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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매파의 최대 무기는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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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매파의 최대 무기는 부시"

<자료> LMD의 '중동의 평화는 어떻게 사라졌나'(60매)

"아리엘 샤론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조지 W.부시이다."

미국의 유력 인터넷언론인 살롱닷컴(salon.com)의 8일자 머릿기사 제목이다.
살롱닷컴은 사실상 전쟁상태에 돌입한 팔레스타인 사태를 다룬 이 기사에서 "샤론 이스라엘총리가 팔레스타인과 싸우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원군은 부시 미국대통령"이라며 "많은 전문가들은 최근 몇달 동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인티파타(항쟁)를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무력진압하도록 백악관이 전폭 지원하고 있는 사실에 경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무력일변도 진압은 "부시가 이스라엘의 행위를 '테러리즘에 대한 정당한 자위권'이라고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살롱닷컴은 분석했다.

지난해 2월 미국에서 매파정권인 부시 정부가 출범한 데 이어, 지난해 5월 이스라엘에서 매파인 샤론이 집권하게 된 것이 팔레스타인 비극의 근원이라는 분석이다.
미국과 이스라엘 매파간의 연합전선 구축이 한때 평화 정착을 기대케 했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끝없는 유혈 분쟁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평화 해결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지역 국가들과 유럽연합은 부시 미대통령에게 평화협상 재개를 위해 적극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샤론은 한마디로 콧방귀도 안 뀌고 있다. 부시도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나라는 최대 무기수출국, 다른 한나라는 최대 무기수입국의 대표라는 '전쟁상인의 이해관계'가 내재돼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같은 매파들이 득세하는 한, 팔레스타인의 평화 정착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분석이다.

팔레스타인 사태의 본질을 분석하는 좋은 글들이 많다.
그러나 지난해 9월 프랑스의 권위지인 '르몽드 디플로메틱'의 알렝 그레시 기자가 수년간에 중동평화 협상의 전개과정과 파탄을 지근거리에서 기록한 '중동에서 어떻게 평화가 사라졌나'라는 기사만큼 본질에 근접한 글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도 많은 평화주의자들이 있다. 이 글은 어떻게 평화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사라져갔으며, 그대신 매파들이 득세하면서 대화불능의 유혈사태로 발전하는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태는 부시의 '악의 축' 발언으로 먹구름이 드러워지기 시작한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왜 한반도에서 매파가 득세해서는 안되는지, 매파가 득세할 경우 어떤 사태가 발생할 것인지를 말이다.

다음은 알렝 그레시 기자가 쓴 글의 전문이다.

***비극의 시작**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의 핵심이다. 이 문제의 포괄적이며 정당한 해결이야 말로 지속적이고 도덕적으로도 완전무결한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난민이 겪고 있는 비극과, 고통과 상실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하며, 지난 35년 간 지속된 처참한 역사의 한 장을 종식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의 동반자 역할을 다 할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반신반의하며 팔레스타인 대표는 이스라엘이 협상대표단을 통해 보낸 위 문서를 쭉 읽어 내려갔다. 이 일은 2001년 초, 아쿠아바만에 있는 휴양지 타바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쿠아바는 오랜 분쟁 끝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1988년 반환한 지역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단이 평화정착을 위해 쏟은 갖은 노력의 결실을 맺기 위해 올해 1월 21일부터 칩거해온 곳이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에서 결의안 181조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태인과 아랍인에게 분할하도록 되어있다]가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흥 독립국인 이스라엘이 전쟁에 휘말려 1948-49년의 대살육의 참사를 빚게 되어 결국 양측 모두에게 희생과 고통만을 안겨주었으며, 이러한 비극적인 사태에는 난민으로 전락하여 소유를 잃고 정처 없이 떠도는 팔레스타인 민간인도 빼놓을 수 없다. ... 난민 문제의 올바른 해결책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조에 부합해야 하며, 이는 곧 유엔총회결의안 194조를 이행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측 대표는 이 문서를 읽고 난 후 밀려드는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이번 협상을 타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돌파구를 보면서 마음속에서 기쁨과 슬픔이 교차해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급진전의 성과가 이미 때늦은 결과라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최초로 자국이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에 부분적으로나마 책임이 있다고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적 원조를 하겠다고 합의했으며, "고향으로 귀향하여 그 주변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기를 희망하는 난민들은 최대한 조속한 시일에 이를 실행할 수 있도록 허가한다"고 명시된 1948년 12월 유엔결의안 194조를 이행하겠다고 확언하였다. 타바에서 최초로 발표된 위 "이스라엘 문서"와 회담 주역들의 대화의 노력은 2000년 캠프 데이빗 정상회담이 실패 후 재개된 수개월간의 협상이 빚어낸 값진 결과였다.

