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4일 프레시안을 통해 최초보도된 산업자원부와 한국산업기술평가원(ITEP)의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집행 비리 의혹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최근 감사원이 정식으로 감사를 하기로 결정한 데 이어, 공중파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를 내보내는 등 국가 연구개발 예산집행 관행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작 당사자인 산자부와 ITEP은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예산집행 비리를 내부고발한 김태진씨 등 연구원들을 12월30일부로 최종 해고 처리해 눈총을 받고 있다.
***이달 말 감사원 감사 시작-내부고발자는 결국 해고당해**
19일 ITEP 관계자에 따르면, 감사원은 지난 12월4일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위원장 이성우)이 청구한 산업자원부와 ITEP의 국가 연구개발 예산집행 비리 의혹과 국민감사 청구 건에 대해서 1월말부터 감사를 시작한다.
과기노조는 과학기술자 3천99명의 서명을 받은 국민감사 청구서에서, ▲10월9일 국회 산자부 국정감사에서 안영근 열린우리당 의원에 의해 제기된 국가 연구개발 예산 집행 과정에서 산자부 공무원의 부당 압력과 로비 의혹, ▲연구개발 과제 선정을 둘러싼 두산중공업과 11월6일 구속된 산자부 홍기두 전국장의 비리 연관 의혹, ▲ITEP 내부 직원의 학위 이수 과정에서 부당거래 여부 의혹 등을 제기했었다.
이번에 국민감사가 청구된 내용 중 연구개발 예산 집행 과정에서 ▲산자부 공무원의 부당 압력과 로비 의혹, ▲ITEP 내부 직원의 학위 이수 과정에서 부당거래 여부 의혹 등은 17일 KBS <한국사회를 말한다>에서 "국가 연구개발비 5조6천원이 새고 있다"로 방송되기도 했다.
이렇게 연구개발 예산 집행 과정의 비리 의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산자부와 ITEP은 비리 의혹을 최초로 내부고발한 김태진, 김준씨 등 ITEP 연구원들을 12월30일부로 정식으로 해고했다. 이런 어이없는 행태에 대해서 과기노조 등에서는 "산자부와 ITEP 경영진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계속 은폐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비판만으로는 부족해, 평가 체계부터 바꿔야"**
이번에 최종 해고된 김태진씨 등은 이미 3~4년 전부터 과기노조 등과 함께 연구개발 예산 집행 과정의 문제점을 극복할 대안을 모색해 온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받고 있다.
김태진씨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연구개발 예산은 선진국 수준에 거의 근접했지만, 평가의 효율성과 객관성은 크게 미흡했다"면서 "5조6천억원에 달하는 국가 연구개발비가 제대로 집행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 평가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프레시안은 김태진씨와 14일 진행된 인터뷰를 바탕으로, 현재 국가 연구개발 평가 체계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독자들과 함께 모색해보고자 한다.
다음은 김태진씨와 인터뷰 전문.
***김태진씨 인터뷰**
프레시안 : 지난 12월4일 프레시안에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KBS와 공동 작업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태진(전ITEP 연구원) : 그렇다. 주로 연구개발 예산 집행 과정이 얼마나 엉터리로 운영돼 왔는지, 산자부 등 주무부처 공무원들의 부당 압력이나 로비 의혹, ITEP 평가 연구원들의 학위 이수 과정에서 부당거래 여부 의혹 등이 제기될 전망이다. 대안 제시보다는 고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레시안 : 과기노조와 함께 3~4년 전부터 지금의 평가 관행을 극복할 대안을 모색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그런 고민을 들어봤으면 좋겠다. 10년 이상 연구개발 평가에 종사해 왔다. 과학기술계의 연구개발 평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김태진 :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하나는 평가 관리의 공정성과 투명성이 결여돼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돼 있고, 평가 기관 종사자들의 윤리 의식도 형편없다.
다른 하나는 근본적으로 연구개발 관리 체계가 허점투성이라는 점이다. 이런 부실한 연구개발 관리 체계가 앞에서 지적한 부실하고 부도덕한 평가 관리를 부추기고 있다.
