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정치는 어쩌다 2016~2017년 촛불 민의를 외면하고 다시 익숙한 정치문법으로 되돌아갔을까. 지난해 초 '대한민국 주류교체론'이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져 반향을 일으켰던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박성민 대표를 만나 중간 결산을 해봤다.
결론부터 말해, 박 대표는 주류교체 전쟁의 결정적 승기를 잡았던 집권세력이 '2017년 체제', 즉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광장의 요구를 제도로 완성해내지 못한 탓이다.
그는 "문 대통령은 새로운 대한민국에 부합하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어야 했다. 헌법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개혁을 담대하게 했어야 한다"며 탄핵에 동참한 세력을 포괄하는 통치연합을 구축했다면 "자유한국당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낼 수 있었다"고 했다.
박 대표는 집권 세력이 절호의 기회를 놓친 이유를 "정체성과 적폐 청산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선거 때는 외연확장을 하다가 집권 후 곧바로 정체성, 정통성에 매몰돼 위기를 맞은 역대 정부와 패턴이 같다는 것이다.
'조국 사태'가 결정타가 됐다. 박 대표는 "(조국 사태는) 오류나 실수가 아니라 국정 운영에서 의사결정과 전략적 판단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들킨 것"이라며 그로 인해 "(문재인 정부의) 아우라가 벗겨지고 '절대반지'가 사라졌다. 회복이 어렵다"고 진단했다.
그는 문 대통령이 조 전 장관을 임명했던 배경으로 "친문 직계 대선 주자가 있어야 레임덕도 막을 텐데, 현재 뚜렷한 차기 주자가 없는 문제가 있다"며 "그런 초조감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86세대의 정치 행태에는 직설적인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박 대표는 "통찰도, 성찰도 20년 전만 못하다보니 모두가 현찰만 쫓는다"며 "(86세대는) 지적으로 게을러졌고 도덕적으로는 해이해졌다"고 했다.
자유한국당을 향해선 "청산 가치가 존속 가치보다 훨씬 크다"며 체념에 가까운 진단을 내렸다. 그는 "김세연 의원이 한국당을 '존재 자체가 민폐'라고 했는데, 기업 같으면 구조조정 대상"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
황교안 대표가 던진 보수통합론에 대해서도 "(유승민 의원이)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던졌으니 감동도 없다"며 "통합도, 혁신도, 선거 승리도 회의적인 상황이 됐다"고 했다. 현재 진행 중인 황 대표의 단식 투쟁에는 "지금은 머리를 쓸 때이지 몸을 쓸 때가 아니"라고 비판했다.
박 대표는 주류교체 전쟁의 최종 승패는 "다음 대선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했다. 그 전초전 격인 내년 총선에 대해선 여권의 승리를 점치는 다수의 관측과 달리 "지금 나오는 여론조사보다 민주당 상황은 좋지 않다"고 진단했다.
집권 후반기에 치러지는 총선의 성격이 현정부 심판인 만큼, "내년 총선의 기본 정서도 반(反)문재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지금까지 세 번 연달아 전국단위 선거를 몰아준 적은 있어도 네 번을 몰아준 적은 없다"고 민주당에 경고했다.
그렇다고 지금의 한국당이 '반사이익'을 고스란히 챙길만한 처지도 아니다. 박 대표는 과거 총선에서 전권을 장악해 공천을 주도한 '박근혜 비대위'와 '김종인 비대위'를 언급하며 "비상계엄 상황처럼 임하지 않으면 못 이긴다"고 했다. '황교안 체제'로는 총선 전망이 서지 않는다는 뜻이다.
박성민 대표 인터뷰는 박인규 <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이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2017 체제, 새로운 대한민국은 오지 않았다"
프레시안 : 지난 2년 6개월을 돌이켜보면, 2016~2017년 촛불로 드러난 민의가 정치 과정에 제대로 투영됐는지 의심스럽다. 탄핵 연대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정치연합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특히 조국 사태를 겪으면서 정치는 촛불 민의로부터 더 멀어졌다. 어쩌다 촛불 민의와 실제 정치가 괴리됐다고 보나?