그러나 에후드 바락 이스라엘 총리가 2001년 2월6일 선거의 참패후 속수무책이라는 것을 타바 회담에 참여했던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이미 여론 조사에서 그의 라이벌인 아리엘 샤론 후보가 바락 총리를 20%포인트 이상의 차이로 앞지르고 있었고, 며칠 뒤 사브라와 샤틸라 대참사에 책임이 있는 샤론 후보가 이스라엘 새 총리로 선출되었다.

7개월 후, 두 민족 사이에 파인 골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어졌고, 평화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먼 신기루와 같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폭력의 수위는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 매일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폭발로 무너진 가옥과 쑥대밭이 된 농토가 연일 집계되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불시에 공습해대는 통에, 이 지역의 자치(自治)는 그 의미가 무색해져버렸다. 도시와 마을 봉쇄는, F-16 전투기 폭격의 파괴력에 견줄 수는 없지만, 이미 뿔뿔이 흩어진 채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굶주림의 고통까지 안겨주었다.

부당한 대우와 고문, 여기에 아이들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는 상황에서, 정치적 인물의 암살, 팔레스타인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검문소에서 당하는 치욕은 곧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단결하여 이스라엘 점령에 항거한다는 대의 하에 순교를 불사하는 전 팔레스타인의 결사항전으로 이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마스를 비롯한 다른 이슬람 운동의 지지율이 일년 새 전체 팔레스타인 인구의 15%에서 25%로 상승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오히려 그 수치가 더 높지 않은 점이 이상할 정도이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살폭격으로 인해 공포에 떨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외출할 때는 물론이고 자녀들이 밖에 나갈 때는 잔뜩 겁에 질린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는 아예 면역이 된 듯 무관심하면서도 자신들의 군사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거절**

올해 초만 하더라도 타바 협상에서 양측간의 합의가 임박한 듯 보였는데, 도대체 어쩌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2000년 7월 미국 캠프 데이빗에서 열린 중동정상회담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쪽에서 보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수반이 정상회담에서 제시된 "관대한 제안"을 거부한 것은 바락 총리의 말처럼 "본색을 드러낸"것 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라파트 의장의 제안 수락 거부의사를 지지하고 나섰고, 이는 이스라엘을 섬멸하겠다는 끓어오르는 의지를 확인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그 제안이라는 것이 정말 관대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것인가? 국제법에 의거해 봤을 때, 이에 대한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국제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모든 지역 내에서 철수해야 하며, 동이스라엘에 있는 정착지를 포함한 모든 정착지를 철거하도록 되어있었다. 또한 "관대한 제안"이란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 용어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표현된 말이며, 피정복자는 겸허하게 이를 받아들여 인준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강자가 약자에게 하달한 평화안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수개월간 언론은 이 점을 호도한 채, 캠프 데이빗 정상회담의 실패의 책임을 팔레스타인에 전가했다.

