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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공을 뒤덮기 시작한 공황 먹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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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공을 뒤덮기 시작한 공황 먹구름

<손광식의 '1997 비망록'> (29) ‘기아 쇼크’

***29. '기아 쇼크'**

7월10일 국가안전 기획부 회의실. 전 북한 노동당 비서 황장엽과 전 여광무역연합총회사 총사장 김덕흥의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날 황장엽이 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밝힌 내용은 이러했다.

"북한의 김정일체제의 출로는 없으며 있다면 오직 전쟁뿐이다. 꼭 한 번 반드시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은 북한의 확고부동한 방침이며 기본적으로는 전면전이 될 것이다. 북한은 북한 특수부대원들에게 한국군 군복을 입혀 북측지역에 침투한 것으로 위장한 뒤 한국군이 먼저 도발했다면서 서울에 5, 6분간 포를 쏘아 잿가루로 만든다는 전략을 세워 놓고 있다.

북한의 이같은 전략은 장기전이 되면 남한의 경제력과 우방 때문에 불리해지지만 속전속결로는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전쟁을 6개월이상 끌지 않는다는 전략 아래 전쟁물자를 6개월분만 비축하고 있다. 김정일은 지난 92년 남침시나리오를 작성, 이를 본 군지휘관들이 당장 실천에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김일성이 인민생활부터 해결한 다음 해야 한다며 보류했다. 북한은 높은 수준의 화학무기와 생물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핵무기는 그 유무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갖고있다는 것이 북의 상식이다.

대남사업자들과의 토론에서 한국내에 상당한 숫자(의 고정간첩)가 들어가 있으며 작년 9월 동해안에 침투했던 잠수함이 침몰 적발된 것은 실수이며 그동안 제집 드나들 듯 했다고 들었다. 김일성의 3년상이 끝난 만큼 김정일은 연내에 총서기에 취임할 것으로 보이나 주석직 취임은 내년으로 연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모든 것이 움직이기 때문에 강경파와 온건파라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황장엽 리스트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황의 회견에 앞서 엄익준 안기부 3차장은 황을 조사한 결과 위장귀순의 혐의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히고 '황장엽 리스트'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차장은 황씨의 진술을 토대로 하여 국내외 인물들에 대해 관계당국이 갖고 있는 각종정보자료를 활용, 대공활동 연장선상에서 추적중에 있다고 밝혔다.

황의 회견으로 7월의 둘째 주말은 '적색 경보'로 뒤덮였다. 특히 신문과 방송은 지면과 시간을 할애하여 '북의 남침' 잠재성과 안보문제를 확대 증폭시켰다.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한보와 김현철은 또다시 '망각의 창고'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세 번째로 정재철 신한국당 전 정책의의장은 서울 구치소로부터 병원으로 신병을 옮겼다.

황장엽과 김덕흥의 회견은 그러나 곧 공안정국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북의 남침이라는 잠재적 위험이 국민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경제적으로 파탄에 빠진 북한의 능력과 4자회담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판별력으로 해서 정치화, 사회화하지는 못했다.

다시 언론 기류는 신한국당의 '대선경주'로 돌아갔다. 경선주자들의 지역별 합동연설회와 지지성향에 대한 대의원 반응이 씨리즈로 등장했다. 역시 이회창이 선두를 유지하고 있었고 합종연형의 움직임이 이리 저리 갈피를 못잡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박찬종 경선후보는 금권선거의 예로 이회창 진영이 2곳 이상의 지역구 위원장들에게 5천만원씩을 살포했다고 폭로, 새로운 이슈를 제기했다.

국민들은 대체적으로 무대를 지켜보는 '관극자'의 입장에 있었으며 우울한 일상 속에서나마 LA 다저스의 박찬호선수와 일본 주니치 드래곤스의 선동열선수가 쌓아가는 기록을 지켜보는 재미를 위안 삼고 있었다.

박찬종 경선후보의 '이회창후보측 금품살포' 폭로는 그렇지 않아도 한보와 정치계 뇌물스캔들이 여진을 남기고 있는 시기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여론의 '과녁'이 되었다. 이 폭로가 아직은 도입부였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에 따른 양론적 비판이 주류였지만 '금권정치'에 대한 응징이라는 각도에서 비판의 수위는 높아만 갔다. 모든 신문의 사설란은 일제히 이 문제에 대해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이 폭로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으나 이른바 금권정치, 정치와 금맥관계, 그리고 그 전개과정 내지는 결말을 상징하는 재판이 있었다. 7월14일 '정태수 리스트'에 올라 추가 기소된 문정수 부산시장등 정치인 8명에 대한 3차 공판이 서울지법 형사 합의30부 심리로 열렸다. 손지열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 문정수 피고측은 김종국 전 한보그룹 재정본부장이 주었다는 2억원이 든 사과상자는 받은 바 없다고 부인했다. 김상현 국민회의 의원도 5천만원은 정치자금으로 받은 것이지 어떤 대가를 주고 받은 것은 아니라고 완강히 부인했다.