박성민 : 2016년 뜨거웠던 촛불은 광장을 상징한다. 그해 12월 9일 국회의원 234명이 탄핵안에 찬성하고 이듬해 3월 헌법재판관 8명이 만장일치로 탄핵을 인용함으로써 완성된 것이다. 촛불보다 선거가 더 힘이 세고, 최종적으로는 제도화가 가장 강력하다.
과거정부와 비교하자면, 이승만 정부 붕괴 뒤 5.16 쿠데타가 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에는 곧바로 12.12 사태가 발생했다. 촛불이 좌절한 사례들이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촛불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으로, 2016년 촛불은 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촛불이 투표로 대통령을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제도화에는 실패한 사례다. 1987년 민주항쟁은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유일한 사례다. 비록 군 출신인 노태우가 당선되었지만 헌법을 바꿔 불가역적인 제도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새로운 대한민국에 부합하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었어야 했다. 헌법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개혁을 담대하게 했어야 한다. 임기 초 상당수 정치세력이 동참하는 개혁연대가 가능했다. 연정이든 협치든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정치적 조건도 뒷받침됐다. (노무현 대통령 때와는 달리) '상왕' 같은 전직 대통령들의 영향력이 전혀 없고, 야당도 지리멸렬한 데다 여당 내에서도 누구도 대들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유일하게 '국가지도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 조건을 제대로 활용했다면 외연을 확장해 통치연합을 이루고 자유한국당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낼 수 있었다. 탄핵에 동참했던 야당에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하지 않았다. 결국 촛불이 기대했던2017 체제, 새로운 대한민국은 오지 않았다.
프레시안 : 안 한 건가, 못 한 건가?
박성민 : 그것까지 해석하지는 않겠다. 다만 모든 대통령은 자신의 정체성, 정통성을 강조한다. 선거 때는 그것만으로는 당선될 수 없기 때문에 외연확장이라는 걸 한다. 김영삼의 3당합당, 김대중의 DJP연합,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공약 등이 그 예다.
김영삼 이후 역대 대통령들의 위기는 당선 뒤 자기 정체성으로 돌아갈 때 왔다. 김영삼은 전두환‧노태우를 구속시키면서 왜소해졌다. 김대중은 김종필과 갈라서면서 위기가 왔다. 노무현 은 대북송금특검과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자신을 지지했던 호남과 갈라서면서, 이명박은 박근혜와 공천으로 갈등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박근혜는 당선되자마자 바로 자기 정체성으로 돌아갔다. 오히려 정통성이 별로 없었던 노태우가 3당 합당으로 통치연합을 넓혔던 유일한 대통령이다. 그 바탕에서 북방정책 등이 가능했던 점은 역설적이다.
다들 정통성을 강조하다보니 청산을 제1과제로 내세웠다. 김영삼은 최초의 문민 대통령으로서 군부독재 청산, 김대중은 최초의 정권교체 대통령으로서 보수 잔재 청산, 노무현은 서민의 대통령으로서 기득권과 엘리트 정치 청산, 이명박은 정권을 찾아온 대통령으로서 좌파 청산, 박근혜는 보수대통령으로서 종북 청산을 했다. 과거 청산하다가 진짜로 해야 할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쳤다. 그나마 노회한 김영삼, 김대중은 집권 초에 어느 정도 개혁을 했지, 다른 대통령들은 당선과 함께 바로 자기 정체성으로 돌아갔다.
적폐 청산을 앞세운 문 대통령도 정체성 문제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이번 조국 파동에서도 그 정체성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위험해 보인다. 자기 정체성으로 돌아가려는 건 인간의 속성이다. 기업은 생각과 목표가 같은 사람들 사이에 합의를 추구한다. 하지만 정치는 다르다. 적대적인 사람들과도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다.