캠프 데이빗 회담에서 나온 세부사항들은 일년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다. 이 세부사항에는 이스라엘측 평화안에 내포된 간교한 의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안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단지 '제한적 주권'을 가진 국가일 뿐이었다. 서방둑의 9.5%가 이스라엘에 합병되고, 요단강을 낀 10%가량은 이스라엘이 '장기' 임대하기로 되어있었다. 서방둑 지역은 이스라엘이 키랴트 아르바와 헤브론의 심장까지 직통할 수 있는 회랑 을 포함해서 세 구역으로 분할되고, 팔레스타인 국경 외각 통제권은 이스라엘이 유지하도록 되어있었다.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해결방안은 아예 흔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관해서 만은 바락 총리도 자신의 확고부동한 신조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자국의 "영원한 수도"로 포고한 예루살렘의 분할은 그로서는 이전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예루살렘은 누가 무엇을 소유할 것인가가 분명치 않더라도, 양 국가의 공통의 수도가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캠프 데이빗에서 진정한 대화는 아예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바락 총리는 아라파트 의장과 1대1 협상을 거부했다. 아라파트 의장 역시 바락 총리를 불신하였다. 바락 총리는 1999년 5월 선거기간부터 근 일년간 팔레스타인 관련 서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이 기간동안 매달린 시리아와의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바락 총리는 서방둑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제 3차 재배치 일정을 자신이 직접 협상해 놓고도 합의 사항 실행을 무기한 연기해버렸다. 게다가 바락 행정부와 이스라엘 국회가 양도 승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부디스, 알 아자리아, 사와흐라, 아나타 4개 예루살렘 주변 마을을 팔레스타인에 양도하지 않았다.

캠프 데이빗에서 제시된 이스라엘측 계획안의 이면에는 평화와 오슬로 협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유별난 개념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정부는 물론이고 국민조차도 팔레스타인인의 인간 존엄의 권리와, 자유권, 안보권, 독립권보다 이스라엘의 권리가 우선한다는 생각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오슬로 협약은 두 명의 평등한 입장의 동반자끼리 맺은 결혼서약이 아닌 점령자와 피점령자 사이에 형성된 타협에 불과했다. 그리고 협상의 매 단계마다 미국의 비호 하에, 점령자인 이스라엘은 자신의 관점만을 강요하려 했다.

12차례의 합의가 1993년과 2000년 사이에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이 중 극히 일부만이 이행되었으며, 그나마 지연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측이 합의 사항 이행을 지연하고 끊임없이 발뺌을 반복하자, 결국 이를 목도한 팔레스타인의 인내는 한계를 넘고 말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긴 터널을 지나고 나면 그 끝에는 자유와 독립이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때문에 과격급진주의와 이슬람주의 운동은 별반 지지를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양측이 합의한 잠정적 자치 기간이 끝나고도 일년이 더 지난 시점에서 이스라엘이 제시한 계획안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을 통치한다는 생각을 접지 못하고 있다는 것만을 확인시켜 주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이스라엘은 주둔을 위한 건설을 계속하였다.

아라파트 의장이 자신의 계획안을 거부하자, 바락 총리는 아연실색했다. 바락 총리는 정치적 성향의 이스라엘인들의 구미에 맞다고 여겨지는 계획안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국제법은 무시한 채로 말이다. 바락 총리는 팔레스타인이 양보하여 자신의 안을 수락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사실 1993년 이래로 팔레스타인 정권(PA)은 수 차례 양보를 거듭해 왔다.

