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노동자에게 7월 1일은 "달력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날"이다. 1998년 7월 1일, 파견법(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을 때 모두들 이 법이 어떤 법인지 잘 몰랐다. 2년이 꼭 지난 2000년 7월 1일, 파견법으로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모두 이 법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해고되었기 때문이다.
달력에서 지우고 싶은 날짜, 7월 1일
2004년부터 매년 7월 1일 역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잊지 못할 날이다. 2003년 근로기준법 개정에 따라 법정노동시간이 1주당 40시간으로 단축되었는데 2004년 7월 1일에 공기업·금융기업과 1천인 이상 사업장부터, 그리고 매년 사업장 규모를 줄여서 7월 1일마다 적용이 확대되었다.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좋은 일인데 왜 잊지 못할 날이냐고? 노동조합을 가진 정규직 노동자들은 문제가 없었다. 임금삭감 없이 노동시간이 줄어들거나 그게 아니면 임금이 늘어났기에 오히려 박수치고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달랐다.
특히 노조가 없는 99%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7월 1일은 '토요일 임금'이 갑자기 무급으로 바뀌게 된 날을 의미했다. 노조가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단체협약으로 토요일을 '약정 유급휴일'로 정해 임금을 보전할 수 있었다. 정규직·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더욱 벌어지기 시작했다.
2007년 7월 1일은 정말 찢어버리고 싶은 날짜이다. 파견법과 함께 비정규악법의 양대 축을 이루게 될 기간제법(기간제·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날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번에도 2년 만에 해고될 것임을 직감했지만 자본가들은 7년 전보다 훨씬 진화했다. 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계약직 노동자들을 미리 자르거나 도급·파견으로 돌려버렸다.
김대중 정부는 파견법을, 노무현 정부는 기간제법을
파견법을 만든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는 파견법을 더 개악하고 기간제법을 제정하면서 '비정규직보호법'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파견법이 파견노동자를 보호한 적이 없는 것처럼, 비정규직 보호법 역시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이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법이었다.
2004년에 노무현 정부가 이 법을 처음 제안한 직후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법을 대표적인 악법으로 규정하고 열린우리당 점거농성, 국회 고공농성, 총파업과 집회를 주도하며 2년 넘게 입법을 지연시킨 바 있다. 그 과정에 수십~수백 명의 비정규직노조 지도자들이 투옥되었고 수천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징계와 해고, 손배가압류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2006년 말, 노무현 정부가 야당인 한나라당을 윽박지르기까지 하며 파견법 개악안과 기간제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심지어 '대통령 사퇴'까지 걸고 한나라당을 압박했고, 노무현이 사퇴하면 곧바로 치러야 할 대선 후보를 결정하지 못했던 한나라당은 국정 협조를 약속했으며 그 첫 번째 협조가 바로 파견법·기간제법 국회 강행통과였다.
"누가 이런 법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까?"
비정규악법이 통과되고 다음해 7월 1일 시행되기 전까지 수많은 사업장에서 계약직 노동자들이 해고되거나 도급·파견으로 강제로 돌려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그때 계약직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조합으로 조직하고 집단해고에 맞서 싸우려는 정규직노조들이 있었다. 이랜드일반노조와 뉴코아노조.
전국의 매장에서 비정규직 동료들을 지키기 위한 투쟁과 저항이 지속되었고, 그 분노는 비정규악법이 시행되기 딱 하루 전인 2007년 6월 30일에 터져 나왔다. 월드컵경기장에 위치한 홈에버 매장(현재는 홈플러스 월드컵몰점)을 점거하고 저항에 나선 것이다. 1주일 뒤에는 뉴코아 강남점의 킴스클럽 매장도 점거했다.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 모두가 함께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 비정규직 보호한다면서 무슨 법을 이 따위로 만들었습니까? 이건 비정규직 보호법이 아니라 비정규직 해고법입니다. 누가 이런 법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까!"
