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적입니다. 섬에 사막이 있습니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모래 언덕. 이 언덕에 오르면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신비롭습니다. 모래 언덕 양 옆에서는 드넓은 은모래 해수욕장이 유혹합니다. 섬 여행은 ‘여권 없는 해외여행’이라는 말을 실감시켜 주는 섬. 고운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길에 머물렀던 섬. 다산 정약용의 형이자 멘토였던 <자산어보> 저자 손암 정약전이 유배살이 했던 섬. 조선시대 말 오끼나와, 필리핀까지 표류했다 돌아와 표류담을 남긴 홍어장수 문순득이 살던 섬. 300년 된 옛 선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섬. 작은 섬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와 역사가 살아있는 곳은 희귀합니다.
올 여름 섬학교 휴가특집은 8월 9(금)-11(일)일, 2박3일로 신비로운 신안의 섬 <우이도>로 떠납니다. 해양문화사의 현장답사와 가벼운 숲 트레킹, 해변에서의 물놀이, 나무그늘 아래에서의 낮잠, 갓 잡아온 싱싱한 민어와 농어회에 곁들이는 약초막걸리 한 잔. 맛있고, 깊고, 고요한 외딴 섬의 휴가에 초대합니다(번잡한 여름 휴가철을 피해 8월 섬학교는 둘째 주말에 엽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8월의 답사지인 <깊고, 고요하고, 맛있는 외딴 섬-우이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이국적 풍경에 여행자들 몰려
섬은 무중력의 공간이다. 세상의 모든 무게를 다 내려놓게 만든다. 그래서일 것이다. 늘 섬을 떠돌며 사는 나그네도 어깨 위의 무게가 버거울 때마다 다시 섬으로 가게 되는 것은. 모래바람이라도 불어 쌓였던 것일까. 오늘은 또 문득 어깨를 털며 섬으로 간다. 우이도. 멀어서 더욱 그리운 섬. 목포항에서 편도 3시간의 뱃길. 여객선도 하루 한 번밖에 왕래하지 않는 낙도다. 지금은 한적한 섬이 됐으나 우이도도 한때는 몰려드는 여행자들로 몸살을 앓던 시절이 있었다. 모래 때문이었다.
바람의 손길이 만들어낸 산태는 우이도 돈목과 성촌 해변 사이에 있는 모래언덕(풍성사구)이다. 산태는 우이도의 상징이자 우이도를 세상에 알린 주역이었다. 80미터 높이의 산태는 작은 사막을 옮겨놓은 듯한 모습이다. 섬 속의 사막이라는 이국적 풍경이 여행자들을 불러 모은 동력이었다. 오랜 세월 산태는 주민들의 골칫거리였다. 바람 불면 몰아치는 모래 때문에 생활하기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우이도 처녀 모래 서 말 먹어야 시집간다”는 속담까지 생겼을까. 그래서 골재로 팔릴 뻔도 했었다. 그런 산태가 명성을 얻으면서 골칫거리가 보물이 됐다. 한동안은 이 사막의 풍경을 보기 위해 한 해 3만 명씩이나 찾아들었다.
산태를 배경으로 유지태, 김지수 주연의 영화 <가을로>가 제작되기도 했으니 섬 속의 사막은 내륙인들의 노스텔지어를 흠뻑 자극했던 셈이다. 산태에는 애틋한 전설도 전해져 신비감을 더했다. 그 옛날 돈목마을 총각과 성촌마을 처녀가 사랑에 빠졌다. 둘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산태 그늘 아래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총각이 나오지 않았다. 어선을 타고 나간 총각이 풍랑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처녀는 슬픔을 못 이겨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후 산태에는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었다. 죽은 총각은 바람이 되고 처녀는 모래가 되었다 했다. 그래서 두 연인이 만나 사랑을 나눌 때마다 산태에는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이라 했다.