그러나 이번은 팔레스타인의 향후 지위를 정하는 최종 협상이었다. 사정이 달랐다. 아라파트는 "그 동안 있었던 잠정 협약에서 보여준 융통성은 별개의 문제이며, 최종 지위에 관한 문제는 유엔결의안 242조 즉, 동예루살렘과 가자 지구를 포함한 서방둑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점령 종식을 요구하고 있는 결의안에 부합할 경우에만 합의가 가능하다"는 점을 엄중히 경고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식민지화되었다는 점은 망각해버리고 우월감에 사로잡혀 이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라파트 의장이 캠프 데이빗 회담에서 물러서지 않자 "이 땅에 평화를"이란 기치를 내건 팔레스타인인들은 전폭적으로 그를 지지하였다. 캠프 데이빗 정상회담은 부분적인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마치 지구종말이라도 되는 양 요란을 떨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협상은 계속 진행되었고, 합의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있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이미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섰고, 이스라엘의 선거전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불씨였다. 2000년 9월 28일 아리엘 샤론 후보가 예루살렘의 고도(古都)에 있는 아크사 사원을 대대적으로 방문하였다. 바락 총리가 샤론 후보의 아크사 방문을 허락한 데는 이번 방문을 통해 샤론 후보가 그의 정적인 벤야민 네탄야후보다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길 바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바락 총리는 앞으로 있을 선거에서 샤론 후보를 가볍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샤론이 자신과 견줄만한 대등한 인물이길 바랬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샤론의 방문을 명백한 도발 행위로 받아들였고 격노하였다. 3일 후 이스라엘 군대는 무장도 하지 않은 팔레스타인 30명을 사살하고 5백여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누구의 명령을 기다릴 것도 없이 팔레스타인인들은 봉기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점령의 즉각적인 종식을 요구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7년 간의 지연과 약속 불이행, 이로 인해 산산 조각난 꿈에 격분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제2차 민중봉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팔레스타인 봉기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은 이스라엘 정부에 있다고 할지라도, 팔레스타인 지도부 역시 2000년 여름 정상 회담 이래로 중동 지역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은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면키 어렵다. 아라파트 의장의 권위주의와 권력 계승을 둘러싼 분쟁, 그리고 심각한 부패로 무력해진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수개월 내내 마비상태나 다름없었다.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샤론 후보가 승리할 경우 입게 되는 타격을 간파하지 못했다. 때문에 2000년 10월 유혈사태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던 '아랍계 이스라엘 유권자'들을 동원해 어떻게 손 써볼 겨를도 없이 이스라엘의 선거는 끝이 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정권은 캠프 데이빗 정상 회담 이후 흘러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정보에 응수하기 위해 여론 운동을 조직화한다거나 전략을 수립하는 것과 같은 분명한 목표를 세우지도 못했다. 게다가 성급하게도 팔레스타인 모든 난민의 '귀향할 권리'를 언급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성산(the Temple Mount)'의 신성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바람에 이스라엘은 공포에 휩싸였다. 더욱이 미국이 협상카드의 99%를 쥐고 있다고 오판한 아라파트 의장은 이스라엘 국민의 지지 없이는 어떤 합의도 불가능하다는 중대한 사실을 간과해버렸다.

그러나 설령 팔레스타인이 제 아무리 심각한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유엔결의안에 명시되어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1990년 아무도 쿠웨이트가 민주화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결국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종식되었다. 미국 뉴욕주 출신 외교위원회 소속 헨리 시에그만 의원은 아라파트 의장이 이스라엘측의 평화안을 거부한 것이 비록 경솔한 처사라고 할지라도, "국제사회가 인정한 서방둑과 가자지구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 자체를 철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자택일**

"싫으면 말고."
바락 총리가 캠프 데이빗에서 제시한 자신의 안에 대해 표방한 입장이다. 그러나 바락 총리는 자신이 그어 놓은 "한계선"을 하나하나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제 2차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그랬을까? 신벳 국내안보국장을 역임했던 아미 아얄론이 고찰한 바와 같이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이 말로 해선 안 듣는 족속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팔레스타인 국민의 최소한의 이익이라도 존중되어질 수만 있다면 PLO는 유연하게 대처해 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1년 1월에 있었던 타바 회담은 팔레스타인과 바락 정부 협상팀이 벌인 협상의 최고 정점이었다. 2001년 1월 27일 최종 코뮤니케에서 양측은 모두 조만간에 원만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4대 쟁점 사항인 영토, 예루살렘, 안보, 난민 문제를 다루고 있는 문서 작성과 주요 협상 당사자들간의 회담 후에 나온 결론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양측은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조에 동의함으로써, 1967년 6월 4일 작성된 조항에 의거하여 최종 국경선을 확정한다는 사항과 이스라엘이 자국이 합병한 모든 영토에 대해 배상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스라엘 대표단은 서방둑의 94% (이는 정착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20%를 포함하고 있다)를 반환하고, 이스라엘 영토의 3%에 상응하는 지역을 양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기서 3%에 해당하는 지역은 서방둑과 가자지구를 연결하는 안전로의 확보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며, 팔레스타인의 주권이 미치지 못한다.

캠프 데이빗에서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요르단 계곡과 아리엘 동쪽에 이르는 실로와 케두밈과 벳앨 같은 고립 지역 뿐 아니라 5만 팔레스타인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정착지의 북쪽에 이르는 지역을 포기하겠다고 공언하였다. 더 나가, 헤브론 중심지에 정착한 팔레스타인인들의 타지역으로의 이동을 허가하고 키랴트 아르바에 인근한 정착지 및 팔레스타인 영토내에 있는 다른 정착지를 해체하기로 합의하였다.