점거농성이라는 대단히 과격한 투쟁형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민들이 이 투쟁에 보낸 지지는 매우 폭발적이었다. 대국민 여론조사를 해도 "오죽했으면 저 노동자들이 점거에 나섰겠나", "다소 매출에 피해가 있더라도 비정규직 노동자들 보호해줘야 한다"는 여론이 작게는 60%, 많게는 80%를 차지했다.
비정규직 저항의 날, 6월 30일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점거파업이 있은 지 꼭 10년 뒤인 2017년 6월 30일, 5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고 서울 광화문으로 몰려들었다. 다음날인 7월 1일에 악법이 시행되기 때문도 아니었고, 10년 전 이랜드·뉴코아 점거파업을 기념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들은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노조 할 권리’를 요구하는 민주노총의 ‘사회적 총파업’ 대오였다.
지금까지 민주노총이 벌인 수많은 총파업이 있었지만, 2017년 6.30 사회적 총파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주력으로 한 첫 번째 시도였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 건설일용 노동자들, 금속 사내하청 노동자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또한 '최저임금 1만원'을 그저 슬로건이 아니라 실질적 요구로 조직된 첫 번째 총파업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2018년 6월 30일에는 7~8만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이날은 토요일이었기에 파업을 조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 등 노동존중의 실종을 규탄하고 다시 한 번 최저임금 1만원과 비정규직 노조 할 권리를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두 힘을 모은 것이다.
7월 1일을 기점으로 역대 민주당 정권들은 비정규직 차별과 무권리를 합리화하는 제도를 설계하고 자본가들은 그런 제도를 더 악용해 비정규직 양산과 착취를 더 강화했다. 하지만 진화하는 것은 자본가들만이 아니었다. 노동자들도 20년 고통의 세월을 겪으며 진화해 왔다. 7월 1일에 생긴 파견법·기간제법을 폐지하고 온전한 권리 쟁취를 위해 6월 30일을 저항의 날로 선택한 것이다.
"누가 이런 정규직화 해달라고 했습니까?"
2년 전 6.30은 금요일로 사회적 총파업의 날이었고, 1년 전 6.30은 토요일로 비정규직 상경투쟁의 날이었다. 올해 투쟁을 중심적으로 준비해온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요일인 6.30이 아니라 7월 3일 총파업을 조직해왔다. 2년 전에 사회적 총파업을 주도했던 바로 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번에는 하루만이 아니라 3일간의 총파업으로 진화한 투쟁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의 요구 목록에는 당연히 최저임금 1만원과 비정규직 노조 할 권리가 포함되어 있지만, 공공부문 비정규직이 투쟁의 주축이 되면서 자회사·무기계약직 같은 가짜 정규직화 말고 '온전한 정규직화'라는 요구가 추가되었다. 당선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인천공항을 방문해 약속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는 이미 빛이 바랜 지 오래 아니던가.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가짜 정규직화를 밀어붙이는 데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가짜 정규직화를 받아들이기 싫으면 모조리 해고하겠다고 한 것이다. 도로공사에서 톨게이트 수납업무를 맡아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자회사로 들어오던지, 아니면 단기계약직으로 전환하라는 안을 제시한 뒤, 이도 저도 싫으면 해고할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정규직이면 당연히 직접 고용해야지, 자회사 이게 도대체 뭡니까? 이건 그냥 조금 큰 하청업체로 들어가라는 거잖아요? 이럴 거면 왜 정규직화 한다고 사기를 치나요."
1500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자회사와 계약직이라는 가짜 정규직화에 반대해 투쟁하고 있다. 도로공사가 자회사를 출범시키기로 한 날짜, 그러니까 이도 저도 싫으면 해고하겠다고 통보한 시한은 얄궂게도 7월 1일이었다. 그래서 해고를 하루 앞둔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올해 6월 30일, 서울 톨게이트 케노피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2007년 6월 30일, 홈에버 월드컵몰점을 점거한 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누가 이런 법을 만들어 달라고 했나요”라고 외쳤다면, 2019년 6월 30일 서울톨게이트 고공농성을 시작한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누가 이런 정규직화 해달라고 했나요"라고 외치고 있다. 12년의 시간을 훌쩍 넘었건만 처절한 투쟁대오의 맨 앞에 여성 노동자들이 다수라는 점은 꼭 닮았다.
