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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을 차례. 내 옷 볼 때마다 기억해 달라

[신간] 한국인이 본 팔레스타인 독립운동, <아부 알리, 죽지 마>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의 ‘전쟁 기록서’, <아부 알리, 죽지 마>(향연 펴냄)가 출간됐다. 정부 당국의 공식적인 전쟁 기록이 아닌, 한 소설가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현지에 가서 보고 느낀, 민간인 편에서 바라본 적나라한 전쟁 기록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라크 파견 작가이자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의 일원으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에 갔다 온 소설가 오수연씨가 쓴 이 책은 종군 작가가 아닌, 전쟁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민간인 편, 군대의 반대편에 선 종민(從民), 종인(從人) 작가의 기록서다.

구체적인 전쟁일지나 전투상황, 전쟁배경, 전쟁원인 등은 없다. 하지만 전쟁을 앞에 두고 두려움 가득한 눈망울을 한 민간인들의 공포와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오수연씨가 담아낸 내용들은 최근 증언으로 들려오고 있는 이라크의 ‘팔루자 학살’만큼이나 두려울 정도로 생생하다. ‘제2의 이라크전’을 촉발시킨 ‘팔루자 학살’로 10여일동안 이라크 민간인 8백여명이 사망했고 1천2백여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은 민간인 사망자는 없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사망자와 부상자 태반이 여성이고 어린이이며 노약자다.

***인생의 삼분의 일을 검문소 앞에서 흘려보내는 팔레스타인인**

<사진 겉표지>

오수연 작가는 바그다드 공습이 시작된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길이 막히자 팔레스타인으로 갔다. 그 곳에서 기록이 시작됐다.

팔레스타인에서 작가는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지원하는 평화운동단체 국제연대운동에 합류하여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평화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스라엘군에 대한 저항 의식이 뜨거운 발라타 난민촌과 수상 관저마저 주저앉은 라말라, 이스라엘 군대와 정착민에 위협당하는 헤브론이나 트웨니 마을, 나블루스 등을 찾았다.

또한 아무 때나 수시로 폭탄이 떨어지는 자발리아 난민촌, 불도저에 파괴당하고 있는 칸유니스 난민촌 등지에서 무도한 이스라엘군과 목숨을 건 저항이 일상인 팔레스타인인들의 실상을 기록했다.

작가는 “건국의 역사 자체가 국제법 위반의 역사”인 이스라엘로 인해서 “인생의 3분의 1을 이스라엘군 검문소 앞에서 흘려보내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실상을 기록했다.

구급차에 타고 있던 병원직원은 검문소 너머 ‘데일샤람’ 마을의 임산부가 이상을 느끼고 약국에 갔다가 출혈로 쓰러졌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고 왔건만, 여기 반시간 넘게 서 있는 동안 그 임산부가 유산을 했다는 두 번째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검문소 앞에서 기다리다가 구급차의 임무는 임산부를 돕는 게 아니라 아기를 잃은 여인을 살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저들은 우리를 모욕하고 괴롭히려는 것뿐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하루 종일 우리를 세워놓았다가 조사도 안 하고 한꺼번에 다 통과시키기도 하고, 폭발물을 수색한다고 우리를 몇 시간이나 붙잡아 놓고는 정작 가방도 안 열어본다. 우리가 가고 못 가고는 순전히 이스라엘 군인들의 기분 하나에 달렸다. 우리는 오늘 만날 이스라엘 군인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좋았기만을 빌 뿐이다. 만약 그가 마신 커피가 맛이 없었다면 우리는 몇 시간은 더 검문소 앞에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지난밤에 그가 여자친구와 말다툼이라도 했다가는 최악이다. 우리는 아무 혐의 없이도 끌려가 육 개월 감옥에 갖혀야 할지도 모른다. 육 개월 후에 법정에서 만난 판사도 간밤에 부인한테 바가지를 긁혔다면, 어떤 죄목으로건 우리는 육 개월 더 감옥살이를 해야 할 것이다.”

“이게 우리들의 일상이다.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말지는 검문소를 지키는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달렸다. 그리고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오늘까지 있던 버스 터미널이 밤새 봉쇄되어 없어질지도 모르고, 방학도 아닌데 학교가 폐쇄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획을 세울 수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도 없다.”