팔레스타인 대표단은 팔레스타인에 관한 한 100% 개념을 고집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교도소에서 교도소 시설의 95%에 해당하는 감방, 식당, 운동장, 의료시설 등은 당연히 제소자들을 위한 시설이다. 나머지 5%에 해당하는 부분은 전체 수감자를 통제하기 위해 유지되는 교도소 경비를 위한 공간일 뿐이다." 팔레스타인 대표단은 서방둑의 2%에 해당하는 부분을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영토와 맞바꾼다는 조건으로 양도하기로 합의했으며,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국경을 가르고 있는 헬루짜 사구(砂丘)를 양도하겠다고 제의했다. 조속한 시일 내에 철수가 이루어지도록 되어있었으며, 이 시기를 두고 이스라엘은 3년, 팔레스타인은 18개월을 주장하였다.

예루살렘은 분할되지 않고 양국이 수도로 정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캠프 데이빗 회담에 참여했던 요시 사리드 좌익 메레게츠당 지도자는 "우리는 분할의 원칙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클린턴 안에 따르면 유대인의 것은 전부 유대인에게로 무슬림의 것은 모두 무슬림에게로 돌아가기로 되어있었다고" 회고했다. 팔레스타인은 하람 알 샤리프 (아크사 지역)에 대한 주권을 요구했고, 이스라엘은 서쪽 벽 전체에 대한 주권을 원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검토되었는데, 여기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개 회원국과 모로코에 일정 기간동안 주권을 이양하는 방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안보 문제도 집중 거론되었다. 팔레스타인은 자국의 제한적 무장화와 특정한 조건으로 세 개의 이스라엘 초기 경고 초소 설치에 합의하였으며, 팔레스타인 국경에 국제군이 주둔하는 것을 수용하였다.

***난항**

요르단과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 영토 각지에 흩어져 있는 3,700만 팔레스타인 난민은 협상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자 캠프 데이빗 정상 회담 실패 이후 이어지는 끝없는 쟁론의 주제였다. 아라파트 의장은 이스라엘을 "난민의 바다" 빠뜨려 익사시키기라도 하겠다는 것이지. 1999년 9월 이래 지속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을 쭉 지켜본 프랑스 2 특파원, 찰스 엔더린은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만약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3,700만 명에 이르는 난민의 이스라엘 귀향을 명시한 평화안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는 정말 무지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팔레스타인이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그런 무모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그 대가로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에 속한 구역을 수도로 정할 것과 서방둑의 실질적인 전 지역과 가자지구를 얻어내는 일이었다."

엔더린 특파원은 주장은 타바 회담에서 현실화 되었다. 난민 문제를 맡은 나빌 샤스와 요시 베이린은 협상이 진전중이라고 밝혔다. 양측은 결의안 제 242조에 부합하는 난민 문제의 올바른 해결책은 결의안 194조를 이행하는 것뿐이라고 단언했다. 그들은 또한 난민 문제의 근원을 분석하는 데도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 분석에 근거한 구체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다섯 가지 선택안이 난민들에게 제시되었다.
(1) 이스라엘로의 귀향
(2)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양도한 이스라엘 지역으로의 귀향
(3) 팔레스타인 정부로의 귀향
(4) 현재 거주지에 정착 (요르단, 시리아 등)
(5) 이 외의 제 3국행 선택 (캐나다를 포함한 몇 몇 나라가 상당한 수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팔레스타인은 난민들이 위 다섯 가지 안 중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는 유태인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뜻을 재차 강조하였으며, 이 점은 팔레스타인이 1988년 팔레스타인 국가이사회(PNC)에서 팔레스타인의 독립 선언시 천명한 부분이었다.

요시 시라드는 "난민들의 이스라엘 귀향 여부는 결국 이스라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팔레스타인도 인정하는 바라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산가족 상봉 정책의 일환에 포함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4만 명의 난민이 5년에 걸쳐 이스라엘로 귀향할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십만 이하의 제안은 협상 진전에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응수했다. 팔레스타인 문화정보부 장관인 야세르 아베드 라보는 이제 마지막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는 귀향 난민의 정확한 수를 정하는 것만 남았다고 말했다.

