주변의 눈'과 '공생의 감각'을

동아시아 공동체는 국가간 협력체를 제도적으로 추진하는 움직임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아래로부터 '공생의 감각'을 몸에 익힌 개인들이 다층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움직임이 받쳐주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광역교역권을 형성했고 현재도 이 지역 교류의 거점인 큐슈의 후쿠오카 초등학교 현장에서 싹튼 작은 시도가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동아시아 미래사를 향한 이 희망의 증거를 키워나가는 일은, 올해로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일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60주년, 4·19혁명 50주년과 5·18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은 한국인을 비롯한 동아시아인 모두가 각자의 현장에서 저마다 수행해야 할 역사에 대한 과제일 것이다.

* 이 글은 일본 일간지 <아사히신문(朝日新聞)>(2010.3.18일 전국판 석간) 기고칼럼을 한국독자들을 위해 가필한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미야지마 교수의 논문은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5월 중순 출간 예정)에 번역 게재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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