'75%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다. 75%의 지지를 얻으면 나머지 25%는 잠잠해진다는 것이다. 박근혜 탄핵 당시에도 처음엔 말들이 많았지만, 80% 넘는 여론이 찬성하니 반대론이 조용해졌다. 그 정도면 민의로 해석해도 된다는 뜻이다. 국회의 탄핵 소추와 헌재의 인용도 그걸 의식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도보수라고 하든 합리적보수라고 부르든, 3당 합당 이후 한국의 주류이자 상수이던 보수에서 이탈한 스윙보터까지 끌어안아 80%가 참여하는 '2017년 체제', 혹은 '2018년 체제'를 문 대통령은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지 않았던 건 전략적 패착이다. 역사적으로 회한이 남을 것이다.
프레시안 : 촛불의 제도화라는 의미에서, 비록 무산됐지만 대통령이 임기 초에 개헌안을 냈다.
박성민 : 처삼촌 벌초하듯이 했다. 아마도 청산 대상을 왜 살려주나 하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정말 제대로 할 생각이었으면 국가원수로서 헌법을 바꿔야 한다고 호소하고, 정치지도자연석회의 같은 걸 제안해 초당파적으로 추진했어야 한다. 2016년 총선으로 다당 체제가 만들어진데다 대통령까지 바뀌었을 때 리더십을 발휘했어야 했다.
프레시안 : 적폐청산이 너무 장기화되면서 좀 과도해 보이기도 했고, 어떤 면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의 발현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다.
박성민 : 역대 정부에서 관행처럼 행해지던 특수활동비를 지원받은 것이 구속까지 시킬 일인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원(舊怨)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국민들이 이 정부에 기대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지 않았나. 그보다는 문 대통령이 약속했던 새로운 대한민국,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주력했다면 엄청난 레거시(유산)로 남았을 텐데 아쉬움이 많다. 지금 검찰개혁을 하겠다고 하는데, 이 정도 검찰개혁이 얼마나 굉장한 업적이 되겠나 싶다.
정체성과 청산에 대한 강박관념에 문 대통령의 성향까지 겹쳤다. 문 대통령은 좋게 말해 원칙주의자다. 열 가지 중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 정치는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것이다. 결과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지지자들에게도 비판받을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이 정부는 반대로 지지자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지자들에게서 비판을 받을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조국 장관은 반대 여론이 많았는데도 임명했으면서 지소미아는 찬성 여론이 높다고 종료 결정을 했다. 국내 정치는 여론에 반응해야 하는 측면이 있지만, 지소미아 같은 외교안보 사안은 여론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거꾸로 됐다.
"86세대 지적으로 게을러졌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졌다"
프레시안 : 조국 사태로 문재인 정부의 속살이 드러났다는 평가다. 어떤 점이 치명적이었는지, 이후 수습은 제대로 되고 있다고 보나?
박성민 :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습되지 않았고 수습이 불가능해 보인다. 사람들은 지소미아 종료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탈원전 정책에 어떤 결정과정이 있었는지 복잡해서 잘 모른다. 그러나 조국 사태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문 대통령의 실수는 국정 운영에서 의사결정과 전략적 판단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들킨 것이다. 실수나 오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들켰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 정부의 상징자본이 훼손됐다. 아우라가 벗겨지고 '절대반지'가 사라졌다. 그래서 회복이 어려운 것이다.
동의 여부를 떠나 검찰개혁이 최고의 국정과제라고 치자. 조국 전 장관이 유일무이한 적임자였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이 숙제를 풀자고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법치와 공정을 훼손시키면서까지 할 일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을 깨버린 것이다. 과거에 진보는 깨끗하지만 무능하고, 보수는 부패했지만 유능하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젠 둘 다 무능하고 둘 다 부패한 세력으로 비쳐진다. 서로 나쁜 것을 배웠다.