다시 살아난 사막
우이도가 세간의 관심을 끌면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의 출입하자 산태는 조금씩 훼손되어 갔다. 국립공원에서는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를 시키고 난 뒤 복원에 나섰다. 하지만 출금 조치가 오히려 사막지형이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막은 초지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실상 산태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만들어낸 지형이었다. 우이도에서 산태는 아이들이 미끄럼이나 썰매를 타고 놀던 놀이터이기도 했다. 그래서 풀이 자라지 않았고 사구가 발달 됐었다. 인간의 적당한 간섭이 산태를 유지시켰던 것이다. 한동안 산태는 사막의 모습은 간데없고 잡풀들이 자라는 모래언덕이 돼버렸다. 더 이상 이국적이거나 신비한 매력도 없어졌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졌다. 모래바람에 신기루처럼 나타났던 사람들이 어느 날 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 근래에 복원 방식을 바꿔 자라난 잡목들과 풀들을 제거하자 산태도 옛 모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 섬 속의 사막으로 우뚝 솟아난 것이다.
원래는 우이도가 소흑산도
우이도란 이름은 섬의 모습이 황소의 귀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섬의 서쪽 양단에 두 개의 반도가 돌출한 것이 소귀 모양으로 보였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소구섬’ ‘우개도’라고도 했다. 면적 10.70㎢, 해안선 길이 21㎞, 인구 150여 명이 살아간다. 주민등록상에는 120세대 210명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는 80세대 150여 명 만이 거주한다. 고향에 집과 적을 두고 가끔씩 드나드는 이들 때문에 생긴 오차다. 섬은 1구마을과 2구마을로 나누어져 있는데 수군이 주둔하던 진리마을이 1구이고 지금도 섬의 행정 중심이다. 2구는 성촌과 돈목마을, 2곳의 자연부락을 아우르고 있다. 그밖에도 대초리, 예리 등 몇 개의 작은 마을이 더 있었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고 빈집들만 남았다. 옛길을 따라 1구에서 2구로 걸어 넘어가다 보면 폐허가 된 우이도 최초 마을 대초리를 만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흑산진 산하 수군이 주둔하던 우이보가 있었던 진리마을이 지금도 섬의 행정 중심이다. 그래서 도초면 출장소도 진리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가거도를 소흑산도라 불렀었지만 원래는 우이도가 소흑산도였다.
압권은 띠밭너머 해변
우이도에는 산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산태의 명성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던 보물들도 많다. 무엇보다 큰 보물은 6개나 되는 백사장이다. 해변들은 산태 못지않은 비경인데다 모두 해수욕하기에 적당한 수심을 갖추고 있다. 우이도에서는 해변을 장골이라 한다. 그래서 돈목해변은 돈목장골, 성촌해변은 성촌장골, 띠밭너머해변은 띠밭장골이다. 나머지 3개는 돈목에서 도리산 가는 길에 있는 작은 해변들인데 장칠, 장고래미, 넙번지 장골이다. 이 3곳의 해변은 마을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비밀의 해변이기도 하다. 돈목, 성촌 해변은 제법 이름난 해수욕장이지만 해변들 중에서도 압권은 단연 띠밭너머 해변이다. 이 드넓은 해변에는 인공의 구조물이 전혀 없다. 야생의 모습 그대로다. 진리마을에서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목초지 언덕을 넘어서면 띠밭 해변이 펼쳐지는데 전봇대 하나 없는 해변은 마치 시원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국보급 우이선창
또 하나의 보물은 축조 된지 300년 남짓 된 진리마을의 옛 선창이다. '우이선창'이란 이름을 가진 이 선창은 1745년 3월(영조21년)에 완공됐으니 아마도 원형이 보존된 이 땅의 가장 오래된 옛 선창이지 싶다. 한국 해양문화사의 독보적 유물이다. 우이선창은 포구와 방파제, 배를 만드는 선소 기능까지 했었다. 요즘 만드는 방파제들도 큰 태풍 한번이면 무너지기 일쑤인데 3백 년 동안이나 유지됐다는 사실은 기적 같은 일이다. 전남도 기념물 243호다. 그런데 국보급 문화재가 겨우 도기념물이란 사실은 가슴 아프다. 우리가 얼마나 바다와 섬과 해양사를 천대하고 있는지를 이 선창에 대한 대접이 보여준다. 국보나 보물 등 국가문화재로 지정해야 마땅하다.
