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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의 'YS 밟고 일어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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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의 'YS 밟고 일어서기'

<손광식의 '1997 비망록'> (19) YS, 대선정국 볼모되고

***19. YS, 대선정국 볼모되고**

5월이 왔다. 잔인했던 4월이 가고 화사한 계절의 여왕이 눈부신 햇살과 꽃바람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5월은 지난 시간보다 더 잔인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청문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지만 클라이막스를 향해 질주하는 '현철 게이트'는 그의 부정비리를 속속 드러냈으며 이제 진짜 한보의 '몸통'이 누구인가 그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대선자금 게이트'가 확대일로로 들어갔다.

언론은 검찰정보를 통해 김현철이 5-6개 기업으로부터 20여억원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고 보도했다. 검찰은 김현철이 92년 대선자금 중 남은 일부와 친분이 있는 중견 기업인들에게서 받은 돈 가운데 최소한 수십억원 이상을 자신의 측근 명의로 은닉한 사실을 포착했다. 김현철 비리와 연관관계를 갖는 대선자금 문제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의 발언으로 여권 안에서조차 심각한 갈등기류를 깔아 놓았다.

5월 1일 중앙일보와 문화방송이 공동주최한 토론회에서 이회창대표는 92년 대선자금에 대해 "현재 이 문제가 거론된 이상, 국민의 의혹을 풀 수 있도록 규명되고 처리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의 소신을 밝혔다. 그러나 청와대쪽과 당의 핵심부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고 반발했다. 물론 12월 대선의 강력한 후보로 입지를 굳히고 있는 이회창대표로서는 정략적 의미를 자신의 발언에 실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이기는 하지만 YS가 전임자인 노태우를 밟고 정권을 장악한 그 방법을 통해 이회창도 자신을 당 대표로 밀어준 YS를 밟고 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에 대해 야당측은 '물타기 공세'라고 이대표의 발언을 일축했다.

그러나 야당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어차피 시대의 흐름은 열린 세상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열어가는 세상의 이니셔티브를 누가 쥐느냐가 헤게머니 장악의 에너지로 변한다는 사실이었다. '감추면서 풀어가기'가 냉전시대 독재권력시대의 문법이었다면, 지금은 '까면서 풀어가기'의 열린 시대인 것이다.

야당은 의혹을 밝히라는 공격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지만, 그것을 야당이 아닌 여당이 이니셔티브를 잡고 밝힐 경우 기묘하게도 그것은 여당의 힘이 된다는 지배권력쪽의 산술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이를테면 6.29가 그렇고 YS의 노태우대통령에 대한 '쿠데타'가 그러했다. 이제 이회창은 스스로 만들어 낸 공식은 아니겠지만 'YS를 밟고 일어서기'로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을 택하기에 이르렀다.

예의 신한국당 김명윤씨 집에서 한보 정태수로부터 YS가 받았다는 '6백억원'과 YS가 92대선 당시 당에 내 놓았다는 6백억원은 동일한 자금이라는 설이 점점 증폭되어갔다. 이제 공격의 타기트는 김현철로부터 직접 YS를 겨냥하는 기류로 바뀌고 있었다.

여야의 대선전략으로 정치자금문제가 열기를 뿜어대기 시작한 것과 반비례하여 국회의 한보청문회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클라이막스를 연출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당초 5월 2일 정태수의 재소환을 결정한 바 있었으나 그의 입원으로 흐지부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한보에 걸려있던 모든 의혹과 진실을 밝혀내겠다던 이 특별위원회는 결국 변죽만 울리고 끝남으로써 청문회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회의감만 높여 놓았다. 서구적 민주제도로서의 기능보다는 동양적 '푸닥거리'수준으로 머물고 말았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어떤 증인도 청문회에서의 증언행위는 '정치적'인 것으로 인식했다는 데 그 원인이 있었다. 국민과 돌아가신 부모와 자식과 하느님을 걸고서도 증인들이 거짓말을 한 것은 '정치적 행위'에는 면죄부가 적용된다는 사회통념 때문이다. 거짓말을 하고서는 살 수 있어도 진실을 말했다가는 다시 권력의 울타리에서 혹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무리사회'에서 버림받는다는 불문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바로 조직과 지배계급에 대한 '배신행위'라는 인식이 강한 것이다. 박석태의 자살비극이 바로 이것을 말해 주는 본질이었다.

주요 언론들은 청문회를 마감하면서 사설을 통해 예의 '반성문'을 썼다.

"...어쨌거나 청문회가 끝난 지금 최우선 과제는 특위가 파헤치지 못한 각종 비리 의혹을 검찰이 맡아 규명하는 일일 것이다. 동시에 정치권으로서는 무용론까지 나온 국회청문회제도를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 과거 5공청문회 때는 그냥 흐지부지 지나갔으나 이번만은 잘못된 점을 분명히 고쳐놓고 넘어가야 한다.

무엇보다 위증이나 증언거부가 있어도 여기에 대응할 마땅한 수단이 없는 허점부터 고쳐야 한다. 그러자면 처벌법을 강화하고 특위위원들이 실질적인 조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국회에 일정한 수사권 및 정보접근권을 부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여야는 현재 위증 고발대상자 선정문제로 논란을 벌이고 있으나 앞으로는 구태여 그런 논란 없이도 해당자에게는 자동적으로 법적용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 필요할 경우 증언에 대한 형사면책권을 부여하는 문제와 특위의 인력 장비 확충방안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박석태 전 제일은행상무의 자살사건을 교훈삼아 증인에 대한 인권보호 장치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정치권은 실체적 진실규명보다 또한번 정치적 공방과 말잔치로 끝난 이번 청문회를 부끄러워 해야 한다."

