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활짝, 4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제81강으로, 4월 6(토)-7(일)일, 1박2일 동안 달마고도도 걷고 임하도 상괭이도 만나러 갑니다. 달마산 자락 중에서도 가장 가파른 바위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곳이 도솔봉인데 이 도솔봉 절벽 끝에 우뚝 선 천상의 암자 하나가 있습니다. 도솔암입니다. 이번 섬학교에서는 이 도솔봉에도 오릅니다. 아울러 명승으로 지정된 완도 정도리의 구계등 해변과 마을숲도 거닐다 옵니다. 상춘의 남도기행에 함께 하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해남 달마고도·임하도·도솔암·구계등>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미황사, 12암자를 거느렸던 대찰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 어느 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배 안에서 범패 소리가 들려 어부가 살피러 다가갔지만 배는 자꾸만 멀어져갈 뿐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조(義照)화상이 정갈하게 목욕재계 하고 동네 사람 100여 명을 이끌고 포구로 나갔다. 그러자 배가 바닷가에 다다라 정박했다. 배에서는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 안에는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 16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불상과 경전을 모실 곳에 대해 의논하는데 갑자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검은 소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검은 소는 순식간에 큰 소로 변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이르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1만 불이 나타나니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에 경전과 물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 하는 것이었다.
의조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번 땅바닥에 누웠다 일어났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이내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다. 의조화상은 처음 소가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를 창건하였다. 미황사의 ‘미(美)’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 따온 것이고 ‘황(黃)’은 금인의 황홀한 색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미황사 부도전 부근에 세워진 사적비의 창건설화다. 숙종 18년(1692)년, 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었다. 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흡사하다. 억불(抑佛)의 시대였던 조선 중기까지도 미황사의 사세는 컸다. 임진왜란 후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대둔사와 미황사로 내려오면서 미황사는 12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됐다. 하지만 150년 전 미황사 스님들 40여명이 배를 타고 섬 지방으로 시주를 받으러 나갔다가 풍랑에 뒤집혀 모두가 죽음을 당한 뒤 미황사는 쇠락했다. 당시에는 중창 불사 등의 비용 마련을 위해 스님들이 군고(농악)패를 꾸려 마을들을 순회공연 하며 시주를 받는 풍습이 있었다. 시주를 받으러 섬으로 가던 미황사 스님들이 풍랑을 만나 모두 수장됐던 것이다. 미황사 아래 서정리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당시 설쇠(타악기)를 맡은 스님이 어여쁜 여인의 유혹을 받는 꿈을 꾸고는 오늘은 떠나지 말자 했으나 주지스님이 듣지 않고 섬으로 출항을 강행해 일어난 참사라 전한다. 그래서 지금도 서정리 사람들은 비바람이 치는 을씨년스런 날씨를 두고 “미황사 스님들 군고 친다”고 말한다.
그 후 오랫동안 침체해 있던 미황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는 1989년 미황사로 들어온 현공, 금강스님 등이다. 미황사를 다시 남도 대표사찰로 재건한 지금의 주지 금강스님이 근래에 다시 한번 중생들을 위해 크게 회향(回向)한 것이 달마고도 트레일 개통이다.
오늘은 달마고도를 걷는다. 미황사를 출발해 달마산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미황사로 돌아오는 달마고도는 금강스님의 뜻에 따라 중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 손으로만 만들어졌다. 길을 낼 당시 매일 40~50명의 인부들이 10개월 이상 달마산에 머물며 손으로 작업해 완성했다. 인공이면서도 전혀 인공의 티가 나지 않은 자연의 길. 17.5km의 이 둘레 길은 폭이 좁아 오가던 길손이 서로 간에 먼저 길을 비켜주는 겸손의 자세를 배우게 해준다. 달마고도는 길을 가는 내내 해남과 완도의 바다와 섬들을 보여주고 또 더 없이 고요한 숲 안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게 해준다.