닮은 것이 꼭 그것뿐이랴
노무현 정부는 이랜드·뉴코아 점거파업 3주만인 2007년 7월 21일, 전격적으로 공권력을 투입해 대부분이 여성인 점거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랜드일반노조·뉴코아노조 지도부 대부분 구속되거나 수배가 떨어졌다. 소위 '비정규직보호법' 국회 강행통과가 추진되던 시절 청와대 민정수석, 그리고 공권력 투입 시점 청와대 비서실장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노무현 집권시절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환노위에서 비정규악법 통과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는 이목희 씨는, 이제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노조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게 노동존중이 아니다"라며 여전히 망발을 일삼고 있다.
1500명에 달하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에 대한 7월 1일 집단해고를 강행하는 도로공사 이강래 사장은, 김대중 정권에서 안기부 기조실장과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냈으며 민주당 공천으로 3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니 현 집권세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물이 저런 위험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점은 문재인 정권도 같은 생각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달라진 것도 있다. 2007년 이랜드·뉴코아 점거파업에 조직의 명운을 걸겠다고 약속했던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 이석행과 민주노동당 대표 문성현은, 12년 전에는 투쟁대상으로 삼았던 민주당의 품에 안겨 각각 폴리텍대학 이사장과 경사노위 위원장 감투를 받았다. 지랄맞은 일이지만 여기 거론된 인물들 모두 내년 총선에서 또 이름을 확인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외거(外居)노비에서 솔거(率居)노비로
하지만 다른 역사적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이은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김영삼 정권을 무대 저편으로 보내버린 것처럼, 2006년 비정규악법 강행통과에 이어 이랜드·뉴코아 점거파업에 대한 무자비한 공권력 침탈과 지도부 구속은 노무현 정권을 무대 저편으로 보내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자회사 이거 정규직화랑 아무 상관없어요. 외거노비로 있다가 솔거노비로 들어온 것일 뿐이에요. 결국 노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거죠. 그런데 집 안에 들여놓고서 간섭하는 건 훨씬 더해요. 이 지침 지켜라, 저 규율 따라라, 평가기준에 어긋난다 …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모회사에서 직접 대체인력 투입하죠. 이건 노동3권 모두 박탈당한 노예나 다름없어요."
선견지명(?)이었을까? 철도공사와 서울시는 오래 전부터 온전한 정규직화가 아니라 자회사 방식으로 비정규직 고용 일부를 흡수해온 바 있다. 그 정책에 따라 자회사로 전환된 노동자들이 몇 년을 경험해본 뒤에 전해주는 말이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바깥에 기거하며 농사를 지어 세경을 바치던 외거노비에서, 집안에 들어와 24시간 내내 5분 대기조로 노력봉사를 제공해야 했던 솔거노비로 변한 것뿐이라고 말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정책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있었다. 그러나 앞선 정부들이 기간제(계약직)만을 전환대상으로 삼은 반면, 문재인 정부는 용역·파견 등 간접고용까지 전환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전환방식 대부분이 자회사라는 점에서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이전 정권보다 낫다고 얘기되었던 정책들 대부분이 이런 평을 받고 있으니 "도대체 박근혜 때와 달라진 게 뭐냐"는 말이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그래, '촛불정부'라고 자임만 할 뿐 본래부터 이걸 감당할 능력이 안 되는 정권 비판에만 열을 올려봐야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인사이드 경제> 눈에는 6월 30일에 고공에 오른 톨게이트 노동자들만 보인다. 사흘간의 총파업을 결의하고 7월 3일에 서울에 오를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기대를 품어본다. 진짜 희망을 만들 사람들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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