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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막으려 검은돈에 면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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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 막으려 검은돈에 면죄부"?

<손광식의 '1997 비망록'> (6) 강경식과 渡江稅

***6. 강경식과 도강세(渡江稅)**

고건-강경식으로 이어지는 새 각료진이 진용을 갖추자 경제 이슈는 두 가지 현실적 과제를 등장시켰다. 그 하나는 그 동안 소강상태로 들어갔던 노동법 개정이고 다른 하나는 실명제였다.

노동법은 예의 날치기사건 이후 한보사태, 황장엽 망명의 와중에서 일단 뒷전으로 물러난 상태였다가 YS의 여야의 재협상 지시가 나오자 국회쪽으로 공이 넘어가 있었다. 날치기 통과 때 개정된 내용에 대폭적인 수정이 이루어졌다.

우선 복수노조 허용은 상급단체의 경우 즉시 허용하는 것으로 바꾸고 단위노조는 허용을 원칙으로 하되 수년간 유보키로 조율되었다. 무노동 무임금은 그것을 원칙으로 하되 각 단위 노사 자율에 맡기고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지급은 노조 해결을 원칙으로 하되 역시 수년간 유보하는 절충에 들어갔다. 한편 정리해고제는 유예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미 정치세력 쪽에서는 대선을 계산에 넣기 시작한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변해가자 경제 5단체는 일제히 반기를 들고 나왔다. 도하의 각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5단 통광고가 일제히 게재되었다.

"국민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임금을 주시겠습니까? 파업은 근로자 스스로가 노동의 제공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는 근로자가 노동계약의 기본원칙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임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근로자들이 집단으로 떼를 쓰고 요구하면 파업기간중의 임금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파업을 일삼아 왔습니다. 파업이 끝나고 나면 파업기간중의 임금을 요구하고, 사용자가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또 다른 파업을 일으키는 악습이 이 땅에서는 거의 관행화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일부 정치인들은 파업기간중의 임금지급을 노사 자율로 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힘을 앞세운 노조의 요구에 기업인이 계속해서 굴복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전임자 수가 조합원 2백30명당 1명이지만 일본은 5백~6백명당 1명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노조전임자 수가 많습니다.

노·사·정이 공동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전임자에게 임금을 주자고 주장하는 일부 정치인들도 있습니다. 노동조합과 아무 관계가 없는 국민들의 세금으로 그들을 지원해야 합니까? 사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심한 갈등을 겪으면서도 노동법을 올바르게 개정해야 하는 것은 어느 특정계층의 이익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세대와 다음 세대를 포함하는 한국인 전체의 번영을 위해서입니다. 노동법 개정은 이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기 위한 첫 걸음입니다."

노동법 개정은 따지고 보면 경제적 측면에서는 고임금-저효율이라는 현실적 압력과 세계화라는 큰 흐름에서 떠 오른 것이지만, 정치사회적 측면에서는 미묘한 헤게머니 다툼을 그 바탕에 깔고 있었다. 경영세력과 노동세력 간의 산업사회에서의 이니셔티브 장악이다. 신 질서의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경제위기가 깔려 있었다.

보다 단순화하여 말한다면 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경영권위의 장악이냐 아니면 노조를 중심으로한 노동권력의 장악이냐 하는 긴장구조이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말은 안하지만 경제위기의 유책론도 간접적으로 무게를 싣고 있었다. 쉽게 말해 경제위기를 자초한 것은 노조의 격렬한 운동 탓인가, 경영측의 무능 때문인가 하는 유책론을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외피적 흐름은 경제적이라기보다는 정치 사회적인 접근이었다. 이 문제는 불가분 '시국'이라는 흐름을 타게 되어 있고 그것을 입법화하는 국회의 정당세력은 원칙보다는 대선을 앞둔 권력쟁투에서 어느 쪽이 보다 많은 표를 획득할 수 있느냐는 정치산술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노조는 법개정을 새로운 사회권력 형성의 모멘트로 삼고 있었다.