높은 곳을 지향하지 않는 달마고도
달마산 둘레를 따라 가는 달마고도는 높은 곳을 지향하지 않는다. 굳이 정상으로 인도하지도, 최고의 절경인 도솔암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그저 산 둘레를 돌며 평탄하게 길과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그네는 잠시 그 평화로운 길을 빠져 나와 샛길로 들어선다. 삼나무숲 사이 가파르고 험한 도솔암 등산로를 오른다. 도솔암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이르는 달마산 자락 중에서도 가장 가파른 바위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도솔봉 절벽 끝에 서있다.
도솔암에 도달하면 도솔천에 이를 수 있을까? 미륵이 사는 하늘 세상. 욕계6천(欲界六天) 중 4천인 도솔천은 지족천(知足天), 묘족천(妙足天), ·희족천(喜足天), 희락천(喜樂天) 등으로도 불리는 하늘 세상이다. 도솔천에는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다. 도솔천 내원에는 장래 부처가 될 보살들이 산다. 석가도 현세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도솔천 내원에 머무르며 수행했다. 지금 내원에는 미륵보살이 살고 외원에는 천인들이 산다. 미륵보살은 내원에서 설법하며 하생(下生)하여 성불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미륵이 하생하면 인간세상은 그 자체로 이상세계가 된다. 미륵의 교화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성인이 되고 열반에 든다고 미륵 신앙에서는 믿어진다. 그래서 원효대사는 도솔천에서 왕생할 수 있는 수행방법을 제시했고 백제의 무왕은 미륵보살이 인간의 세상에 하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익산 미륵사를 세웠다. 달마산 도솔봉 꼭대기에 도솔암을 지은 신라 시대 의상대사의 마음도 그러했으리라.
도솔암은 어찌 저리 가파른 산정에 세워져 있을까? 본디 도솔천에 오르는 길이란 이토록 험난한 것인가? 고난의 가시밭길을 지나야 이를 수 있는 천국. 도솔암에 이르러 펼쳐지는 풍경은 천계의 모습이다. 하지만 눈앞의 환상적인 풍경은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달했으나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도솔암이 보여주려는 것은 결코 도솔천이 아니다. 도솔천 또한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이라는 깨우침이다. 어디에도 도솔천은 없다. 극락도, 지옥도 없다. 그저 지금 여기만 있을 뿐. 지금 여기에 도솔천도, 극락도, 지옥도 있다. 물론 있다는 것인가!
안섬, 바깥섬으로 이루어진 임하도
산정에서도 도솔천에 이를 수 없었던 나그네는 다시 달마고도를 돌아 미황사에 다다른다. 이제 또 어디로 갈 것인가? 드높은 도솔암에서 아련히 내려다보이던 해남의 섬으로 하강한다. 해남은 다도해 바다와 연해 있지만 섬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모두 60여 개의 섬이 있는데 유인도가 7개 나머지는 무인도다. 오늘은 임하도로 향한다. 임하도((臨下島)는 해남군 문내면의 섬이다. 0.353㎢의 면적에 93명의 주민들이 사는 작은 섬. 동서 두 개의 섬이 서로 연결돼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육지에 가까운 섬을 안섬, 먼 섬을 바깥섬이라고 한다. 지금은 두 섬 모두 육지와 연결되어 섬 아닌 섬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에 기대어 살아간다. 김, 미역과 전복양식 등이 생계를 이어준다. 주민들은 고추와 마늘 등의 농사도 겸한다. 섬은 느릿느릿 걸어도 한 시간 남짓이면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다.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면 서울을 비롯한 내륙지방 사람들은 전국이 다 추위에 얼어붙은 줄 안다. 하지만 남쪽지방은 사뭇 다르다. 남녘의 들판에는 노지배추와 무와 시금치와 마늘과 대파가 자란다. 그 여리디 여린 상추마저 노지에서 시들지 않고 자란다. 겨울 임하도의 밭에도 온갖 채소들이 푸릇푸릇하다. 바람만 거세지 않다면 어떤 날은 서울이 영하 10도일 때 남쪽의 섬들은 영상이다. 무려 10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에는 주저 없이 남방으로 떠나야 한다.