이미 재판은 진실을 밝히는 재판이라기보다는 세력의 싸움처럼 되어버렸고 기소사유를 일체부정하고 나선 김현철의 재판과 마찬가지로 '장외'의 어떤 시나리오가 흐르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검찰은 검찰대로 비리사실을 고발하기 위해 노력했고 법정은 법정대로 증거위주의 진실규명에 노력했으나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중죄처벌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결말이 정해진 재판 코스 같았다.

그렇다면 박찬종의 폭로 사건 역시 같은 문법에 의한 결말일 수밖에 없다. 권력 재창출을 목표로하고 있는 신한국당의 공멸을 가져올지도 모르니 법정에까지 비화되지는 않을 것이고 예의 '정치적 해결'로 어물쩍 넘어갈 개연성이 높다고 보는 식자층이 많았다.

그런데 이전투구를 벌리고 있는 정치판이 문제가 아니었다. 한보사태를 능가할만한 충격파를 깔고 있는 또 하나의 경제사건이 폭발한 것이다.

7월14일 전 금융기관은 중역실 문을 걸어 잠그고 긴급회의를 열었다. 자금핀치에 몰려왔던 기아그룹의 부도사태가 드디어 목전에 다다른 것이다. 재계 랭킹 8위, 금융권 총부채액 9조4천3백60억원, 계열사 38개, 협력업체 5천여개의 기아그룹 부도는 경제적 측면만 놓고 볼 때는 한보의 유가 아니었다. 급기야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은 7월15일 기아자동차 아시아자동차공업 기아특수강 등 18개 계열기업을 부도방지협약대상기업으로 선정했다. 권우하 제일은행상무는 "기아그룹을 살리기 위해 5월중순부터 약 8백억원을 지원하는 등 노력했으나 제2금융권의 대출금 회수 및 회전 기피 등으로 자금지원이 한계에 다달았다"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기아그룹의 부도위기는 기아특수강등에 대한 무리한 투자, 삼성그룹의 집요한 공세, 강성노조의 장기파업 등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제2금융권의 여신회수 때문이었다. 한보사태로 돈을 크게 물린 제2금융권은 '블랙 리스트'를 만들어 잠재적 경영위기가 있는 그룹에 대한 자금회수에 드라이브를 걸어왔었다. 기아 그룹이 여기에 걸려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삼미,진로, 미도파 등이 자금핀치에 몰린 것도 한보파동이 빚어낸 '도미노 효과'라 할 수 있다. 경제가 안풀리고 기업경영이 부실하며 거기다가 악성 소문이 겹쳐들면 결국 동티가 나고 사실보다도 더 심각한 경영핀치에 몰려 도산의 비극까지 감수하게 된다. 좀더 깊고 넓게 본다면 '부채=성장'이라는 40년 가까운 재벌전략이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었다.

기아의 부도유예 조치에 대해 언론이 붙인 명칭은 '쇼크'였다. 이미 예고된 측면이 강했던 사건인지라 과연 쇼크 정도일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보사태가 몰아온 정치 사회적인 파동 못지않은 경제적 파동이 잠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또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우선 하반기를 기점으로 불황의 골짜기를 벗어나는 듯 했던 경제가 다시 회복기류를 거꾸로 타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기아그룹의 부도유예 조치로 0.1~0.2%포인트 경제성장률이 하락할 것으로 재정경제원과 KDI(한국개발연구원)는 추산했다. 경제연구소들은 경제전망 에측 수정작업에 들어갔다. 비관적인 예측들은 재벌기업의 부도가 추가될 경우 아마도 성장률은 1.0%포인트까지 줄어들 수도 있다고 했다. 국제시장에서는 한국에 대한 신용평가를 다시 작성하기 시작했으며 국제금융시장은 한국에 꾸어주는 돈 이자를 높이기 시작했다.

"한국계 은행들은 현재 자금조달시 1개월이나 3개월짜리는 거의 빌릴 수 없고 하루짜리 단기자금도 기준금리인 리보(런던은행간 금리)에 0.5%포인트의 프리미엄을 덧붙여주고 조달하는 상황이다. 반년전만 해도 6개월짜리 자금의 프리미엄이 0.25~0.3%포인트 정도였다.