한편 '도강세(渡江稅)'라는 표찰을 붙이고 나온 실명제 보완은 재무장관 시절 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가 정치적 좌절을 맛보았던 강경식이 경제총수로 등장하여 던진 카드였기 때문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편집자주: '도강세'는 실제 세금의 명칭은 아니다. 과징금 성격의 일정한 부담을 물면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물리는 세금을 말한다. 마치 배삯을 물면 강을 건네주는 것과 같아 도강세라고 부른다. 강경식은 97년 지하자금을 양성화하기 위해 과거에 탈세 등 부정하게 조성한 자금이더라도 10∼20%의 세금(부담금)을 물면 자금출처를 조사하지 않는 방안을 추진했었다.)

실명제의 보완과 한보사태는 어떤 연관관계를 지니는 것일까. 경제위기론이 보편화된 이후 그 대응책으로 집중조명을 받게된 이 제도의 새로운 보완은 경제에 어떤 활력을 준다는 말인가. 물론 강경식 팀의 등장이라는 정치적 변수 때문에 언론과 재계의 주목을 받게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연관성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기에는 곤혹감을 느끼는 게 일반 국민들이었다.

경제에 '물꼬'를 터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도강세' 해법은 곧바로 반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제도가 겨냥하고 있는 비실명화 예금은 총예금의 2%수준에 불과하고 종합과세 기준으로 보더라도 그 대상이 4만 내지 5만명 정도라면 실명제 본질을 훼손하면서까지 제도 보완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사회여론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강경식의 대증요법은 경제와 사회의 충돌현상을 불가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는 흐름으로 가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한보위기로 발생한 집권세력의 궁지를 한보보다는 한 차원 높은 경제위기로 초점을 이동시켜 모면하려는 계산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했다.

한편 한보사태를 보는 경제적 인식은 바로 '자금난'이며 이 자금난의 원인은 엄청난 지하자금이 진짜로 땅 속에 뭍혀있고, 그러니 광명천지로 그 자금을 끌어내고 그것을 다시 산업자금으로 연결하지 않는 한 경제는 활성화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 비쳐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위기, 즉 한보사태 이후 내놓은 경제작품이 실명제보완일 수는 없을 것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실명제 이후 퇴장된 자금이나 비실명화 자금을 포함하여 '땅 속의 돈' 규모는 20조~30조원이라는 설이 널리 유포되기도 했다. 한 신문 칼럼니스트는 "얼마 전 재벌의 친척에게 집을 팔았던 친지가 중도금으로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전인 93년도의 돈 띠지가 선명한 현금 5천만원 다발을 받고 놀랐던 경험을 얘기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사회정의라는 문제와 경제효율의 문제이다. '땅 속의 돈'은 경제적으로는 사장된 자금으로 보고 있는 한편, 사회적으로는 '검은 돈'으로 보고 있다. 아직도 엄청난 규모의 '땅 속의 돈'이 있는 이상 자금의 유통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그것은 총체적으로 만성적 자금난을 결과할 수 밖에 없으니 이것을 산업자금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 실명제 보완을 주장하는 쪽의 논리였다. 검은 돈이든 흰 돈이든 돈으로서 기능을 살려 주되 세제상의 페날티만 주면 된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보완은 실명제의 정신을 훼손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쪽은 이미 이 제도가 정착된 바 있고 4만 내지 5만명 정도에 불과한 소수의 자금 은닉자를 위해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정의상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공격했다. 6.25전쟁 이후 한때 유행했던 나애심의 힛트곡 '과거를 묻지 마세요'가 자본주의와 도덕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재등장해 참으로 미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
과연 도덕적 경제란 가능한 것인가, 불가능한 것인가. 논리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경제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연간 금융소득 4천만원 이상에 대해서는 종합과세를 실시하도록 되어 있는 현행의 세법은 얼핏 금액으로 '검은 돈'과 '흰 돈'의 경계선을 그어 놓은 듯 보이지만 한 가계가 5억원 정도의 금융저축을 가질 정도면 그 저축금액은 뇌물이나 기타 부정한 방법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아파트투기나 땅투기의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도덕적인 면에서 완전히 면탈된 '흰 돈'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물론 최근에는 명퇴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퇴직금만 해도 그 수준에 달한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으나 '성실한 근로자'가 저축하고 불린 돈으로 그만한 목돈을 만들 수 없는 것이 우리 경제 구조의 산술이다. 공직자 재산등록 때 개인재산에 대해 쏟아져 나왔던 비판과 공격을 전 사회적으로 이미 체험한 바 있었다. 경제 활성론자들은 따라서 지금 중요한 것은 가진자의 도덕성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참여의식을 높여주고 재산보호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결국 그런 식의 논리는 국민정신을 총체적으로 타락시키고 왜곡된 경제구조와 관료를 포함, 공직부패를 조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이런 시대 풍조는 결국 '경제력 복원'을 위해 필요로 하고 있는 국민적 에너지의 재창출에 어떤 변화나 동기도 부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각도에서 김영삼정부가 부정부패라는 개혁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것이 결국은 외채누증·국제수지·적자 확대·사치성 소비풍조의 만연 현상을 결과했다고 보고도 있었다. 거기에는 시대 흐름과 요구가 밑바탕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략으로 개혁을 이용함으로써 결국은 정치적 실패와 더불어 경제적 실패까지도 자초했다는 분석과 비판이 깔려있었다. 경제원리와 사회정의를 주장하는 양측의 갈등은 아마도 실명제 보완 문제가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각기 다양한 양태로 전개될 가능성을 높였다.