현재 여론조사로 드러나는 대통령 국정운영 지지율이 조국 사태 이전과 엇비슷하게 보이지만, 4점 척도를 적용한 조사에선 '매우 잘함'과 '매우 못함'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지지 강도보다 반대 강도가 월등히 높다. 여차하면 등을 돌릴 스윙보터들이 당장은 한국당보다 나은 것 같아 머물러 있는 수준이다. 조국 사태의 문제는 한국당이나 언론과의 긴장이었다기보다 대선에서 문 대통령을 찍었던 지지층이 얼마나 이탈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다른 측면에서, 왜 조국이었을까? 노태우 전 대통령 이래로 차기 대권주자가 없는 계파는 모두 몰락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모두 그랬다. 그 쟁쟁하던 3김조차 왜 차기 대권주자를 못 만들었을까? 5년 단임제이기 때문에 같은 당에서 정권이 재창출된다고 하더라도 정권 교체적 성격이 최소한 30%는 있다. 노태우에서 김영삼으로,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넘어갈 때 모두 그랬다. 현직 대통령 말 잘 듣는 계승자로서의 후임자는 없었다. 문 대통령 입장에서도 친문 직계 대선 주자가 있어야 레임덕도 막을 텐데, 현재 뚜렷한 차기 주자가 없는 문제가 있다. 그런 초조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프레시안 : 조국 사태를 계기로 이 정부의 주역인 86세대를 향해 기득권 카르텔이라는 인식이 강화됐다.
박성민 : 저도 같은 세대로서 우리 세대가 정치에 진출할 때 기대와 우려가 있었다. 우려는 이분법적 진영논리, 타도와 박멸의 적대적 태도, 정치가 아닌 운동을 걱정했는데, 20년쯤 지나서 우려는 절망으로 바뀌었다.
선배 세대는 갈등하면서도 대화했다. 86세대는 20대부터 진영을 나눠 싸운 세대다. 이분법 정치를 너무 극단까지 몰고 가다보니 내 편은 무조건 옳고, 상대는 무조건 틀렸다고 한다. 우리 편의 잘못까지 무리하게 옹호하려고 하니 궤변으로 일관하고 폭력적 언어를 동원한다. 이들에게선 민주공화정의 기본인 퍼블릭이나 리퍼블릭에 대한 개념이 별로 안 보인다.
반면 기대에는 훨씬 못 미쳤다. 그래도 나는 우리 세대가 1990년대부터 사회 각 영역으로 흩어져서 성과를 냈기 때문에 그런 영향을 받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선도할 역량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완전 오판이었다. 솔직히 말해 20년과 비교해 지적으로는 게을러졌고 도덕적으로는 해이해졌다. 통찰도, 성찰도 20년 전만 못하다. 그러니 모두가 현찰만 쫓는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옛날 애기만 한다. 뒤를 보고 걸으면 빨리 갈수도, 멀리 갈수도, 똑바로 갈수도 없다.
청와대 정책실장들이 경제지표가 언제까지 좋아질 것이라고 여러 번 예고했는데, 잠재성장률, 실질성장률이 어떻게 됐나. 북핵 문제도 지금까지 엔드스테이트(최종상태)가 뭔지 아직 모른다. 북한이 거꾸로 엔드스테이트를 내놓으라고 하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지 않고 있으니 과거 '화염과 분노' 같은 상황은 막고 있지만, 당장 비핵화가 될 것처럼 기대감을 부풀렸던 것들은 다 사라지고 없는 상황이다. 이 정부 들어서 확실히 달라졌다고 느낄만한 일이 없다. 그런데도 국정운영은 역대 가장 강력한 '청와대 정부'이고, 집권당에선 민심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고 반대 의견을 누른다. 내부로 곪아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게 더 위험하다.
"한국당, 청산가치가 존속가치보다 크다"
프레시안 : 청와대와 민주당의 위기의식이 사라진 가장 큰 이유는 황교안 대표가 이끄는 자유한국당이 더 죽을 쑤고 있기 때문 아닌가. 탄핵 이후 보수의 퇴행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박성민 : '유승민 파동', 국정교과서 파동, 공천 파동 등이 겹치면서 2016년 총선에서 제1당 자리를 내줬다. 국민의당이 호남에서 민주당을 제치고 제1당이 된 것까지 감안하면 한국당은 더 크게 진 것이다. 내용적으로도 강남, 분당, 부산‧경남이 뚫렸고, 보수의 최후의 보루 대구에서도 두 곳이 뚫렸다. 그 정도로 선거에 패했으면 친박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어야 했는데, 이정현을 당 대표로 만들어버렸다. 정치문법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정무적 판단만 제대로 했어도 탄핵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후 대선에선 홍준표가 나와서 졌다. 그 뒤라도 전열을 재정비 했어야 하지만, 홍준표가 다시 당대표가 됐다. 지방선거에서 또 참패했다. 이렇게 큰 선거에서 세 번 내리 지고 전당대회를 열었으면 혁신을 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탄핵 정부에서 법무부장관, 국무총리를 했던 경험 없는 사람을 모셔와 대표에 앉혔다. 자기들이 만든 대통령들이 감옥에 가도 의원직 그만 둔 사람 하나 없었다.
