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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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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신간]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벌인 세균전의 추악한 실상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도대체 어느 정도가 진실일까.

한창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하는 문화계 작품들이 유행이다. 영화 ‘매트릭스’도 그런 류가 아닐까. 꿈에서 깨어난 자들만이 가상현실에서 펼쳐지는 허상을 제대로 바라본다. 허상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워 가상현실의 ‘이성마취제’에 다시 취하고자 하는 인물도 있지만.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괜히 주변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사실’은 간혹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나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면 말이다.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고 밝혀졌을 때 우리는 묘한 감정을 느낀다. 새로운 사실을 거부하고 싶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이렇게 속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하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이런 일이 간혹 일어났다. 새로운 역사적 증거가 발견되면서 기존의 해석이 그릇되었기에 역사적 진실이 다시 정립되기도 한 것이다. 근자에 있었던 제주4.3사건에 대한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의 새로운 자료에 따른 해석이 그 비근한 예다. 조건부라는 단서를 부치기는 했으나 위원회의 발표내용에 의하면 군경 토벌대에 의한 희생은 전체의 78.1%였다. 위원회가 새로 밝혀낸 사실들에 의해서 이 사건의 성격은 단순히 무장공비에 의한 반란에서 공권력에 의한 희생도 크다는 것으로 재정립되었다.

사고 지평의 확장이다.

***“한국전쟁을 새로운 측면에서 접근한 실증적인 연구 성과물”**

<사진>

새로운 사실을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사고 지평의 확장을 하게 해주는 책이 출판되었다. 캐나다 요크대학의 스티븐 앤디콧 요크대 교수(동아시아사)와 에드워드 해거먼 교수(현대전쟁사)의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The United States and Biological Warfare)>(중심 펴냄ㆍ375쪽ㆍ1만8천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한국전쟁을 새로운 측면에서 접근한 실증적인 연구 성과물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 무기를 사용하였다는, 단순한 설로만 존재해왔던 얘기를 매우 방대하고 정밀한 증거들을 통해서 고증해내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로 재직 중인 역자 안치용과 박성휴는 “한국인을 가장 오래 짓눌려 온 이성마취제는 무엇일까”라는 물음 속에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된 동기와 소회를 밝히고 있다. 그들은 주저치 않고 ‘한국전쟁’을 꼽는다. 한국인은 “그 앞에서는 합리나 논리, 비판, 이견, 합리적 의혹 제기나 논리적 추론 등 모든 이성적 판단이 마비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터부의 정점엔 ‘미국’이 있다고 확신하면서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수행한 역할에 대해 이성적으로, 때로는 비판적으로 접근하기가 쉽지만은 않다”는 말로 이 책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이 책은 바로 한국인에게 이성마취제였던 한국전쟁에서의 미국의 모습을 “이제 고통을 참으며 인내력 있게 이성적으로 사고할 때가 되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 책의 목적을 보다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한국전쟁에서 생물학전 유무를 둘러싼 양측(미국 - 중국ㆍ북한)의 입장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우리 연구는 이러한 상반된 주장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는 일”이며 “우리의 희망은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추가함으로써 현대 전쟁의 범위를 확대한 위기의 시대에 관한 역사 이해를 돕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결론으로 도출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벌였다”는 저자들의 주장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의 방대함과 치밀함에 있다. 저자들은 20여년에 걸쳐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중국, 북한의 문서보관서를 뒤지고 관련자들을 인터뷰해 미국의 생물학전무기 개발 역사와 정책, 2차대전 종전 직후 미국 정부와 일본 731부대 전범들과의 비밀 거래과정,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무기를 사용한 이유 등 미국의 세균전 전모를 밝히고 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이성마취제를 원하는 메트릭스의 ‘사이퍼’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흥미로운 사실과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한 증거 가운데 중국 공중보건국의 자료는 “전문적이고도 균형잡힌 기록”을 남겼다고 저자들은 본다. 중국 공중보건국은 당시 한국 접경 지역에서 모든 생물학전 증거를 발견해 보고할 책임을 지고 있던 기관이었는데 이 기관의 내부 극비 문서는 냉정하게 그 당시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조지프 니드햄 박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제과학위원회(ISC)의 보고서와 미국 문서보관소로부터 찾아낸 ‘생물학전 네트워크’ 관련 자료는 미국 내 은밀히 진행되어 온 생물학 무기 개발과 한국전쟁기간 동안 국방부장관과 공군참모총장간의 의견교환록 등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적 이해에 접근해 가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언제, 어디에서 이러한 생물학전 자료를 축적하게 되었는가. 저자는 이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졌던 ‘악마와의 계약’에서 찾고 있다. “미국은 1947년 일본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을 비롯해 생체 실험 관련자들로부터 실험 자료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이들을 모두 전범 기소에서 면제해 주는 ‘악마와의 계약’에 가까운 비밀거래를 했다.” 한국전쟁 당시 이들 일본 전범들은 도쿄에 본부를 둔 미국 극동의무사령부 산하 406의무부대 및 8003부대의 생물학전 연구에 깊숙이 참여해 병원체를 옮기는 매개 곤충에 대한 연구를 행했다고 저자들은 증거를 제시한다.

한 가지 더 궁금한 점을 저자들은 자세히 정리해준다. 왜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생물학무기를 사용한 것인가. 저자는 이를 몇 가지로 정리한다. 우선 미국 스스로 느끼고 있던 도덕적 확신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합리화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2차대전 이후 총력전을 다시 치를 수 있다는, 기술과 노하우에 기반한 자신감도 부분적 이유다. 아울러 저자는 인종적 편견과 서구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이 도전받고 있다는 두려움도 크게 작용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성마취제에서 깨어나야“**

책을 높고 한숨 돌리다보면 꼼꼼한 주석이 눈에 띈다. 20여년에 걸친 방대한 자료를 하나하나 정리해 놓은 주석만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함부로 치부할 수 없을 듯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한국인에게 있어 미국은 여전히 이성마취제인가.

한국전쟁에서만큼은 아직 그러한 성격이 짙다. 하지만 이성마취제는 깨져야 한다. 이 책은 그러한 ‘모험’에 들어서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듯하다. 자신이 메트릭스 내에서 ‘네오’인지 ‘사이퍼’인지 확인해 보는 재미도 있다.

끝으로 저자의 “현실적으로 국제정의는 항상 전쟁의 열광에 희생됐다“는 언사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 속에서 오히려 전쟁의 열광이 지나간 후의 시간과 역사적 자료는 우리에게 역사적 진실에 접근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느낀다면 기자만의 망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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