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팎으로 '불평등'이 문제다. 미국이 방위비분담금을 기존의 6배인 6조 원으로 인상하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고,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연장하라는 내정간섭까지 하며 우리 국민의 분노를 돋구고 있다.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바꿔야 한다는 요구는 2002년 효순이·미선이 촛불과 2008년 광우병 촛불 당시에도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과거 조선을 침략한 일본 아베정권은 강제징용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하라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거꾸로 무역제재를 하고 있다. 둘 다 국가와 국가 간의 공정하고 대등한 관계로 결코 볼 수 없다.
현 정권이 검찰개혁을 위해 인사를 단행한 전 법무부 장관의 비위가 밝혀지며 광장의 촛불이 둘로 나뉘었다. "검찰개혁"과 "정권퇴진" 각 구호에 의도적으로 빠진 사회 모순이 분명히 존재한다. 빈부격차에 따라 교육특혜가 차별되는 현실, 즉 계급문제로 대두된 사회적 불평등 문제다. 장관 한명의 잘잘못을 넘어 우리 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이 극복하기 불가능한 구조적 격차. 계급에 따라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터져 나온 분노는 검찰개혁과 정권퇴진 양측 구호 사이에서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불평등'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망적인 낭떠러지 사회다.
지구 반대편 칠레에서는 지하철요금이 50원 올라 수도 산티아고의 광장이 불타고 수십 일이 다 되도록 거대한 시위가 이어졌다. 지하철은 누가 탈까? 어느 나라든 부자는 대중교통을 타지 않는다. 2008년 당시 대선후보인 현대재벌 2세 정 모씨의 "버스 한번 탈 때 70원 하나?" 발언은 여전히 인터넷에 박제돼 있다. '50원'이라는 인상액이 중요한 게 아니다. 빈부격차도 심각한 데다 민영화된 수도, 전기 등 비싼 생활물가에 고통 받는 칠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또 다시 부담을 떠넘겼기 때문이다. 시위가 격화돼 APEC 회의마저 취소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공권력으로 시위대를 억압해도 ‘불평등’에 대한 칠레 민중들의 분노는 점점 더 번져나가고 있다.
왜 절대다수의 분노가 사회변화의 요구로 수렴되지 못할까.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답은 간단하다. 현재 정치와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세력들에게 그럴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정권 퇴진과 함께 청산됐어야 할 적폐정당은 늘 그래왔듯이 5.18항쟁을 비롯한 민주화 역사를 폄훼하고,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비웃고, 사회적 소수자들의 평등 요구를 조롱한다.
촛불정부를 자임한 집권여당은 어떠한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철폐,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 노동존중사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은 깨진지 오래다. WTO개도국지위마저 포기해 우리농업과 농민들은 남은 희망마저 잃을 수밖에 없다. 당장 일하고 살아야 할 소중한 삶터를 개발이란 명목 아래 파괴하는 강제철거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권리조차 박탈한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간단하다. 안팎으로 불평등한 사회를 견디며 살아갈 것인가, 적폐정권을 퇴진시킨 힘을 다시 한데로 모을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세계경찰국가를 자임하더니 이제는 자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우리에게 전쟁비용을 떠미는 미국, 침략범죄를 인정하고 사죄하고 배상하기는커녕 무역제재로 협박하는 일본.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노동자들의 눈물, 자식처럼 키운 농작물을 거리에 내팽개치는 농민들의 마음, 삶을 이어나갈 터전이 부서지고 쫓겨난 빈민들의 서러움. 각자의 싸움이 따로 떨어지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야 한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물론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운동은 하루아침에 완성될 수 없다. 박근혜퇴진촛불에 마중물로 민중총궐기를 일으켜냈듯이, 지금 우리에게는 시작점이 필요하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구원은 없고, 우리의 고통스러운 삶을 누가 대신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열흘 뒤에 노동자와 농민과 빈민을 앞세워 불평등 사회를 바닥부터 갈아엎자는 사람들이 모인다. 스스로 '민중'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시작점은 11월 30일, 광화문광장이다. 2020 총선을 앞둔 시점, 불평등을 넘어 ‘희망’을 찾기 위한 출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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