표류한 필리핀인들과 여송국
우이도는 또 해양사의 진귀한 서사가 깃들어 있는 유서 깊은 섬이기도 하다. 11801년(순조 1년) 제주도에 한 척의 배가 표류해 왔다. 배에는 5명이 타고 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청나라 사람으로 여기고 심양으로 송환했지만 청나라에서는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니라며 다시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표류인들은 9년 동안이나 제주도에 억류됐다. 그런데 1809년 이들 앞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우이도에 사는 문순득이란 사람이었다. 이들은 여송국(필리핀) 사람들이었는데 문순득이 여송국 언어를 알고 있었다. 마침내 표류인들은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머나먼 외딴 섬 우이도에 살던 문순득은 어떻게 필리핀어를 알게 됐던 것일까.
문순득 또한 표류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이도 출신 홍어장수 문순득(1777-1847)은 1901년 12월 흑산 홍어를 사서 싣고 영산포로 가다가 표류해서 외국의 여러 나라를 떠돌다 4년만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홍어장수 문순득이 홍어를 사러 갔던 곳이 신안군 태도군도의 서쪽, 서바다이다. 홍어잡이 배들이 태도 바다에서 잡은 홍어를 문순득 같은 상인들은 도매로 사서 영산포로 싣고 나가 팔았던 것이다. 상중하 태도,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태도는 당시 태사도(太砂島)라고 했었다.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한 문순득 일행은 유구국(琉球國)즉 현재의 오기나와까지 흘러갔다. 문순득 일행은 오까나와에서 3개월을 머물다가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중국행 배를 탔는데 다시 풍랑을 만나 여송국(呂宋國, 필리핀)의 마닐라까지 표류해 갔다. 문순득은 여송국에 9개월을 머물다가 마카오, 광둥, 난징, 베이징을 거쳐 1805년 1월에야 고향 우이도로 돌아갔다.
정약전이 남긴 문순득의 표류담
역사 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문순득의 표류담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당시 우이도에서 유배살이를 했던 손암 정약전 덕분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형이자 <자산어보>의 저자인 정약전은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됐던 신유박해(1801년) 때 흑산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정약전은 흑산진 관할이던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는데 문순득이 귀향한 1805년에는 우이도에 살고 있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에게 표류담을 전했고 정약전은 이를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남겼다. 책에는 문순득이 경험한 당시 동아시아 지역의 풍속과 생활상, 언어 등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다. 오키나와 지역의 장례문화와 전통의상에 대한 기록도 있고, 당시 필리핀 사람들이 닭싸움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문순득의 표류담은 당시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전의 동생 정약용에게도 전해졌다. 정약용은 문순득이 마카오에서 보고 온 화폐제도를 참고해 <경세유표(經世遺表)>에 화폐제도의 개혁안을 남겼다. 정약전은 문순득이 개국 이래 해외의 여러 나라를 최초로 보고 돌아온 사람이란 뜻으로 천초(天初)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 물론 문순득이 외국을 표류했다 귀환한 최초의 사람은 아니다. 조선중기의 문신 최부(1454-1504)도 표류해 중국의 저장성까지 갔다 돌아왔고 제주도 유생 장한철(1744-?) 또한 항해 중 표류해 베트남까지 갔다 오기도 했다. 그 밖에도 기록으로 남지 않은 수많은 어부나 뱃사람들의 표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전과의 만남으로 문순득은 자신의 표류담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 덕에 그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게 됐다.
정약용도 문순득이 여송까지 표류했다가 살아 돌아왔다는 뜻으로 문순득의 아들에게 여환(呂還)이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정약전 사후인 1818년에는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 제자 이강회가 우이도로 문순득을 찾아가 외국의 선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선박에 관한 논문인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썼다. 이강회는 정약전의 <표해시말>과 자신이 쓴 <운곡선설> 등을 묶어 <유암총서(柳菴叢書)>를 남겼다.
