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방미전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도 미국의 앨런 그린스펀 같은 중앙은행장이 필요하다"고 발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한국은행 일각에서는 "한은의 독립성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배려한 발언"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했었다.
그 해석이 옳은지 여부는 차치하고 최근 박승 한국은행 총재의 행보는 최소한 앨런 그린스펀 미국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과는 크게 다르다. 미국의 중앙은행장으로서 그린스펀은 '무거운 입', '극도로 모호한 발언' 등 말 한 마디 자체에 엄청난 무게를 실어 왔다. 때문에 그린스펀은 '경제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미국의 거시경제정책을 좌우하는 권위를 갖고 있다. 반면 박승 총재는 "훈장 스타일의 다변"이다. 특히 최근에는 연일 금리인하의 당위성을 '해명'하는 연설로 바쁘다.
***박승총재의 '경제위기 도래론'**
박 총재는 '16%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28일에 이어 29일에도 "물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나 경기가 대단히 걱정"이라면서 "한국은행은 저금리 금융완화정책을 당연히 쓸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ABC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날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조찬간담회에서 '경제환경변화와 한국경제의 내일'이라는 강연 자리에서 나온 말이다.
이날 박총재는 향후 우리나라 경제에 대해 대단히 어두운 전망을 했다.
박총재는 "지난해 3.4분기부터 지정학적 요인으로 인한 새로운 위기징후가 발생, 올 들어서는 그늘이 짙어지고 있다. 세계경제의 악화에 더해, 개혁후퇴와 집단 이기주의 등 우리 내부의 위기가 겹치면서 경제 펀더멘털도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당분간 소비에 기대를 걸 수 없으며, 하반기까지 내다볼 때 수출도 우리 성장을 크게 끌어갈 힘이 없다. 올해 4% 성장을 달성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고 말했다.
박총재는 이어 "한국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비투자다. 현재 설비투자에 대한 필요성이 최고조에 달했다. 다만 경제 불확실성때문에 설비투자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 불확실성이 제거되면 하반기 중 설비투자는 살아날 것으로 본다. 설비투자가 살아나지 못하면 올해 저성장은 불가피하다"며 "정부와 한국은행이 함께 나가서 경기를 부양하고 부동산 자금을 1차적으로 증시로 돌린 뒤 설비투자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총재는 "그런 노력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할 것"이라고 추가 금리인하를 예고하는듯한 발언까지 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금리는 우리나라만 독자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우리가 4%인 데 반해, 일본은 제로(0), 미국은 1.25%, 유럽은 2.5% 등 금리 역시 세계 평준화 현상이 진행되면서 경쟁하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박승총재의 두가지 오류**
박총재의 이날 강연은 두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하나는 중앙은행총재답지 않은 '과잉적 경기 언급'이다. 박총재는 향후 경기에 대해 대단히 암울한 전망을 했다. 맞는 얘기다. 지금 경기는 꽁꽁 얼어붙고 있다. 아니 지난해 후반부부터 그러했다. 특히 실물경제는 추락하는 와중에 아파트투기가 기승을 부려 위기감을 한층 심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던 박승 총재가 지난 13일의 금리인하에 대한 비판여론이 들끓자 뒤늦게 '경제 위기론'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중앙은행총재는 경기에 대한 전망과 우려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승총재가 불과 1년전 "앞으로 주가가 1천5백까지 오를 것"이라고 핑크빛 전망을 했었다는 대목을 상기하면, 박총재의 '경제 위기론'은 중앙은행총재답지 못한 과잉발언이다. 특히 박승총재의 '경제 위기론'을 시장에서는 한은의 추가 금리인하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발언은 대단히 적절치 못한 것이라 하겠다.
다른 하나는 일본, 미국, 유럽 등의 금리수준과 우리나라 금리수준을 '수평 비교'하면서 금리인하의 불가피성 및 추가인하 가능성을 시사한 대목이다.
박승총재의 이같은 주장은 금리와 경제성장율 및 물가상승율간 기본공식, 즉 박총재의 표현을 빌면 ABC조차 도외시한 발언이라 하겠다.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일본이나 우리나라보다 저성장을 하고 있는 미국,유럽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성장을 해온 우리나라 금리를 동일시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들 비교국가들에 비해 물가인상률이 월등히 높다.
물가상승률에 비해 금리가 낮은 '마이너스 실질금리' 시대가 도래하면서, 4백조원에 가까운 단기성자금들이 은행에서 뛰쳐나와 아파트 시장등을 돌아다니며 경제를 파국적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상황을 도외시한 채, 박총재는 연일 궤변으로 자신을 변호하기에 급급한 셈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박승 총재의 이날 연설에 대해 "한 나라의 거시경제정책을 책임지는 기관의 수장이 금리의 향방까지 언급하는 식의 발언을 하다가 나중에 중앙은행이 부동산 투기의 원흉으로 모든 죄를 뒤집어 쓰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면서 "본인은 떠나면 그만일지 모르나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스스로 부인하고 경기부양의 총대를 맨 것처럼 나서다가 향후 10년간 중앙은행이 설 땅이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탄식했다. 그는 "한은총재의 입은 천금처럼 무거워야 권위가 생기는 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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