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생계의 방편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일을 통해 성장하기도 하고, 일터에서 사회적 관계를 쌓기도 하며, 사회적 인정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을 통해서 질병에 걸리기도 하고 사고, 혹은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일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막대하며, 특히 일 중심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모든 것이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라면, 일을 하고 있는 사람뿐 아니라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일이 가진 의미는 클 수밖에 없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자 비생산적인 사람이 되고, 사회적 고립에 직면할 수도 있다.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건강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을 잠시 중단한 사람에게도 이런 낙인과 모멸감이 작동할까? 특히 그 건강 문제가 무언가 딱 부러지게 설명하기 힘든 '소진(burn out)'에 의한 것이라면? 국제 학술지 <건강과 질환의 사회학(Sociology of Health & Illness)>에 실린 논문은 소진 때문에 병가를 낸 사람들 사이에서도 건강과 질병, 그리고 일을 밀접하게 엮는 도덕적 질서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때의 도덕적 질서란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할 것인지에 대한 일련의 규칙과 습관을 가리킨다.
연구진은 핀란드 사회보험청(☞관련 자료 바로 가기 : Finnish Social Insurance Institution) 기금으로 운영되는 1년 동안의 소진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성 14명과 남성 1명을 심층 면담한 후 병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병가가 드러내는 도덕적 질서란 '존중할만한 노동자'와 '믿을만한 환자'라는 이상적 모습 속에 나타나고, 이 두 가지는 활동성, 책임성 그리고 생산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 이러한 도덕적 질서는 병가를 협상하고 설명하며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딜레마를 통해 드러나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논문 바로 가기 : The moral orders of work and health: a case of sick leave due to burnout).
첫째, 아픈 원인을 설명하기.
직장에서 병가를 내려면 일단 아프다는 것 자체를 인정받아야 하고, 몸의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를 구체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소진의 경우 이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한 참여자는 '나는 겉으로는 활기차고 행복해보이지만 내 머릿속은 원자 폭탄 같았다'며 진단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심각한 소진은 결근을 유발하고, 심지어 노동하는 삶에서 영구적으로 이탈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당사자에게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소진은 세계보건기구가 정한 국제질병 분류기준(ICD-10)이나 미국 정신의학 협회가 발간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IV)에 특정 질환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핀란드에서도 장애나 병가 보상과 관련한 결정 근거가 정립되지 않아서 소진 대신 우울증 같은 진단명이 쓰인다고 한다. 이러한 애매모호함은 소진 때문에 병가를 낸다고 할 때 노동자에게 높은 수준의 책무성을 요구하도록 만든다. '정당한 환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중의 낙인을 견뎌야 한다. 분명하지 않은 진단명으로 아프다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노동하고 있지 않다는 이중의 낙인 말이다. 논문에는 노동자가 우울증으로 병가를 냈을 때 (일 때문에) '소진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성향 때문에) 우울하다'고 치부되거나, 반대로 직업환경의사가 우울증 진단을 내리며 긴 병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는데도 '나는 우울증이 아니라 그저 소진되고 피곤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병가를 거부한 노동자의 사례가 나온다. 그는 '나는 우울한 것이 아니라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하기 때문에 계속 일을 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착취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렇듯 건강 문제가 생겼는데도 스스로 병가를 거부하는 것은 '존중할 만한 노동자'라는 정체성이 위협받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연구진은 증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인과적 설명을 통해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그 아픔이 애매모호하고 타인이 관찰하기 힘든 것일수록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연구팀은 우울증이 문제적이라고 지적한다. 우울증은 주로 개인적 요인 때문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우울을 호소하는 노동자는 일터의 구조적 문제나 그에 대한 반응이라고 여겨지기보다 그저 개인적 문제를 겪고 있다는 낙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병가는 휴가가 아니다.
병가 중에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적절한 생활습관을 이어가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해야 한다. 수동적으로 우울한 사람이 되기보다 '정상성'과 건강함을 보여줄 수 있도록 최대한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믿을 만한 환자'임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또 너무 능동적이면 안 된다. 이렇게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활동을 함으로써 병가를 낸 사람은 '믿을만한 환자'가 되어야 한다. '믿을만한 환자'가 된다는 것은 건강에 위기가 닥쳤을 때 자신의 질병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환자이자, 심지어 일을 쉬고 있을 때에도 활동에서 생산적 태도를 유지하는, 역시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자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연구진은 일 때문에 소진되어 일을 쉬는 병가 기간 동안에도 마치 '일 같은' 건강관리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활동과 생산성에 대한 의무가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셋째, 직장 복귀는 노동자의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
복귀 과정에서 의사와 고용주는 병가 신청 단계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통제하고 평가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노동자는 복귀 후 조직에서 취약해진 자신의 위치에 직면한다. '너만 아픈 것이 아닌데' 병가를 냈던 사람, 즉 '노동자는 주어진 환경이나 피로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는 도덕적 질서를 이미 깨뜨린 사람은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논문에는 병가를 쓰는 것보다 병가를 쓴 후 일터로 복귀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고 말하는 참여자의 사례가 나온다. 병가 전에는 일터에서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고 생각했는데 병가를 다녀온 후에는 상사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이 참여자는 복귀 후 조직 생활에 잘 어울리지 못했고 위계에서도 좌천되었는데, 그녀는 이것이 병가를 쓴 자신에 대한 동료들의 복수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논문에 등장하는 연구 참여자들은 대부분 교육 수준이 높고 정규직이었으며 상대적으로 길고 안정적인 경력을 이어온 이들이었다. 장시간 노동, 압박이 큰 근무 환경, 형편없는 관리자들에게 시달리고 있기는 했지만 노동시장 주변부에 있거나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노동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들조차 병가를 쓰는 것은 그들의 노동하는 삶에 위협이 되고 일터에서 평가절하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이들보다 사정이 나쁜 노동자들에게는 더한 잣대가 들이밀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들의 병가 기간은 5주에서 1년까지 다양했다. 참여자 15명 중 1/3이 소진 때문에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전 몇 주에서 10개월까지 병가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연구팀은 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핀란드의 상황이 문제적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진단명도 불분명한 정신적 고통인 소진으로 1년 가까이 병가를 쓰고, 사회보험청의 기금으로 운영되는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이 상황이 우리로서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일 중심 사회의 끝판왕이자, 노동권, 노동자 건강권, 사회보험제도,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 등이 핀란드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한국에서라면 어떨까? '겨우' 소진 정도로 병가를 낼 수 있을까? 병가 기간에는 어떤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야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병가에서 돌아오면 과연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을까? 그저 생각만으로도 암울해진다. 부디 새해에는 한국 사회가 조금이나마 '일 중심 사회'를 탈피할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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