***평가 기관 종사 10년차, 윤리 교육 한번도 받은 적 없어**
프레시안 :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 일단 평가 관리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가 필요한가?
김태진 : 기본적인 것부터 따져보자. 일단 연구개발 평가와 관련된 모든 회의가 기록돼야 한다. 누가 어떤 근거로 특정 연구개발에 대해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입장을 취했는지가 명확히 드러나야 한다. 기업이나 대학이 과제를 신청할 때부터 선정될 때까지 행한 여러 가지 로비 내역도 사전에 제출돼 평가는 물론 사후에도 근거 자료로 보존돼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평가 기관 종사자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비롯한 윤리 교육이 절실히 요구된다. 10년 이상 평가 기관에 종사하면서 그런 윤리 교육을 한번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이번에 문제가 된 ITEP 직원들의 학위 이수 과정의 부당거래 의혹도 이런 윤리 의식의 부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연구개발 평가 일원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프레시안 : 아까 좀더 근본적인 연구개발 관리 체계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다. 현재 연구개발 관리 체계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김태진 : 맞다. 기존 체계가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에서 앞에서 언급한 조치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현재 국가 연구개발비 5조6천억원의 상당수를 운영하는 주무부처는 과학기술부, 산자부, 정보통신부이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연구개발 과제를 선정해 예산을 배정하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산하 평가 기관을 갖고 있다. 산자부-ITEP, 과학기술부-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정통부-정보통신연구진흥원(IITA)이 그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평가 기관의 인사와 경영을 주무 부처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기부, 산자부, 정통부가 추진하는 연구개발 사업을 평가하는 기관의 인사와 경영을 평가 대상인 세 부처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평가가 나올 수 없다. 평가원이 부처로부터 발생하는 외압이나 청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체계인 것이다.
프레시안이나 KBS를 통해 지적된 '산자부 공무원의 부당 압력 의혹'도 이런 체계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산자부 소속 공무원들이 "장관이나 산자부가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꼭 추진해야 할 사업"이라고 엄포를 놓고 나면, 산자부에 의해 인사와 경영이 종속돼 있는 평가원 입장에서 공정한 평가를 진행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사업 발굴처럼 연구개발 과정에서 평가 기관과 해당 부처의 긴밀한 업무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김태진 : 일단 명백한 것은 평가 기관들의 인사와 경영이 해당 주무부처로부터 독립돼 있어야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것이 총리실 산하에 국가과학기술기획평가원(국과평)을 두고 ITEP, KISTEP, IITA를 그 산하에 둬 인사와 경영이 주무부처로부터 독립돼 있도록 하는 것이다.
국과평이 국가 연구개발 지원 체계를 총괄하게 되면, 평가 기관이 독립적으로 해당 부처의 사업을 평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해 계속 문제가 제기돼 온 과기부, 산자부, 정통부 사이의 중복 투자 논란도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국과평에서 국가 연구개발 평가를 총괄,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방금 지적한 부처와의 긴밀한 업무 협조는 해당 평가 기관들이 여전히 산자부, 과기부, 정통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안 된다.
***과기부, 심판-선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프레시안 : 국과평 설치 제안은 매우 참신하다. 하지만 현재 국가 과학기술 업무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에서 총괄하도록 돼 있고, 과기부가 국과위의 간사 역할을 맡고 있다. 총리실 산하 국과평이 또 생긴다면 '옥상옥'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법도 하다.
김태진 : 현재 과기부는 약 1조원의 특정연구사업비를 집행하고 있다. 산자부, 정통부와 경쟁하는 국가 연구개발비를 운용하는 선수인 셈이다.
