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법정 주 최대 노동시간이 89년에 이어 4시간 단축한 40시간으로 바뀔 무렵, 나는 전체 직원이 200명이 채 안 되는 공장자동화 장비 회사에서 CNC와 로봇 응용설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금속노조 지회가 있던 사업장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입사 직전에 와해된 상태였다.
CNC는 선반이나 밀링과 같은 공작기계를 최소 1000분의 1mm 단위로 정밀하게 제어하는 장치인데, 로봇 시스템처럼 쓰임새와 기능이 워낙 다양해 이를 응용한 장비의 개발에서 설치까지 현장 기술지원이 필요한 품목이다.
로봇과 CNC는 사람이 하기 힘들거나 할 수 없는 작업을 대신하는 산업용 장비다. 그 때나 ‘4차 산업혁명’의 상징처럼 각광받는 지금이나 공장자동화라고 하면 아무도 없는 자동차 공장 차체라인에서 수많은 로봇이 요란하게 용접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모든 요소가 정상 작동하기 전까지는 고철더미에 불과한 자동화 장비를 설치해서 시험 생산에 나서기까지는 사람 손이 필요하다.
당연히 엔지니어들은 사람이 견디기 힘든 열악한 조건에서 오작동을 반복하는 로봇이나 CNC 작업을 대신 해가며 마쳐야 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특히,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완성차 공장은 고압적인 원청 관리자의 온갖 갑질을 참으며 라인이 잠시 멈추는 추석이나 설 연휴에 모든 설비 개조 공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신규 라인 증설 경우도 원청 재촉은 덜하지만, 공기 단축에 대한 회사 요구는 매한가지다.
2004년은 회사에서 수주한 완성차 대규모 프로젝트에 기존 개발부서원뿐만 아니라 신입사원까지 모조리 투입해 일해야 했다. 원래 토요일은 상쾌하게 ‘오전 근무만 하는 날’이지만 출장지에서 요일은 아무 의미 없었다. 차체공장과 페인트공장에서 밤낮없이 일하던 나로서는 법이 바뀌었는지,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됐는지는 물론이고 소정 노동시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나중에야 계산을 해보니 이 무렵 내 노동시간은 주당 90시간 정도였다. 토요일, 일요일 없이 밤늦게 퇴근해 잠자고 일어나면 출장지로 달려갔으니 당연하다. 그나마 새벽 1시에 작업을 마치며 ‘오늘은 정시 퇴근’이라던 IMF 시절처럼 애써 일거리가 많음을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한편, 신입사원들은 엔진 가공라인 공사를 담당했다. 엔진공장은 절삭유가 안개처럼 떠다녀 피부가 약한 사람은 금세 문제가 생긴다. 오랜만에 본 한 신입사원 얼굴 전체가 벌겋게 심한 염증으로 뒤덮여 있어 병원이라도 가라고 하니 “병원 갈 시간이 있어야죠”라고 했다. 그가 털어놓는 일상은 아침에 출근해 밤샘 노동에 이어 다음날 저녁까지 일한 뒤 퇴근하는 무박2일 노동의 연속이었다. 대략 주당 120시간 노동을 강행하고 있었다.
옛날 회사 얘기를 이처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얼마나 힘들고 열악하게 일했는지를 회고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동화 설비 개발과 현장 작업은 무척 매력적인 일이다. 문제는 법정 최대 노동시간을 48시간에서 44시간에 이어 40시간으로 줄이든 말든, 휴일노동을 법정노동에 포함시키든 말든, 노조가 없는 300인 미만 사업장에 근로기준법이 애초 취지대로 작동되기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법정노동 ‘한도’는 엄연히 주당 40시간이지만 한국은 언론조차 연장노동까지 포함한 주 52시간이 표준인 것처럼 통용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은 최소한의 노동조건이지만 실제로는 최대조건으로 참고하는 실정이고, 벌금과 단속이 아니면 ‘법은 법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것이 대다수 사용자 입장이다.
내년 1월 1월부터 300인 미만 사업장에 적용하는 주 최대 52시간 노동제는 이와 크게 다를까.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타고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 집행에 나서도 모자랄 판에 물량 변화가 예상되면 탄력근로제, 예상 안 되면 특별연장근로라는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서야 노조 없는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주 40시간 노동 제한은 여전히 현실 너머 공상에 불과하다.
민주노총이 얼핏 양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탄력근로제에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는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사회적 노력 없이 40%에 불과한 산재인정률로 통계에 잡힌 매년 370여 명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 사망자를 구해낼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전 국민 시선이 쏠린 방송에 나와 이미 포기한 최저임금 1만원과 무력화 방안을 내놓은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며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할 때가 아니다. 고용‧임금‧노동조건이라는 3대 노동의제에 대해 정부와 국회가 구호가 아닌 의지와 전략을 갖추고 정책실행을 하지 않고서는 사람 사는 세상이든, 노동존중 사회든 노동자는 언제나 자본과 정치 논리의 희생양 신세일 뿐이다.
집권 후반기를 맞은 문재인 정부가 혹시라도 4차 산업혁명의 위기와 기회를 내세우며 이 정도 희생과 양보는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만은 거두기 바란다. 박근혜 정권에 이어 ‘묻지 마 노동개악’을 외치는 이들이 나열하는 AI, 데이터 분석, 기계학습, 로봇 기술, 다품종 소량생산 등의 개념들은 10여 년 전 엔진공장에서 주 120시간 노동을 하던 신입사원들도 익히 듣던 업무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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