그러나 위증죄의 고발은 불과 며칠간의 검토시간도 없이 여당에 의해 부결되었고, 야당은 일부 위증을 한 야당의원도 고발하자는 공평무사의 자세를 보이지 못했다. 언론도 그저 이 사실을 1단 정도로 취급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검찰권으로 대표되는 행정부와 특위청문회로 상징되는 입법부의 독립 분권은 '그렇고 그런게 아니냐'는 한국 정치풍습에 밀려 매몰된 것이라 볼 수 있었다.

1백일이나 넘게, 그것도 국가중대 사안으로 살상없는 '대란'으로 표현되는 국사가 입법부에 의해 자기권위도 확보 못한 채 끝난 청문회야말로 청문회감이었다. 정치권력의 3권분립이 행정권력 우위의 기형적 민주주의로 인식되고 용인되니 그 행정권력을 잡는 행사인 '대선의 흐름'이 한보사태보다 이니셔티브를 잡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월 초순은 캘린더에 의해서도 한보사태에 역작용이 일어났다. 1일날은 근로자의 날, 4일과 5일은 일요일에다 어린이날로 징검다리 휴일이 연속되었다. 고속도로는 상춘객들의 휴일 나들이행 자가용행렬로 미어졌고 검찰의 수사도 늘어진 감을 주었다. 이른바 권력의 가문들은 이 시간적 요소를 감안하면서 일의 진행을 지켜보고 있는 듯 했다. 혹시 또다른 사태가 일어나 자기전개를 해 가게 되면 정치적 이해득실이 갈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계산을 하면서.

그러나 한보는 한보였다. 한보보다 더 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선주자들은 중앙일보와 MBC가 5월1일부터 공동주최한 '정치인과 시민 대토론회에'에 불려나가 '인격․능력 청문회'의 테스트를 받기에 신경들을 쏟았다. 한편 영국의 총선에서는 18년만에 노동당이 압승, 40대의 블레어당수가 다우닝가 10번지의 새 주인이 되었다. JP는 소리높여 내각제를 계속 강조했고 40대의 이인제 경기도 지사는 후보그룹의 후미에서 얼굴을 반짝 내밀기 시작했다.

징검다리 연휴가 끝나자 김현철 게이트는 장본인의 검찰출두를 앞두고 언론이 파상적인 탐색보도를 경쟁적으로 띄움으로서 다시 불길을 일으켰다. 김기섭 전 안기부운영차장, 이성호 전 대호건설사장과 평소 친분이 있는 2세 기업인들이 현철씨의 비자금을 관리해 왔으며 그 돈은 2~3개 중견 재벌기업의 주식을 취득하는 방법으로 운영되어 왔다고 보도했다. 검찰은 김기섭이 한솔그룹에 맡긴 70억원의 돈은 92년 대선자금중 쓰고 남은 돈이라는 사실을 일부 확인했다.

청문회 증언 직후 김현철과 김기섭이 극비리에 정부고위 인사와 회동 '대책'을 협의, 검찰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현철씨의 청문회 출두 사흘뒤인 4월28일 저녁 워커힐 호텔 안에 있는 사파이어 빌라 2618호실에서 3시간 동안 만났다. 이 특종을 보도한 신문은 한 검찰간부의 말을 인용, 이들은 검찰에 출두해 어느 정도까지 범죄사실을 시인할 것인가와 관련자 잠적 증거인멸 방법 등에 대해 입을 맞추고 수사방향 등 전반적인 대책을 협의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탐색했다.

문제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대호건설의 이성호씨가 자진귀국 움직임을 보이다가 돌연 귀국을 유보하고 있는 것도 이날 김현철과 만난 고위 인사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검찰관계자는 말했다. 나중 그 고위인사는 권영해 안기부장으로 밝혀졌다. 또 다른 신문은 YS와 한보의 컨넥션을 밝혀낼 중요한 단서가 될 92년 대선자금에 대한 검찰정보를 추적 보도했다.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이 지난 92년 12월 실시된 대통령선거 직전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통령후보측에 거액의 대선자금을 제공했다고 진술한 사실이 있다고 검찰 고위 관계자가 밝혔다. 정총회장이 대선과 관련해 김후보측에 전달한 자금 규모는 "그동안 야권이 주장해 온 6백억원보다는 많지만 1천억원에는 못 미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1천억원에는 못 미치는 규모' 속에 당선축하금까지 포함돼 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정총회장이 김후보에게 직접 돈을 전달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돈인데 후보가 몰랐을 리 없다"는 말로 직답을 피했다. 검찰은 한보비리 1차 수사 당시 이형구 전 산업은행 총재를 상대로 정총회장에게서 돈을 받은 사실이 있는지를 추궁했으나 이 전 총재는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이에 따라 정총회장을 직접 조사한 결과 "당시는 이 전총재에게 돈을 줄 상황이 아니었다"며 김후보측에 거액의 대선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털어 놓았다.

검찰은 정총회장이 대선자금을 제공한 사실과 정치자금 및 선거자금을 정치인들에게 제공한 사실을 진술함에 따라 정총회장에게 아들 보근씨를 구속하지 않고 재산도 압류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차 수사결과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자 재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이같은 약속을 무시한채 보근씨를 구속하고 정총회장의 재산압류조치를 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4월7일 서울구치소에서 열린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총회장은 "대선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정총회장은 지난 87년 대선 당시 민정당 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4백억원 이상을 대선자금으로 주었다고 검찰과 한보 관계자들은 밝혔다. 한편 검찰 관계자는 정총회장이 92년 대선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했는지는 파악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김총재는 정총회장이 대선 당시 30억원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지만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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