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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불매가 필요하다면 '김앤장'부터 하자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노동기본권에 구멍 뚫어 댐 무너뜨리나

"시급한 국산화를 위한 신속한 실증 테스트 등으로 연장근로가 불가피한 경우 특별연장근로를 인정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는 한편, 연구개발 인력 등의 재량근로제가 적극 활용될 수 있도록 재량근로와 관련한 지침 등도 제공"

지난주 금요일(19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주재로 열린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 결과를 보면서 또다시 타고난 삐딱함이 발동했다. ‘특별연장근로’라니, 한국에 저런 제도가 있었나? 나름대로 노동법 관련 웬만한 쟁점은 다 꿰고 있다고 자부해온 터라 자존심도 함께 발동되었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천재지변?

어렵지 않게 검색질 한 번으로 팩트 체크가 가능했다. 그래서 자존심에 더 큰 상처를 입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여하튼 그 문제는 개인적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근로기준법 제53조 4항에 이렇게 규정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사용자는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고용노동부장관의 인가와 근로자의 동의를 받아 근로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이 조항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부분은 과연 ‘특별한 사정’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근로기준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 자연재해(지진·홍수·낙뢰 등과 같은 천재지변)가 발생하거나 또는 △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 따른 ‘재난’이 발생하여, 이를 수습하기 위해 연장근로가 불가피한 경우를 의미한다. (근로기준법 시행규칙 제9조 2항)

이런 법률적 쟁점의 경우 '어떤 경우에 되는가'라는 지점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 안 된다는 것인가’를 살펴야 이해가 쉽다. 이를테면 단순한 업무량 증가 또는 일시적 필요에 의한 연장근로는 '특별한 사정'에 해당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기계고장 또는 우기(雨期)나 강풍으로 인한 작업 지연 및 공사기간 단축을 위한 경우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과 시행령·시행규칙 어디를 뜯어봐도, 그리고 각종 포털에 소개된 법률 해석을 보더라도 일본의 수출규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조항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미국 트럼프 정권이 한국산 자동차에 관세를 25% 매기려고 할 때에도 이 사태를 천재지변이나 재난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30대 기업을 만나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신박한 법 해석 : ‘사회재난에 준하는 사고’?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이걸 ‘재난’으로 둔갑시키고 말았다. 22일 고용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수출 규제를 "직접적인 재해‧재난은 아니나 '사회재난에 준하는 사고’에 해당한다"는 논리로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겠다고 한다. 재난은 아니지만 재난에 준하는 사고다? 박근혜의 창조경제가 울고 갈만한 신박한 법 해석 아닌가.

나. 사회재난 : 화재·붕괴·폭발·교통사고(항공사고·해상사고 포함)·화생방사고·환경오염사고 등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규모 이상의 피해와 에너지·통신·교통·금융·의료·수도 등 국가기반체계의 마비,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른 감염병 또는 「가축전염병예방법」에 따른 가축전염병의 확산, 「미세먼지 저감 및 관리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미세먼지 등으로 인한 피해

내친 김에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제3조에서 정의하고 있는 ‘사회재난’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화재·붕괴 등의 사고로 국가기반체계가 마비되는 경우를 ‘사회재난’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수출규제를 어떻게 ‘사회재난’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국유화된 기업도 아닌 반도체 업계 문제를 ‘국가기반체계 마비’라니?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안을 ‘사회재난에 준하는 사고’로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 경우 정부는 노동자와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각종 조치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장시간 노동을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장근로 제한’이라는 제도를 무력화시키고 특별 연장근로를 허용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사회재난이라는 규정을 빌미로 앞으로 온갖 기본권 제한 조치들이 줄을 잇게 될 것이다.

소재 국산화에 일자리 창출도 가능한 길을 마다하고


고용노동부가 적시한 특별연장근로 허용의 적용대상을 보면 일본 수출규제 대상품목의 △시급한 국산화 △신속한 실증 테스트가 필요한 경우라는 명분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대상품목의 국산화와 제3국 대체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특별연장근로 허용'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가? R&D 역량과 테스트 관련 인력을 추가 고용하는 대책도 가능한데 말이다.

이들 대상품목의 국산화를 위한 기술을 갖춘 한국의 업체들은 손가락에 꼽을 수준이다. 게다가 그런 업체들은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 직후 주식시장에서 연일 상한가를 치며 돈벼락을 맞고 있다. (포털에서 '포토레지스트 관련주' '에칭가스 관련주' '폴리이미드 관련주' 등의 키워드로 검색만 한 번 해보시라.)

만일 이들 업체가 국산화 기술개발에 성공할 경우 일본이 독점하고 있는 세계시장에 파열구를 내며 엄청난 떼돈을 벌어들일 기회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업체가 자기 자본을 투자해 R&D 역량을 추가로 고용하는 것이 정당한 일 아닌가. 타국으로 수출 길까지 열리게 되면 어차피 이들 업체 입장에서 R&D 역량이 추가로 필요하게 된다.

문재인 정부가 힘을 주어 강조하는 소재 국산화에다 일자리 창출까지 가능해진다. 그런데 특별연장근로의 길을 여는 순간 일자리 창출은 날아가고, 소중한 R&D 역량들만 밤샘노동과 특별연장근로에 갈아넣게 된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주식시장에서 연일 대박이 터지며 돈을 긁어모으는 업체들인데 말이다.