종로 2가 제일은행 본점 4층 회의실. 언론의 사정권으로부터 후퇴해 있는 한보사태를 리바이벌시키는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은행장 신광식이 구속된 이 은행의 행장 권한대행인 이세진 전무가 주총 사회봉을 잡고 있었다.

"감사보고에 따르면 은행은 지난 1월18일 한보철강의 잔고가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5일 동안 금융결제원에 보고도 하지 아니하고 1월 23일에야 최종 부도처리를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민단체인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의 장하성 교수(고대 경영학과) 등 12명의 시민 주주대표들은 한보문제와 은행인사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은행 임원은 주주총회가 임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내려 온 안대로 통과키는 관치적 관행에 젖어 있는 한 언제 은행이 독립을 하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이른바 '총회꾼들'로부터 30년 전에도 비슷하게 나왔던 소리다. 물론 이날의 '총회꾼'은, 말썽을 피우고 한 건 얻어내는 60년대의 총회꾼과는 달랐다. 그러나 은행 집행부의 회의진행이나 은행의 자세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적당히 넘어가기였다. 개혁 차원에서 '금융 빅뱅'이 추진되고 한보사태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런 빅 이벤트를 시작으로 뭔가 달라지리라는 예후는 없었다.

3월의 첫번째 토요일인 7일 밤, 한보사태 이후 몇 차례의 이동을 보여왔던 관심사는 또 한차례의 '도강'에 성공했다. 여·야에 의해 노동법 재개정이 합의된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서서히 행보를 내딛고 있는 정치기류가 빚어낸 시간적 압박과 춘계정국에 불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각 정당의 이해가 합치되어 '원칙' '보류'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신노동법안을 만들어 냈다.

그 내용은 복수노조를 허용한다, 무노동엔 무임금이 원칙이다, 노조 전임자의 임금지급은 노조가 해결하되 5년동안 이 원칙을 유예한다, 정리해고제는 도입을 원칙으로 하되 2년간 유예한다는 것 등이었다. 언론은 즉각 미흡하지만 '합심협력'해서 노사가 '잘들 해 보자'는 반응을 보여주었지만 사회적 반응은 역시 법 내용처럼 유보적이었다. 법이 지닌 근로대중의 민감한 이해관계나 경쟁력 강화라는 현실적 과제라는 면에 비추어 잘 된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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