현재 한국당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황 대표를 불러들인 친박‧친황계는 똘똘 뭉쳐서 이대로 가면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 혁신이란 게 있을 수 없다. 또 다른 그룹은 황 대표가 있는 건 좋지만 선거에 이기기는 어려우니 플러스 알파, 유승민 의원을 데려와 보수통합을 하자고 한다. 그 와중에 지난 6일에 황 대표가 보수통합 카드를 어설프게 던졌다.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던졌으니 감동도 없다. 오히려 황교안 체제가 유지되면 선거에 이길 수 있을까 하는 회의론이 확산됐다. 통합도, 혁신도, 선거 승리도 회의적인 상황이 됐다.
프레시안 : 김세연 의원이 불출마하면서 던진 메시지는 각성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나?
박성민 : 김세연 의원이 충격적 얘기를 한 것인데, 충격을 받지 않는 것이 더 충격적이다. 새누리당 때처럼 그저 분노와 비판의 대상이라면 버틸 수 있지만, 지금 한국당은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다. 보수의 대주주가 없고, '민주당 대 반민주당' 구도에서 자신들은 비주류가 됐는데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살아남을 수 있겠나.
당을 진단할 때, 위기에 동의하나, 위기의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나, 해결책은 무엇인가 수순으로 진행된다. 한국당은 위기에 동의하느냐부터 '아니다'다.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다. 비호감도가 60%를 넘는데도 위기인지 모른다. 유승민 의원이 보수통합 제안을 받지 않으니까 황 대표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이 물밑에서 오가는 것처럼 말했다. 어떻게든 온 몸을 다 던져보겠다고 해도 될까 말까인데, 대단한 무엇이 있는 것처럼 말해버렸다. 그리고는 단식투쟁, 지금은 머리를 쓸 때지 몸을 쓸 때가 아니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전 대통령도 대선 때는 경제민주화 같은 사회가 요구하는 의제를 던졌다. 그런데 지금 한국당은 사회적 요구에 대한 반응성이 전혀 없는 것 같다.
박성민 : 늙은 정당이다. '자유우파'라는 말을 쓰는데, 퇴행적 언어다. 시대를 읽는 눈, 통찰이 없다는 것이다. 팔리지 않는 물건을 계속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당 지지율은 박근혜는 잘못한 게 없다는 사람들과 문 대통령이 너무 싫어서 지지한다는 사람들이 합쳐져서 겨우 20% 나오는 것이다. 미래의 담론이 전혀 없다. 김세연 의원이 존재 자체가 민폐라고 했는데, 기업 같으면 구조조정 대상이다. 청산 가치가 존속 가치보다 훨씬 크다.
"정치는 지지자들에게 욕먹을 용기 있는 사람들이 해야"
프레시안 : 2018년 초에 '주류교체 전쟁'이라는 화두를 던져서 반향이 컸다. 지금 그 전쟁을 중간평가 하자면?
박성민 : 기존의 주류가 무너진 것은 사실이다. 보수의 큰 버팀목이던 7개 기둥, 즉 지식인, 보수언론, 문화, 재벌, 권력기관, 기독교, 보수정당의 토대가 뿌리째 흔들렸다. 에베레스트를 받치고 있는 히말라야가 무너진 것이다. 박세일 전 의원의 선진화 담론 이후 보수가 내놓은 담론이 없다. 보수가 주류이던 시절은 끝났고 지금은 '민주당 대 반민주당' 시대다. 이건 우리 정치에 처음 있는 일이다.