정약전 형제의 우애
정약전이 최후를 맞이한 곳도 우이도다. 1814년(순조 14) 여름, 다산은 유배에 풀려날 것 같다는 소식을 접하고 형을 만나러 흑산도에 가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하지만 정약전은 “나의 아우로 하여금 나를 보기 위하여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으니 내가 우이보(牛耳堡)에 가서 기다리겠다”고 한 뒤 우이도로 떠나려 했으나 흑산도에 남아주길 간청하는 주민들의 만류로 1년 여를 더 흑산도에 머물렀다. 1816년 다시 우이도로 건너온 손암은 결국 동생인 다산을 만나지 못하고 우이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진리마을에는 홍어장수 문순득이 살았던 집이 있는데 그 뒤편에 정약전이 살았었다. 문순득이 살던 집은 근래까지도 후손들이 살았으나 지금은 빈집이 되었고 정약전이 살던 집은 터만 남았다. 문순득 생가는 깃든 이야기뿐만 아니라 2백년이 넘은 건축 역사만으로도 문화재 가치가 크다.
배를 타지 않고 진리마을에서 돈목이나 성촌마을을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십리 산길. 진리고개를 넘으니 산 속에 너른 분지가 나타난다.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에 의지에 힘겹게 산길을 오른다. 돈목에서 오시는 길이다. 할머니는 저 느린 걸음으로 족히 두 시간은 걸어왔을 것이다. 산에는 산열매들이 익어간다. 으름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고 가막사리는 시큼하다. 구지뽕나무 열매는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산머루는 설익은 것이 반이다. 산머루와 구지뽕 열매를 따서 갈증을 채운다. 산길을 가는 즐거움의 반은 산열매들이 준다.
처음 생긴 대초리는 폐촌이 되고
산속에 빈집 두 채가 보인다. 돌담만 남은 집터도 여럿이다. 전봇대를 보니 아주 오래된 것들이다. 언제까지 사람들이 살았을까. 젊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남은 노인들도 이승을 떠나면서 마을은 폐촌이 되었을 것이다. 떠나간 노인들은 저승의 어느 산골짜기 양지녘에 또 집을 짓고 머무시는 것일까. 빈집은 두 채만이 아니다. 빈집과 담장들, 여기도 한때는 제법 흥성한 마을이었다. 농사짓던 산밭도 제법 넓다. 나무를 때고 곡식이 귀하던 시절에는 우이도의 부촌이었을 것이다. 마을은 20여 년 전에 폐촌 된 대초리. 500여 년 전 우이도에 처음으로 생긴 마을이었다. 시간은 가장 오래된 것을 가장 먼저 사라지게 만들었다.
바닷바람을 덜 받는 산속이라 그런 것일까. 마지막 사람이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났다는데 집들은 조금만 손보면 살 수 있을 정도로 멀쩡하다. 빈집, 광에 놓인 항아리들도 성하다. 괘종시계는 11시 15분에서 바늘을 멈추었다. 시계가 멈추고 난 뒤에도 시간은 또 얼마나 무심히 흘러갔던 것일까. 문간방의 낡은 재봉틀만 홀로 녹슬어 간다. 저 망가진 재봉틀처럼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사람도 생애도 되돌 길은 영영 없다.