임하도에는 1770년경 하동정씨와 김해김씨가 배를 타고 지나가던 중 큰 파도를 피해 섬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임하도(臨下島)는 ‘이마도(二馬島)’ ‘임하도(林下島)’로도 불리는데, ‘이마도(二馬島)’란 이름은 섬의 형태가 두 개의 말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임하도(林下島)’는 민둥산이던 섬에 조림을 하여 숲이 울창해지자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지금 임하도를 뭍과 연결해 주는 것은 2009년에 놓인 다리지만 원래는 다리가 아니었다. 1986년 육지와 임하도 사이에 방조제가 놓였었다. 조류의 소통을 아주 끊어버리는 방조제로 섬과 육지를 연결했던 것이다. 방조제가 생기자 퇴적물이 증가하면서 갯벌 생태계가 파괴됐다. 더 이상 김양식도 갯벌 어업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갯벌 생태계 복원을 위해 방조제를 철거하고 조류 소통이 가능한 다리가 다시 놓였다.
다리가 놓이고 조류 소통이 가능해지자 점차 갯벌도 복원되고 바다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근자에 영광의 상하낙월도와 장흥의 장재도 등이 같은 상황을 거치면서 방조제를 다리로 바꾸었다. 무분별한 간척이나 제방공사가 갯벌을 죽였던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갯벌 살리기가 일어나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다. 임하도 갯벌도 그 갯벌 복원의 귀중한 사례 중 하나다.
임하도에서는 과거에는 김 양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1가구만 김 양식을 한다. 요즈음 임하도 또한 전복 양식이 대세다. 10여 가구가 전복 양식을 한다. 임하도 앞바다에는 전복 을 키우는 가두리 구조물이 떠 있고 육상의 수조에서는 전복 종묘인 치패가 자란다. 몇몇 가구에서는 작은 어선으로 물고기들을 잡는데 그중 숭어는 임하도의 명물로 소문나 있다. 임하도는 진도와 해남 사이 해협인 울돌목을 통과한 숭어가 남해로 이동하는 길목에 있어서 늦봄에 가면 배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보리숭어들을 아주 싼 값에 얻을 수 있다. 숭어는 워낙에 부르는 이름이 많지만 표준명은 두 개다. ‘숭어’와 ‘가숭어’. 숭어는 체형이 통통한 편이고 가숭어는 날씬한 편이다. 눈동자 주위를 노란 줄이 감싸고 있는 가숭어는 봄철에 알을 낳기 때문에 살이 오른 겨울에 맛있다. 통영지역에서는 이를 밀치라 부르는데 겨울 밀치의 맛은 감성돔 못지않다.
하지만 숭어는 겨울에 산란을 하는 까닭에 산란 직후에는 맛이 없고 다시 살이 찌기 시작하는 늦봄부터 맛이 좋다. 그 무렵이 보리가 노랗게 익어가는 철이라 이때 잡히는 숭어를 보리숭어라 부른다. 울돌목을 지나온 맛좋은 보리숭어가 임하도 바다 앞에서 많이 난다. 또 이 무렵에는 임하도에서 그 숭어떼를 쫓는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떼를 관찰할 수도 있다.
임하도의 또 하나 명물은 앞여 일몰이다. 임하도 앞바다의 무인도인 앞여 위로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사진작가들의 출사 명소다.
4월 섬학교 제81강 <상춘 남도기행-해남 달마고도·임하도·도솔암·구계등>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4월 6일(토)>
07:00 서울 출발(07시 1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1강 여는 모임
-점심식사
-미황사 탐방 및 달마고도 걷기(약 9km)
미황사-돌너덜지역-삼나무숲길-도솔암갈림길-도솔암주차장-도솔암-도솔암주차장-마봉리 주차장
-저녁식사 겸 뒤풀이(완도에서 생선회요리)
20:30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4월 7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완도에서 생선구이)
-완도 어시장 장보기
-구계등 산책
-임하도 걷기
-점심식사(임하도 식당)
14:00 서울 향발. 제81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버프(얼굴가리개),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4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4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0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70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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