<사진 1>

***“내가 죽을 차례. 내 옷을 볼 때마다 나를 기억해 달라.”**

작가는 죽은 테러리스트 청년, 18살 ‘지하드’의 가족들이 이스라엘군 탱크로부터 보복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팔레스타인 난민촌 집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의 당대만이 아니라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고 장차 나올 후손까지 앞질러 가서 보복한다”는 것이다.

‘지하드’는 자신의 친척들이 이스라엘의 공격에 즉사하고 그 공격당한 곳에 달려가 친척의 시신을 추스르다가 친척의 얼굴이 뭉개지고 가슴을 받친 자신의 손이 등을 뚫고 나오는 일들을 당하며 기절해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내가 죽을 차례다.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살려두지 않을 거다. 내 옷을 간직하고 이걸 볼 때마다 나를 기억해 달라.”

지하드는 옷을 친구들에게 나눠주었고, 음식을 거부하며 마흐무드의 무덤 앞에 사흘 낮밤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전화로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공포가 없는 땅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끼고 아들에게 돌아오라고 울며 호소했지만, 지하드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어머니는 지하드가 말한 공포가 없는 땅이라는 게 여기보다 살기 좋은 다른 나라나 도시를 뜻한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사흘 뒤 지하드는 허리에 폭탄을 감고 텔아비브의 식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도 그는 20일 전쯤 차에서 내리다 폭탄을 맞은 상처에서 피와 고름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사진 2>

작가는 지하드의 형 알라에게 지하드의 테러로 희생당한 두 명의 이스라엘 시민들과 그들의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잔인한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알라는,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들 가족의 슬픔을 이해한다. 우리는 자식이나 형제를 잃는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너무나 잘 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수십 년동안 그렇게 당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파치 헬기로 마을을 포격할 때 남녀노소를 가린다고 생각하는가? 내 동생 지하드는 그게 얼마나 나쁜 짓인줄 저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스톱 사인이다. 그만하라고. 제발 이제 그만하라고.”

***작가가 전하는 ‘데리야씬 학살’ 증언의 전율**

작가가 전하는 1948년 예루살렘 근처 작은 마을인 데리야씬 학살 증언은 정말 충격적이다. 데리야씬은 이날 이스라엘 군대에 의해 ‘깨끗이 지워졌’는데 약 7백50명의 주민 중 적게는 1백20명, 많게는 2백54명이 살해당했다. 그 당시 10살이었던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오자 집집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창문을 넘어 도망쳤고, 남자들은 그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구식 소총으로 대항했어. 오래 버틸 수가 없었지. 우리는 도망치다가 길 옆 건초 더미 밑으로 기어들어갔어. 이스라엘 군인들이 총을 들고 다가와 한 가족이 발견되었어.

이스라엘군들은 그 가족을 나란히 땅에 무릎 꿇렸어. 그리고 가장에게 말했지. 우리가 네 여자에게 어떤 짓을 하는지 보라. 말은 안 통해도 몸짓이 그런 거였어. 그들은 갓난애를 안고 있는 부인을 끌어내어 가슴팍을 헤치고, 한쪽 유방을 칼로 잘라내는거야. 그 다음 잘라낸 유방을 갓난애의 입에 쑤셔 넣은 다음, 아이를 목 졸라 죽였지.

그리고 가슴 잘린 어머니에게 말했어. 우리가 네 남편에게 어떤 짓을 하는지 보라. 그 여자 앞에서 남편의 귀와 코를 잘라냈지. 눈은 왜 놔뒀겠어? 자기 아내가 죽는걸 보라고. 그 여자는 한 군인의 총 끝에 달린 칼에 꿰뚫렸어. 이 모든 꼴을 다 본, 귀와 코를 잘리고도 아직 살아 있던 남편을 그들은 벽에 세워놓고 총으로 갈겨버렸지.”

