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친일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친일진상규명법'이 광복절 하루 전인 14일 국회의원 154명의 발의로 국회에 제출됐다.
매년 광복절마다 되풀이돼왔던 친일파 청산 문제가 실질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해 왔던 가운데 이번 법률안 제정이 현실화될 경우 구체적인 친일 청산절차가 마련될 가능성이 있어 우리나라가 드디어 진정한 의미의 일제잔재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대통령직속기구로 5년간 한시적 설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회장 김희선 의원)'을 중심으로 한 여야 의원 154명은 14일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공동 발의로 국회에 제출했다.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시기의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진상을 조사, 그 결과를 사료로 남김으로써 왜곡된 역사와 민족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법안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대통령직속기구로 5년간 한시적으로 설치해 친일혐의자 선정과 조사, 보고서 작성, 사료 편찬 작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 법은 친일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것으로 처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위원회는 위원장 1인과 상임위원 2인을 포함한 9인의 위원으로 구성하고 국가기관이나 관련기관에 사실조회 및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법안은 특히 반민족행위를 일제강점기 또는 그 직전에 ▲일본 군대에 장교 또는 하사관으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한 행위 ▲창씨개명을 주창하거나 권유한 행위 ▲일제 통치를 찬양하고 내선융화, 황민화운동에 앞장선 행위 ▲일제 전쟁수행을 돕기 위해 군수품을 생산하고 자원을 제공한 행위 ▲도(道),부(府)의 자문결의기관 의원, 읍면회의원 또는 학교평의회원으로서 일제에 협력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법안은 또 위원회 활동을 방해하거나 허위자료를 제출한 자에 대해서는 위원장이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관련법규를 통해서 처벌할 수 있는 조항까지 두고 있다.
***"반세기만에 다시 친일진상규명이 시작되는 역사적 의미"**
민주당 96명, 한나라당 49명, 비교섭단체 9명 등 국회 재적의원(272명)의 과반수인 154명이 서명함으로써 이들이 모두 찬성할 경우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지난 14대때 이완용 자손의 재산환수 등이 사회문제가 되자 "국회가 민족정기 회복 차원에서 친일문제를 재조사하자"는 내용의 '민족정통성 회복 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는 김원웅 의원 측은 "그 당시에 수개월 걸려서 국회의원 173명의 서명을 받아냈으나 상임위에서부터 반대가 심해 상정조차 되지 못했으며 결국 회기가 넘어가 자동폐기 됐었다"면서 "이번에도 과반수 국회의원들이 서명은 했으나 정작 법안이 상정되면 찬성하지 않는 의원이 늘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법안 제출을 주도한 민족정기모임 회장인 민주당 김희선 의원 측은 이러한 우려에 공감하면서도 "이번에는 특별히 반대하는 흐름이 없고 과거처럼 정쟁의 소지가 없다"면서 법안의 통과를 조심스럽게 낙관했다.
김희선 의원측은 이어 "이번 법안은 지난 1949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친일진상규명이 중단된 이후 반세기만에 재개되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반민특위법과 이번 법안이 차이를 보이는 점은 처벌 조항의 유무"라면서 "일제관보자료 등을 조사 진상규명 및 사료편찬을 함으로써 우리 역사에 공인된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민특위란 일제에 협력해 민족에 해악을 끼친 친일파들을 척결, 처벌하기 위해 1948년 10월 국회에 설치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말하는데 49년 1월부터 본격적인 조사활동을 시작했다.
반민특위는 총 682건을 조사해 기소 221건, 재판부 판결 40건, 체형 14건의 성과를 냈으나 친일파출신을 요직에 중용한 이승만 정권의 집요한 방해로 49년 6월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 국회 프락치사건 등을 거치면서 결국 중도에 해체되는 비운을 겪었다.
***"일본에서는 해방됐으나 일제 부역자들에게서는 아직 해방되지 못했다"**
사회 여러 단체들은 이번 법안 제출에 대해 늦었지만 고무적인 현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통일시대 민족문화재단 산하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해방 직후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인데 지금까지 늦어졌다"면서 "시기는 늦긴 했으나 정치권이 나선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크게 반겼다.
그는 이어 "친일파는 오늘날까지도 사회 전반에 걸쳐 세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를 파헤치려 하면 빨갱이로 몰렸다"면서 이제는 국가 자존심을 회복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과 함께 7백8명의 친일파 명부를 발표해 사회적인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통일시대 민족문화재단은 현재 산하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를 두고 친일파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조세열 사무총장은 "2005년 해방 60주년을 맞이해 종합적인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근 국회의 미온적인 과거사 청산 노력에 반발하며 국적포기를 선언한 일제 강제 징용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도 이 법안의 의미는 각별하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의 모임' 대표 최봉태 변호사는 "58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법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이 마음 아프다"면서 "반민특위의 좌절을 넘어 이제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물리적으로 일본에서는 해방됐으나 일제 부역배들로부터는 아직 해방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번 법안은 국가적 의미에서는 친일당사자를 징벌하지 못하고 넘어간 한국현대사에 대한 교훈을 제공할 것이며 권리구제를 받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민특위 이후 몇 차례 시도됐다가 좌절된 국가 차원의 친일잔재 청산이 이번에는 진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국민적 관심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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