다만 신주류가 그만큼 올라왔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대통령을 배출하고 권력을 가졌음에도 비주류 의식을 못 버리고 있다. 주류의식을 가져야 주류가 될 것 아닌가. 보수는 좋게 말해 주인의식, 소유의식이 강하다. 심지어 국가도 자기들 것이라는 의식, 책임감이 있다. 비주류 의식은 비판의식이다. 다 장악했는데도 아직도 피해 받는 비주류라는 의식이다. 주류의식이 있었다면 집권 뒤에 다른 세력도 안고 가는 자신감을 발휘해 '2017년 체제'를 만들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황교안 대표도 수준에 비해 너무 어려운 문제를 받아놓은 학생들 같다. 국제 정치 환경을 보면 평생을 공부한 김대중 같은 사람도 풀기 어려운 상황이다. 야권통합도 감정의 골이 워낙 깊어서 김영삼 같은 사람이 해도 될까 말까인데 정치 초년생 황교안 대표가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볼 때 주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 대선에서 누가 주류인지 결정될 것이다.
프레시안 : 총선은 어쨌든 기성 정치세력 중에 선택하는 일 아닌가. 지금처럼 '비토크라시'만 남은 정치가 바뀔 수 있을까?
박성민 : 네 편, 내 편만 있다. 극단적 진영만 남았다. 이 어둠이 마지막 밤인지 새로운 시작을 기대할 수 있는 전야인지…. 마지막 밤이라면 내년 총선이 될 것이고, 전야라면 다음 대선일 것이다.
프레시안 : 여권에선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면 임기 후반부에 개혁드라이브를 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박성민 : 내년 4월 총선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세 번 연달아 전국단위 선거를 몰아준 적은 있어도 네 번을 몰아준 적은 없었다. 내년 총선의 기본 정서는 반(反)문재인이다. 가장 큰 투표 동력은 혼을 내주려고 야당을 찍는 것이다. 의외로 침묵하는 스윙보터들이 많다. '문재인 정권에 몰아줬더니 남 탓, 과거정권 탓, 적폐 탓하더라. 우리가 보기엔 당신들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나오는 여론조사보다 민주당 상황은 좋지 않다.
보수는 혁신이 문제다. 과거 박근혜 비대위, 김종인 비대위 체제처럼 하면 이길 수 있다. 그렇게 비상계엄 상황처럼 임하지 않으면 못 이긴다. 황교안 대표를 바꾸고 비대위 체제로 가는 것이 유리한데, 그럴 수 있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보수의 대주주가 없는 문제가 있지만, 궁하면 누구든 찾기 마련이다.
프레시안 : 조국 사태를 겪고, 여야 일부 의원들이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공천 화두는 세대교체가 됐다. 구체적으로는 20~30 공천 비율을 획기적으로 높이자는 것인데, 세대교체가 정치를 바꿀 수 있을까?
박성민 : 지금의 86세대는 수적으로도 많고, 정당정치의 밑바닥부터 참여해서 지금까지 온 것이다. 훈련받은 사람들이다. 그보다 더 과거에는 육사 출신들 데려다 정치 엘리트를 시켰다. 90년대부터는 운동권 출신들이 정치 엘리트가 됐다. 지금 20~30 세대들에게 그저 자리를 주면 잘 할 것인가. 지금 알려진 젊은 정치인들 말이나 행동을 보면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다.
쟁취하고 나서는 쪽이라면 70년대 생들, 지금의 40대 세대를 기대한다. 86세대의 조직문화 경험과 가깝고, 문화적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86세대보다 세련된 세대다. 누구라도 세상 변화를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면 좋겠다. 통찰이 없고 성찰이 없으니 현찰만 챙기는 것 아니겠나. 지금은 운동권 출신들과 공안검사 출신들이 과거지향적인 세계에 갇혀있는 상황이다. 하나만 달라도 적으로 보는 사람 말고, 하나만 같아도 동지로 보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는 지지자에게 욕을 먹을 용기가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 나이의 문제, 세대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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