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최인기 씨는 2003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심장대동맥류와 기형으로 인한 인공혈관 치환 수술을 받았다. 수술과 회복기간으로 생계가 중단되어 2005년부터 기초생활수급자로 인정돼 급여를 받아왔다.
그러다 2014년, 연금공단의 변경된 기준에 따라 근로능력평가 '근로능력 있음' 판정을 받게된다. 최 씨는 "몸이 안 좋고 일을 시작하면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점을 동주민센터 담당직원에게 호소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일반수급자에서 '조건부 수급자'로 변경된 최 씨의 급여는 순식간에 60%가 깎여나갔다.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마저도 받을 수가 없었다.
최 씨는 지자체 권유에 따라 '취업성공패키지'에 등록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파트 경비 일을 소개 받았지만 2교대로 24시간 씩 근무하기에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최 씨는 지인의 도움으로 24시간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아파트 지하주차장 청소부로 취업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 후 지속적인 감기증상과 발열, 부종 등의 증세를 겪던 최 씨. 급기야 3개월만인 지난 5월, 일하다 쓰러져 응급실에 입원하게 됐다. 그리고 6월, 이식 받은 혈관을 비롯해 복부 전체에 감염이 퍼져 있을 것을 확인했다. 그렇게 병원에 입원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코마상태에 접어들었고, 지난 8월 28일 사망했다.
한국판 <나, 다니엘 블레이크> 사건이라 불리는 고 최인기 씨 이야기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켄 로치 감독)는 영국의 근로연계복지의 폐해를 생생히 고발하며 제69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비현실적인 근로평가가 죽음으로 내몰았다"
시민단체는 최인기 씨 사망 관련, 국가에 책임이 있다며 국가배상 소송을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연금공단이 일반수급자였던 최 씨를 조건부 수급자로 변경한 게 죽음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국가를 상대로 복지수급자 사망의 책임을 묻는 첫 소송이다.
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빈곤사회연대 등으로 구성된 공동소송단(이하 소송단)은 23일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비현실적인 근로평가가 복지수급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며 관련 제도 정비를 촉구했다.
소송단은 "고인의 죽음 이후 그 누구도 고인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지지 않는다"며 "고인에게 일을 강요한 수원시도, 고인에게 근로능력이 있다 판단한 국민연금공단도, 제도를 관장하는 보건복지부도 고인의 죽음 앞에 아무런 말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고인의 죽음은 빈곤층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합리하게 일자리를 강요하고, 급여박탈이라는 협박을 일삼으며 빈곤층을 옥죄던 행정의 폭력에 의한 죽음"이라며 "가난이 죄가 아니라 행정의 폭력이 죄가 돼야 한다"고 소송 이유를 밝혔다.
건강 상태 그대로인데...달라진 기준에 '근로 능력 있음'
'조건부 수급'은 국가가 생계 급여를 지급할 때 수급자가 자활에 필요한 사업에 참가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하나다. 수급자들의 자활과 자립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설계되어 가난한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일을 하고 연계망을 형성하게 하여 사회통합과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는 복지정책이다.
그러나 2012년 근로능력평가 체계가 재편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자체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던 근로능력평가는 2012년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는 우려에 따라 국민연금공단으로 위탁됐다. 최 씨의 건강 상태와 노동 능력은 변함이 없었지만 국민연금공단은 '1등급', 즉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상태'라고 판단했다. 이에 최 씨는 일반수급자에서 조건부수급자로 변경됐고 급여를 받으려면 자활을 위한 사업에 참여해야 했다. 정부의 자활 사업은 근로 능력에 따라 여러 단계가 있으나 '1등급' 판정을 받은 최 씨는 일반 노동시장에 참여해야 했다. 최 씨가 죽음에 몰리게 된 계기다.
전지영 기초법행동바로세우기공동행동 활동가는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지역자활센터의 사례를 언급하며 "2012년 근로능력평가 체계가 재편된 후 자활근로사업장에는 배치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능력이 저하되는 분들이 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7년 <한겨레21>의 보도를 보면, 2012년 말 국민연금공단에 근로능력평가가 위탁된 후 2013년부터 전년도에 비해 '근로능력 있음'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 비율이 5%에서 15.2%로 3배 이상 급증했다. 관련 내용으로 보면 한 건에 2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났다. 수급자의 병력이나 건강 상태, 노동 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시간이다.
전지영 활동가는 "자활사업에 대한 정부정책이 취업과 창업을 촉진하는 성과주의 배경이 강하게 추진된 것"이라며 "현실과 맞지 않는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그 성과를 위해 무리하게 자활사업을 운영해 고 최인기 씨와 같은 죽음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밝혔다.
일 못하는 사람은 일하게, 일하고 싶은 사람은 일 못하게 하는 '자활사업'
올해 3월까지 '조건부 수급자'로 지역 자활센터에서 근무했다고 밝힌 김태희 홈리스행동 회원은 "현재 (일자리를 잃어) 실업급여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활사업장은 최대 5년까지밖에 참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다.
김 씨는 "5년만 근무하고 나가는 직장에서 일해 봤자 빈곤에서 벗어나지도, 일반 직장에 취직을 할 수도 없다"며 "제가 할 수 있는 건 1년 간 쉬었다가 내년에 다시 자활센터에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자활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의 사례도 설명했다. 눈이 안 좋아 장애5등급 판정을 받은 그의 동료는 연금공단으로부터 근로능력이 있다고 판정받아 농작물 수확 일을 하게 됐다. 김 씨는 "그 동료는 눈이 안 좋아 정작 작물이 다 익은 건지 안 익은 건지 구별하지 못해 현장에서 '고문관 취급'을 받았다"며 "능력과 힘이 부치고 그 분 상태와 맞지 않는 일을 시키니 현장에서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 난다"고 말했다.
이어 김 씨는 "국민연금공단은 팔다리만 성하면 무조건 조건부 수급자로 결정하는 것 같다"며 "정작 자활은 시키지도 못하면서 기초수급권을 무기로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근로능력평가와 자활제도는 폐지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급자의 눈' 아닌 '수급자의 눈'에서 바라봐야
전문가들은 기초생활보장제도 관련, 부양의무제 폐지 등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소송단에 참여하고 있는 박연아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2014년의 '세 모녀 사건', 지난 7월에 일어난 '탈북 모자 아사 사건' 모두 복지 사각지대에서 발생했다"며 "근로능력을 연령 등 단편적으로 판단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송파 세 모녀 사건'의 어머니는 65세 미만이었고 딸은 모두 30대였다. '탈북 모자 아사 사건'의 어머니는 40대였다. 현행 복지제도에서 해당 연령대는 모두 '근로능력이 있다'고 간주된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고 최인기 씨의 사례는 취약계층의 복지체제에 아주 오랫동안 누적된 문제"라며 "수급자를 도와주는 방향으로 행정을 해야하는데 지금의 행정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했다. 오 위원장은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돈은 아껴야 하고 안 주는 방향으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라며 "주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의 복지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복지는 돈을 주거나 마는 문제로 끝내는 것이 아니다"라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꾸준한 사례관리가 이뤄지는 방향으로 전면적인 개편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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