양측은 레바논 정부에 의한 정치적 차별로 고생하고 있는 레바논 출신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져야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이스라엘 문서는 이 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촌의 난민들이 처해 있는 곤경을 조속히 해결할 의무가 있음을 밝힌다."

난민들을 돕기 위한 국제위원회와 기금이 즉각 설치되기로 되었다. 최종적으로 양측은 아랍 국가를 떠나 이스라엘에 정착한 유대인들에 대한 보상은 이번 양자 회담에서 다루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였다.

***실기(失期)**

타바 회담에서 이와 같은 급진적인 성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양측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을까? 양측은 이러한 진보적인 성과가 너무 늦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협상이 막바지 마무리를 맺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2월6일 선거를 치뤘고, 협상을 하던 이스라엘측 주체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의 선거가 5월에만 있었더라도 우리는 2, 3주 안에 협상을 매듭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베드 라보는 주장한다. 그러나 바락 총리가 주저하고, 망설이고, 회담을 중단하고 재개를 반복하더니 급기야 예루살렘 전체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요구하고 나섰다. 나비 샤아쓰는 당시 "아브라함 버그가 이끄는 이스라엘 정부 내의 '도덕주의자들'에 의해 압박받던 것"을 상기했다.
아브라함 버그는 "이스라엘 유권자들은 바락 총리가 국가의 이익을 희생시켜 자신의 정권의 이익을 유지시키고 있다고 의심한다"고 말했다. 선거의 참패는 곧 타바 회담 협상 거부를 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아베드 라보가 설명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협상팀은 조약을 작성할 시간조차 없었는데, 성명서에 불과한 문서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런 문서로는 어떤 사항도 집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샤론 총리가 단순한 성명서 하나에 속박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만약 이스라엘로부터 구체적인 양보를 받아내지 못한다면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 여론에 자국이 양보한 것을 "납득시켜야만" 했을 것이다. 아라파트 의장과 바락 총리의 막바지 정상회담이 고려되기도 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개월간의 수고와 성과를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양측 대표단은 타바 회담에 참여한 미구엘 앤젤 모라티노 유럽 연합 특사에게 이번 회담의 보고서를 작성을 요청했다. 이는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차원이라기보다는 조만간에 회담이 재개될 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국제적인 차원의 팔레스타인인 보호가 최우선이라면, 이는 곧 국제적인 사명을 의미하는 것이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정치적인 해결만이 심각한 통제력 상실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7월 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의 각계 지도층 인물들은 용기를 내어 이 점을 환기시켰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세 명의 장관과 (야세르 아베드 라보, 나빌 아므로, 히샴 압둘-라젝)과 지식인들(하난 아쉬라위, 사리 누세이베흐, 살림 타마리)이 이러한 의지를 피력하였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요시 베일린 법무부 장관을 위시한 다양한 작가들 (아모스 오즈, A B 여호수아, 데이빗 그러스만)이 동참하였다.

양측의 공동 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양국 국민 모두가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중에 아래 서명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더 이상의 참사를 막고, 점령을 종식시키며, 조속히 협상에 복귀하여 양국 국민 사이에 평화를 구현하기 위하여 한자리에 모였다...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간의 인류애와, 우리가 평화정착을 위한 동반자라는 것을 확신하며, 양국 국민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전쟁이 아닌 협상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할 길은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합법성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는 곧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조와 338조를 이행하여 예루살렘에 양국의 수도를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나란히 이웃하여 살수 있는 1967년 국경선에 근거한 해결을 의미한다.
양측 모두에게 공정하고 정당하며, 국가로서 존립하겠다는 열망을 실현하여 각각의 시민에 의해서 결정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주권을 손상하지 않는 모든 현안에 대해 해결방안이 모색될 것이다."

누구나 이제 더 이상의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지역 전쟁으로의 단계적 확대나, "적 아니면 동지"라는 식의 끝없는 분쟁, 그리고 승자 없는 전쟁의 악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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