최치원 탄생 설화인 금도치 설화
이제 고개 하나를 더 넘으면 돈목, 성촌마을이다. 산 아래 모래밭과 바다는 청옥빛으로 푸르다. 모래 언덕이 있는 성촌마을 해변에는 금도치 전설이 서린 굴이 있다. 고운 최치원의 탄생 설화인 금도치 설화가 이 섬에도 전해진다. 우이도와 고운의 인연에서 비롯된 전설일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당나라 유학길에 고운이 이 섬에 기항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우이도 상산봉에는 고운이 당나라 유학길에 신선과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신라 때부터 우이도는 중국으로 가는 항로상에 있었다. <택리지>는 영암의 구림이나 월남 마을을 출항한 배가 흑산 바다를 거처 순풍을 만나면 6일 만에 당나라의 태주 영파부 정해현에 도착했다고도 하니 중국과의 최단거리 항로로 각광받았던 것이다. 장삿배를 타고 이 길로 유학을 떠났던 최치원과 김가기, 최승우 등은 모두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했다.
우이도 섬밥상과 약초막걸리
우이도에는 식당이 따로 없다. 민박집에 묵어야만 식사를 할 수 있다. 집집마다 각기 다른 밥상을 받아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여행의 묘미다. 오늘 섬밥상에는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다 모였다. 우이도는 해산물과 산나물 등이 풍성한데다 육지와 교류도 쉽지 않아 대부분 섬 자체에서 나는 생산물로만 밥상을 차린다. 진정한 로컬푸드고 제철밥상이다. 그물에서 막 건져온 살찐 농어회와 농어 맑은 국, 모래밭에 깊이 박혀 있어 캐기 어려운 방풍뿌리 무침. 우이도 산 고사리나물과 파래무침. 다들 조미료나 설탕이 없어도 달디 달다.
그런데 이 풍성한 밥상에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우이도의 명물이 있다. 약초막걸리다. 진귀한 약초막걸리가 섬밥상의 흥을 돋운다. 우이도는 약초술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전설적인 술꾼도 생존해 있다. 팔순이 되도록 평생 술만 마시고 살았는데도 여전히 건강하다. 우이도에서는 그분이 마시는 술을 조금술이라 한다. 술자리를 한 번 시작하면 바다 물때인 한 조금 동안 계속되기 때문이다. 한 조금의 주기는 보름이니 한 번 앉았다 하면 보름을 쉬지 않고 마셔댄다 해서 조금술이다. 술고래도 이런 술고래가 따로 없다. 그런데 그 어른이 마시는 술은 죄다 약술이다. 하수오, 우슬, 더덕, 도라지, 천문동 등 우이도 산야에서 나는 여러 가지 약초를 캐다 술을 담가 두고 드신다. 그 술고래 어른처럼 삽주, 천문동, 엉겅퀴, 잔대 등의 약초를 가마솥에 푹 다려내 담근 약초막걸리 한 잔을 마시니 술보다 약초 향에 취하는 듯하다. 여행의 반은 음식이다. 우이도 섬밥상과 약초막걸리. 이것만으로도 우이도에 가야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8월 섬학교 제84강 <여름휴가특집 : 깊고, 고요하고, 맛있는 외딴 섬-우이도 2박3일>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8월 9일(금)>
06:00 서울 출발(뱃시각에 맞추기 위해, 05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4강 여는 모임
-목포 도착
-점심식사(별미 장어탕)
-목포 출항
-우이도 진리항 도착
-우이도 숲길 걷기(3.5km)
진리항→문순득생가-진리몰랑(고개)→대초리→대초리고개→돈목해수욕장
-휴식 및 자유시간
-저녁식사 겸 뒤풀이(자연산 민어회와 매운탕)
20:00-자유시간 후 취침(다인실)
<8월 10일(토)>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우이도 가정식)
-둘째 날 걷기(3km)
돈목마을-돈목해변-성촌마을-성촌해수욕장-사구(사막지형)-돈목해변-숙소
-점심식사(우이도 가정식)
-자유시간(물놀이, 낚시, 책읽기, 낮잠 등 자유롭게)
-저녁식사 겸 뒤풀이(자연산 농어회와 매운탕)
20:00-자유시간 후 취침(다인실)
<8월 11일(일)>
05: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우이도 가정식)
-우이도 출항
-목포 도착
-점심식사(남도밥상)
-장보기(어판장)
13:00 서울 향발. 제84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버프(얼굴가리개),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8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4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0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70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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