그런데 과기부는 1년에 1번씩 국가 연구개발 사업 전체를 평가하는 조사분석평가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일종의 심판 역할이다. 이렇게 선수와 심판을 과기부가 동시에 맡고 있으니, 산자부나 정통부와 같은 다른 부처들과 업무 협조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는 등 효율적이고 원활한 국가 과학기술 정책 결정 과정이 안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제점은 이미 발생하고 있다. 다른 평가 기관의 평가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조사분석평가사업의 평가위원들 역시 과기부, 산자부, 정통부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각종 연구개발 사업 당사자들이다. 이런 이해당사자들로 구성된 평가위원들이 국가 연구개발 사업 전체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난해 계속 과기부의 역할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프레시안 : 과학기술부총리 얘기도 나오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태진 : 과기부장관이 과학기술부총리로 승격한다면 그 전제 조건은 과기부가 선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어야 한다. 과기부가 집행하고 있는 특정연구사업비 1조원이나 기금으로 운영되는 원자력 연구개발 사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 심판으로서 순수하게 국과위 간사 역할만 맡아 국가 과학기술 정책을 총괄·조정하는 역할만 한다면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국과평이 과학기술부총리실과 관계를 맺는 체계도 생각할 수 있다.
과기부가 지금처럼 선수와 심판 역할을 동시에 맡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코 효과적인 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프레시안 : 과기부가 자기 부처의 기득권을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다. 일각에서 그런 주장을 하면 과기부 관료들은 당장 '과기부 해체'론으로 받아들인다.
김태진 : 그게 큰 문제다. 우리가 총리실 산하의 국과평을 고민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차세대 성장 동력 사업도 졸속 사업 전철 밝을 가능성 커**
프레시안 : 말한 대로 체계가 바뀌면 기존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극복될 가능성은 커질 것 같다. 하지만 역시 평가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기 쇄신 노력도 필요하다.
김태진 : 정확한 지적이다. 그래서 국과평이 만들어지면, 국과평 종사자들부터 아주 강한 윤리 규범의 적용을 받도록 강제해야 할 것이다.
적게는 수백억, 많게는 천억대에 이르는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연구개발비를 운용하는 종사자들에게 지금처럼 느슨한 규율이 적용돼서는 안 된다. 제도적으로 그들이 부패의 유혹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근본적인 강제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제도 속에서 개인들에 대한 윤리 교육,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교육이 병행된다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상위 기관인 국과평에서 이런 시도가 자리를 잡는다면, 각 부처별 평가를 맡는 ITEP, KISTEP 등의 종사자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프레시안 : 대통령과 과기부 장관을 비롯해서, 과학기술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연구개발비 확충을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연구개발비 확충보다, 확보된 연구개발비가 제대로 운용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정부는 차세대 성장 동력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잘 안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김태진 : 연구개발비만 늘리면 뭐하는가? 엉터리로 운영해서 국민들을 기만하고, 묵묵히 열심히 하는 연구자들 사기만 떨어뜨리는데. 차세대 성장 동력 사업 역시 마찬가지다. 노태우 정권의 G7 사업, 김영삼 정권의 KSTAR 사업, 김대중 정권의 지역산업 육성 등 과거 엄청난 예산을 들이고 결과물은 거의 없는 연구개발 사업이 각 정권마다 하나씩 있다. 이런 과거 정부의 전철을 차세대 성장 동력 사업이 밟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앞에서 지적한 평가 체계 혁신을 비롯한 과학기술 정책의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국가 연구개발 사업 자체가 '밑 빠진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산자부 비리 의혹, 국가 과학기술 평가 체계 혁신의 계기가 돼야**
프레시안 : 12월30일부로 정식으로 해고가 되었는데,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김태진 : 일단 월말부터 감사원 감사가 시작된다. 확보해 놓은 증거로 ITEP 종사자들의 비리 의혹에 대한 고발도 부패방지위원회에 해놓은 상태다.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 해고에 대한 심판·조정 신청도 했다.
내가 복직하느냐 못 하느냐는 이미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번 사건을 내가 10년 이상 종사한 ITEP의 개혁과 국가 과학기술 평가 체계의 혁신의 계기로 삼겠다. 언론에서도 계속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프레시안 : 장시간 좋은 말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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