디테일에 숨은 악마 : 반도체 관련 모든 노동자로 확대 가능

그런데 고용노동부 발표 내용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심각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국산화를 위한 'R&D', 그리고 제3국 대체 조달시 '테스트'를 위해 집중근로가 필요한 노동자라는 표현이다. 언뜻 보면 수출규제 대상물질의 개발에만 관련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도체 생산라인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확대가 가능하다.

R&D나 테스트를 위해서는 생산 라인에서 돌려보는 것이 필수적이며, 결국 반도체 생산 관련 업무가 모두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본 수입에 90% 이상 의존하고 있는 리지스트(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생산에 사용되는 감광액인데, 직접 생산과정에 적용한 후 식각(에칭, etching) 작업까지 하고 다시 돌리는 전 과정을 거쳐야만 개발이 가능하다.

물론 특별연장근로를 위해서는 해당 노동자의 동의를 거쳐 어떤 경우에 필요한지를 노동부에 신고하도록 하고 있으나, 진짜로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지 노동부가 제대로 관리·감독을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어떤 명목이던지 ‘대상물질 개발을 위한 테스트’라고만 기입하면 무사통과가 된다.

가동률 대책이 아니라 연장근로 확대?

일본의 수출 규제가 현실화될 경우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의 원료 공급이 끊기게 되므로 반도체 최종조립을 담당하는 한국 공장의 생산물량이 줄어든다. 즉, 반도체 공장 가동률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가동률 저하 관련 대책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시간을 늘리는 대책이다. 앞뒤가 안 맞는 정책 아닌가?

물론 일본의 수출 규제 소식이 들린 순간부터 재고물량 비축이 시작되어 아마도 2~3개월 가량은 재고를 활용한 생산이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단기’ 대책일 뿐 장기적으로는 가동률 저하에 따른 고용불안 해소 대책이 추진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가 내놓은 대책은 무리한 ‘재난’ 해석에 이은 장시간 노동 허용 대책 아닌가.

최근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직접 나서 '애국 vs 이적' '친일' 논란을 이끌고 있는 상황은, 조만간 문재인 정부가 내놓을 "허리띠를 졸라매자" "노동자들이 고통분담에 나서라" 공세의 예고편이자 스포일러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로 벌어질 상황에 특별연장근로·재량근로 등 장시간노동을 갈아넣어 해결하려는 것이다.

노동자들 죽어나가건 말건?

"제품 개발을 위한 R&D 등 꼭 필요한 부분에 한해 화학물질 등에 대한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고, 필요시 신규 화학물질의 신속한 출시도 지원하는 방안 추진"

그런데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국산화나 제3국 대체 과정에 필요한 화학물질들이 무엇인가. 대표적인 물질이 포토레지스트나 에칭가스에 사용되는 불산 물질들이다. 불산은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그리고 구미공단에서 불산가스 유출사고가 벌어지며 노동자들을 사망으로 몰아넣은 바로 그 화학물질이다.

故 김용균 노동자 장례를 치른지 불과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위험천만한 △화학물질 인허가 기간 단축 △신규 화학물질 신속한 출시를 지원한다는 입장이 나온 것이다.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 수많은 타협으로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천신만고 끝에 김용균 법이 통과되었다. 그런데 고용노동부는 올해 초 시행령·시행규칙을 개판으로 만들더니 이제 일본 수출규제를 빌미로 김용균 법 자체를 무력화 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노동기본권에 구멍 뚫어 댐을 무너뜨리려

특별연장근로 허용과 재량근로 역시 주 40시간제를 근간으로 하는 연장근로 합산 최장한도 52시간을 무너뜨리는 방향이다. 게다가 일본의 수출 규제는 이제 서막이 시작되었을 뿐이며, 조만간 화이트리스트 배제 그리고 한국인의 일본 기업 취업 규제나 자금 관련 규제로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정부의 특별연장근로 허용과 재량근로 지침은, 다른 정책수단이 충분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출규제와 반일 감정에 편승해 노동기본권에 작은 구멍과 파열구를 내겠다는 것이다. 작은 구멍을 통해 이후 이어질 일본의 2차, 3차 공격이 벌어지면 이 구멍을 더 키워 노동기본권이라는 댐 전체를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재벌과 자본가들에게 물어야 할 책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노동자들에게 책임과 대가를 전가하려는 것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는 분명 잘못된 것이며, 이 조치의 출발점이 된 강제노역 사건 판결에 대한 일본의 항의도 옳지 않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1910년 일본 제국주의 한반도 강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부당한 조치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아베 정권의 수출 규제로 시작된 군국주의·제국주의·패권주의에 온힘을 다해 맞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노동기본권에 구멍과 파열구를 내는 방식이라면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허리띠를 졸라매자" "노동자도 고통분담에 동참하라"는 목소리로 또다시 노동개악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진짜 아베 정권에 맞서기 위해 국내에서 뭔가 조치가 필요하다면, 특별연장근로나 재량근로라는 구멍을 뚫을 게 아니라 강제노역 사건에서 일본 전범기업을 변호한 김&장부터 손을 봄이 마땅하다. 김&장 출신으로 청와대 또는 고위 관직에 앉아 있는 자들부터 물러나도록 해야 한다. 그 점에서 애국 논란을 이어가고 있는 조국 민정수석이 김&장 출신을 민정수석실에 두고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최근 조국 민정수석이 극찬했던 대한상의 회장을 비롯해 재벌과 대기업들 대부분이 자신의 법률자문으로 김&장과 계약을 체결하고 있는 점도 가만히 두고 볼 성격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현재 상황에서 모종의 불매운동이 필요하다면 김&장에 대한 불매부터 시작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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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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