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1조1천억원에 달하는 산업자원부 연구개발 예산이 엉터리로 운용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위원장 이성우)은 감사원에 산자부 연구개발 예산 집행 비리 의혹에 대한 국민감사를 청구했다.
이번 감사 청구는 산자부 연구개발 예산의 대부분에 해당되는 9천6백억원을 운용하는 한국산업기술평가원(ITEP) 직원의 내부고발에 의해 가능했다. ITEP은 산자부 산하 기관으로 1인당 평균 1백억원의 국가 연구개발 예산을 평가, 운용해왔다.
현재 ITEP은 경영 개선을 명목으로 이들 내부고발자를 포함한 13명의 직원들에게 정리 해고 통보 또는 휴업 명령을 내린 상태다.
***1조1천억원 연구개발 예산 엉터리 집행 의혹 제기**
과기노조는 4일 오전 감사원에 산자부와 ITEP의 평가 비리와 관련한 국민감사를 과학기술자를 중심으로 한 3천99명의 서명을 받아 청구했다.
과기노조는 국민감사 청구서에서 ▲2002년 역삼동 소재 한국기술센터 건물 매입과정에서 산자부의 5백여억원 임의 집행, ▲10월9일 국회 산자부 국정감사에서 안영근 열린우리당 의원에 의해 제기된 국가 연구개발 예산 집행 과정에서 산자부 공무원의 부당 압력과 로비 의혹, ▲연구개발 과제 선정을 둘러싼 두산중공업과 11월6일 구속된 산자부 홍기두 전국장의 비리 연관 의혹, ▲ITEP 내부 직원의 학위 이수 과정에서 부당거래 여부 의혹 등을 제기했다.
과기노조의 국민감사 청구서에 따르면, 산자부는 기업이나 대학, 연구기관의 연구개발 지원금으로 사용돼야 하는 ITEP의 예산을 이기준 전서울대 총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민간재단인 한국산업기술재단에 4백88억원을 2회에 걸쳐 부당 지원했다. 한국산업기술재단은 이 돈을 공익사업 외에도 자체 수익 사업 및 강남 소재 17층짜리 건물 매입 등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자부가 산업기술재단에 지원한 5백여억원은 ITEP이 연구개발 예산을 집행한 업체들로부터 기술개발 성공 후, 지원금의 20% 정도를 돌려받아 적립해 두는 금액(기술료)이다. 기술료에 대해 감사원은 2000년 "법적으로 사용 근거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국고에 납입하라"고 지시했으나 기획예산처 장관과 사전 협의해 쓰도록 규정한 2002년 3월 이전에는 사실상 산자부 장관이 '쌈짓돈'처럼 운용해왔다. 산자부 신국환 전 장관이 한국산업기술재단에 각각 2백여억원에 달하는 뭉칫돈을 지급한 것도, 2002년 3월 이전이다.
ITEP 관계자는 "기획예산처와 협의해서 사용하도록 규정한 뒤에도 연간 7백억여원에 달하는 기술료 수입은 여전히 '눈먼 돈'처럼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연구개발비 집행과정 의혹도 제기**
한편 국민감사 청구서는 "연구개발비 집행 과정에서 산자부가 특정업체 지원을 강요하거나 자격미달 업체나 대학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고 고발하면서 7건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감사원 청구서에 따르면, 산자부는 2002년 D정공에 74억원의 자금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평가위원의 문제제기가 있자, 산자부 조모 사무관이 직접 나서 "산자부 내부 정책적인 결정에 의해 과제가 선정됐고, 담당 국장 및 과장이 장관에게 보고한 내용"이라고 주장해 74억원의 정부 자금을 지원하게 했다.
또 2002년 1, 2차 평가에서 탈락한 Y대 박모 교수 등의 기술개발 사업에 대해서도, ITEP은 평가 담당자를 바꾸고 규정에 없는 3차 평가를 실시해, 33억원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Y대에서 사업화가 가능한 기업으로 변경하라"는 일부 평가위원들의 요구도 묵살됐다.
이 사례 외에도 ITEP 퇴직자가 기업으로 이전해 부당 지원을 받은 일이나 감사원 고발에 의해 검찰의 조사를 받고 1억6천3백만원이 환수된 H대 오모 교수 지원 사업에 대해서도 후속조치가 미흡한 것 등의 의혹이 제기됐다.
***ITEP 종사자의 '학위거래'도 문제돼**
한편 과기노조는 ITEP에 근무하는 일부 종사자가 연구기술 자금을 집행하면서, 지위를 이용해 특정 대학의 박사과정에 참여해 학위를 취득한 부당한 '학위거래' 의혹도 제기했다. 지도교수 및 논문심사 교수들에게 정부과제 지원을 하고 대신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감사원 청구서는 ITEP 직원 K씨의 경우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부산에 있는 B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1차례의 결근도 없이 수백만원의 시간외근무 수당을 받으면서 불과 3년 동안 학위를 취득했다고 사례를 제시했다.
***11월, 산자부 홍기두 국장 뇌물수수 구속은 빙산의 일각**
과기노조는 지난 11월 한국중공업 민영화 과정에서 두산중공업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산자부 홍기두 국장이 구속된 것은 "빙산의 일각이 드러난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두산중공업은 2000년 이후 현재까지 총 1백50억원을 산자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고, 이것은 2000년 이전 산자부로부터 지원받은 총액 4억4천만원에 비해 크게 증액된 금액이라는 것이다. 당시 두산중공업에 ITEP이 연구개발비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산자부의 압력과 로비가 있었다는 정황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ITEP내 내부 고발자 부당해고 통보**
산자부와 ITEP 경영진은 2002년 3월 <한겨레>를 통해 기술료의 산업기술재단 지원 사실이 보도된 후 김태진, 김준 씨 등을 내부고발자로 지목하고 1년이 넘게 퇴직을 강요해오다, 7월1일부로 경영 개선을 명목으로 직위해제, 휴업 등의 조치를 내린 후 11월 현재 해고를 통보한 상태다.
과기노조는 "산자부는 ITEP 내부고발자를 해고하기 위해서 경영진에게 노조와의 단체협약 개정을 요구하고 이를 핑계로 특별한 사유없이 2003년 인건비를 30% 삭감 조치했다"면서 "이런 산자부의 압력과 경영진의 이간질로 1백여명에 달하던 조합원이 현재 27명밖에 안 남았다"고 주장했다. 남은 조합원 27명 중에도 평가 업무에 관여하는 이들 대부분인 10여명은 회사로부터 휴업 통보를 받은 상태다. 과기노조는 이런 "내부고발자와 노조에 대한 압력에 산자부 관계자가 개입돼 있다는 녹취와 회사 내부 문서 등 광범위한 증거가 확보돼 있다"고 밝혔다.
경영진으로부터 내부고발자로 지목돼 해고를 통보받은 ITEP에 12년간 근무한 김태진 씨는 "현재 국가 연구개발 예산은 선진국 수준으로 확충됐지만, 평가의 효율성과 객관성은 크게 미흡하다"면서 "산자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의 국가 연구개발 예산 집행 과정의 문제점과 부정부패 의혹 등을 전면에 드러내는 계기로 만들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김씨는 "그 과정에서 내부고발자에 대한 해고 등 부당한 처사에 대항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덧붙였다.
연간 5조6천억원에 달하는 국가 연구개발 예산의 집행 과정에 만연한 비효율과 문제점은 여러 차례 지적돼 왔으나, 그 실체는 계속 베일에 쌓여왔다. 이번 과기노조와 ITEP 노동자들의 국민감사 청구와 문제제기가 그 첫 걸음이 될지 예의주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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