<사진 3>

***미군의 무차별 발포로 손에 써놓은 미군 친구 이름 지워**

한편 작가는 책 곳곳에서 현재 시아파의 봉기를 예측하는 듯한 기록을 하기도 했다. 2004년 1월 쓴 글에서는 “진짜 전쟁은 인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봉기했을 때부터일 것이다”고 지적했다.

또 2003년 7월 바그다드에서 시아파 지도자 무크타다 알-사드르와 서면 인터뷰를 한 이후에는 “극단은 극단을 낳는다. 미국의 패권주의가 강할수록 이라크에서는 이런 선동적 과격파가 득세할 것이다”라며 “미국이 물러가지 않거나 괴뢰 정부를 세워 간접적으로 지배할 것이 확실해질 때, 이라크인들이 예상하는 가능성은 단 하나다. 민중봉기다”라고 적시했다.

작가는 또 바그다드에서 미군들의 무차별적인 발포를 통한 ‘민간인 학살’을 친구에게 쓰는 편지 형태로 폭로하기도 했다.

지난 7월 3일 아침, 바그다드 ‘하이파’ 거리에 사는 열두 살 소년 ‘아흐메드’는 학교에서 시험을 치고 집에 오던 길이었어. 한길로 미군의 순찰차량 넉 대가 지나가고 있었어. 아흐메드는 그 차들 중에 혹시 자기 친구 ‘보브(Bob)’가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아흐메드는 미군들에게 ‘헬로’하기를 좋아했고, 보브라는 이름의 미군을 사귀어 손바닥에 그의 이름을 써갖고 다녔거든.

그런데 갑자기 차 한 대에서 불꽃이 일어났어. ‘사담 추종자’들이 미군 차에 폭탄을 던진 거지. 그 순간 미군 차들이 멈추고 미군들이 메뚜기처럼 뛰어내리더니, 주변에 걸어가던 모든 이라크 사람들을 향해 총을 갈기기 시작했어. 아흐메드는 뛰었어. 총알이 등 뒤에서 날아와 막 땅에 박혔어. 외쪽 다리가 이상하게 무거웠어. 그리고 무지 졸렸지. 아흐메드는 쓰러졌고 제 왼쪽 종아리에서 피가 쏟아지는 걸 보았어. 총알이 뜷고 지나갔으니까.

미군이 총을 들고 다가왔어. “도와주세요!” 아흐메드는 간신히 손을 내밀었지만 미군은 그냥 지나갔어. 아흐메드는 집이 얼마 멀지 않다는 생각에 겨우 일어나 피가 흐르는 왼쪽 다리를 끌며 대문까지 걸어갔어. 놀라서 뛰어나오는 엄마에게 “엄마, 이게 꿈이야?”라고 물었지. 그리고 정신을 잃었어.

아흐메드는 이후에 손에 써갖고 다니던 그 미군 친구 이름을 지워버렸다.

<사진 4>

***“비폭력은 폭력보다 강하다”...**

작가는 하지만 말미에서 이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은 폭력보다 강하다”며 “전쟁은 신이 막지 못한다, 인간이 막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역사 이래 전쟁과 폭력으로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더 이상 반복할 이유가 없다. 전쟁과 폭력 아닌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진부한 표현일 수도 있고 우리는 주변에 쉽게 널려 있는 금언에 너무 무감각해진 상황이지만 작가로서의 진지한 고민과 문제 제기를 던진 이후에 나온 것이라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울림이 있다. 작가가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가난한 자치 진료소에서, 굴욕을 강요당하는 검문소 등지에서 만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쉽게 잊혀지지 않으면서.

아울러 작가는 "죽음 말고는 자신의 삶을 주장할 방도가 없는" 이라크인들의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하고 있다.

이제 또다시 강대국 때문에 죽어나가야 하나. 죽음 말고 이라크인들에게 잚을 주장할 방도는 없을까. 살기 위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21세기 인류 문명이 후진국의 인간들에게 부여한 운명인가. 이슬람이 가장 좋아하는 말은 '평화'다. 그러나 그들은 평화롭게 살 만한 처지였던 적이 없다. 알라를 섬기는 자들, 절반쯤은 이름이 알리인 아들들의 신실한 아버지들, 아부 알리들은 언제쯤 천국에 안 가고도 지상에서 평안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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