특히 기아의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의 경우 0.8%포인트의 프리미엄으로도 자금조달이 안돼 때로는 1%포인트를 넘기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제일은행은 이에 따라 해외자산의 운용규모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일본에서도 한국경제 전체에 대한 신용이 떨어져 도쿄에 진출한 각 은행지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보와 기아는 정치 사회적으로는 연관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는 '한국주식회사'의 위기라는 연결자료가 되고 있었다. 여기다가 기아의 경우는 국제 경제협력이라는 외교적 문제까지 걸려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터키 상무장관을 한국에 보내 기아사태를 종합 점검키로 했다고 한국정부에 통고했다. 기아는 인도네시아와 티모르(인도네시아 국민차) 프로젝트를 추진중이었다.

이미 예견된 것이긴 했지만 '부실'을 떠안고 온 은행들은 엄청난 적자경영을 노출시켰고 특히 한보에 이어 기아에 까지 물려들어간 제일은행은 97년 상반기에 무려 3천5백65억원의 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었다. 은행 하나쯤 도산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라는 말이 공공연히 유포되었다.

경제의 해법은 60년대, 아니 가까이는 80년대와도 또 다른 시대가 되었다. 의욕과 의지의 기법이 통하지가 않는다. 고도의 과학적 기법만이 통할 뿐이다. 바로 시장과 경쟁의 법칙이다. 이른바 대기업부도로 빚어지고 있는 한국경제의 위기현상도 그것을 어떻게 파악하는냐에 따라 해법도 달라질 수가 있다. '기아쇼크'에 대해 주요언론의 사설은 매우 시사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다음은 동아일보 사설.

"기아의 좌초는 정책의 실패 탓도 크다. 정부는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이번 사태를 업계의 구조조정 차원에서 불가피한 과정으로 보고 방치해 왔다. 그 결과 회복세를 보이던 경제에 찬 물을 끼얹고 수많은 하청업체와 금융시장을 위기로 몰아넣는 상황을 맞기에 이르렀다. 정부와 금융권은 제3자 인수 등의 안이한 발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해서는 안된다. 지난 80년 크라이슬러 자동차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 미국정부가 15억달러의 지급보증을 서 회생시켰던 것은 타산지석이 됨직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기아 스스로 뼈를 깎는 자구노력이 있어야 한다."

다음은 같은 날짜 중앙일보 사설.

"최근 빈발하고 있는 대기업그룹 부도, 도산이란 재앙은 그 원인이 기업에도 있지만 원죄는 누누히 말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부규제에 있다. '주인 없는 은행'은 정부와 산업정책과 금융간섭 아래서 '대출심사'없는 대출을 금융관행으로 삼아왔다. '존재하지 않는 중앙은행'은 오직 빈 말로만 은행의 건전성을 되뇌어 왔다. 오래되고 복잡한 화근이란 바로 이것이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첫 거름은 은행이 부도유예의 발표를 하기 전에 주식시장에서 기업매수 및 합병(M& A)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 경영실적이 나쁜 회사의 주가가 내려가면 새 주인이 그것을 매수해 살리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 이것이 증권시장을 살리는 길이다. 뿐만 아니라 은행, 근로자, 하청기업, 일반투자자를 갑작스런 부도. 파산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자동차업계에 뛰어든 삼성그룹과 중앙일보라는 연관관계를 지워버리고 본다면 시장법칙을 주장하는 쪽이 옳았다. 그러나 비단 경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의 제반 난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국적 대의명분'이나 이른바 '정서'가 지배해 왔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물리적 긴장과 정신적 시너지효과에 의해서 해결의 문법을 찾을 수 없는 때가 된 것이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놓고 간과하기 쉬운 점도 여기에 있었다. 모두가 정신차리고 합심하면 난관을 극복한다는 것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위기라는 배수진을 물리적 힘으로 바꾸는 화학적 기류가 생겨야 하고 새로운 시스템과 과학적 사고에 의한 해법이 있어야 했다. 60년대 70년대는 그것을 막강한 대통령의 권한을 통해 긴장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국민정서를 에너지로 바꾸기도 했었다.

그러나 바깥 세상도 안세상도 지금은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와 있었다. 이른바 '박정희 신드럼'의 그림자는 오늘의 경제문제를 그의 시대로 치환해 놓고 보려는 비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하고 있다. 쓰러지는 기업을 국민과 종업원의 힘으로 다시 살리자는 주장은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이 통할 수 있었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줄줄이 기다리는 수많은 잠재적 위기의 대기업들을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가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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